최명찬 2009-04-17 10:56:58
조회수 : 2,672
여러분들은 농사를 지으시니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그렇지만 누가 나한테 억울한 일을 했을 때
그것이 내가 지은 바라는 것을 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긍정되는 땅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염불을 통해 이 입정을 깊이 관조해서 시간과 공간이 없는 데로, 청정한 데로 끌고 들어가면 인과가 ‘야! 이게 내가 지어서 받는 것이구나’ 하고 긍정이 됩니다.
긍정은 분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인과가 성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깨끗한 마음속에서만이 인과가 ‘그렇지!’가 됩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분별로써 인과를 이해해야 합니까?
아니면 깨끗한 마음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깨끗한 마음으로 이해해야지요. 그것을 ‘절대 인과’ 라 합니다.
절대 인과는 무슨 뜻이냐?
‘네가 나한테 그러는 것은 과거에 내가 너한테 그랬기 때문이다.’ 라는 상대적인 인과가 아닙니다.
절대 인과는 능이성 유상과 능이성 무상의 두 가지 입정처의 기능으로서,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었을 뿐입니다.
입정처에서는 너와 나는 성립이 안 됩니다.
인과를 성립할 때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인과는,
‘내가 남한테 그랬으니까 내가 남한테 그대로 받는다.’ 라는 견해를 일으켰습니다.
그렇게 대조하는 것을 ‘어리석은 인과’ 라 합니다.
입정처에서는 가는 사람이 오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었으니까 저것이 존재할 뿐이지,
‘네가 나한테 그랬으니까’ 이렇게 상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원상 진리에서는 ‘절대 인과’라고 합니다.
이렇게 토가 떨어져야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너와 나라는 견해를 짓지 않아
분별에 들어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이렇게 되었으니까 저렇게 된 것이지,
‘네가 그렇게 해서 내가 그런 것이다.’ 가 아닙니다.
긴 것이 있으니까 짧은 것이 존재한 것이지
내가 길어서(長) 네가 짧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완전히 이해해야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에 완전히 토가 떨어져 어리석지 않게 됩니다.
중요한 얘기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배우는데, 원불교를 배우는데
인과를 믿지 않으면 불교공부를 못합니다.
인과를 믿지 않는 사람은 부처님 공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우주의 원리는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으로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이 가장 걱정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천만가지 선한 일을 가르쳐 주는 것보다
불생불멸(不生不滅)과 인과보응(因果報應)의 이치를
믿고 깨닫게 해 주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하셨습니다.
이 인과는
분별 의식으로가 아니라,
오직 입정처 안에서만 긍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에이,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저 사람이 이렇게 했겠지’ 가 아니라,
빨리 염불을 해서 입정에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하고, 참회하고, 염불을 해서 이 자리에 탁 들어가면
‘그래서 그랬구나!’ 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생사(生死)가 오더라도 걱정이 없단 말씀입니다.
그래서 절대 인과입니다.
앞으로는 어떠한 일을 당하더라도
분별의 인과, 의식의 인과를 작용해서는 안 됩니다.
항상 입정처라는 청정한 마음속에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이라는 두 가지 기틀이
무량세계를 전개했다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