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떠나야 숲이 보인다.
조정제
숲에 머물고 있으면 숲속은 이것저것 보여도 숲의 모양새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숲의 바깥세상도 도통 볼 수가 없다.
숲속에서는 온갖 형태의 나무, 갖가지 풀, 형형색색의 꽃, 기이한 벌레들이 보이고, 춤추는 새들의 노래가 들리지만 숲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숲이 어떻게 생겼고 구조는 어떠한지, 숲이 외딴 섬인지, 어디로 연결되어 있는지 숲 속에 앉아서는 볼 수가 없다. 숲의 높낮이와 공제선(skyline)의 아름다움도 보지 못한다. 숲 속 음지에 사노라면 저 찬란한 태양을 보지 못하고. 따스한 양지를 맛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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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때에 자주 마루에 걸터앉아, 넓고 넓은 바닥들 끝자락을 가로 질러 달리는 신작로(그 당시에는 큰 길을 新作路라 불렀다)를 넋 잃고 바라다보았었다. 고성(경남)에서 마산/부산으로 가는 길인데 그 너머 뭣이 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하였다. 시골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드디어 촌놈이 처음 버스를 타고 그 길을 따라 부산의 한 고등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발표 날, 합격자 명단을 앞에서부터 한참 따라 내려갔으나 끝이 얼마 안 남았는데도 내 이름 석 자가 보이지 않았다. 아뿔싸, 처량한지고. 맨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시골중학교에서 수석이라고 뽐냈는데 창피했다. 하지만, 그 창피는 훗날 서울대학으로 갈수 있게 한 쓴 약재가 되었다. 고성이라는, 작은 숲을 박차고 부산으로 떠난 것이 일생일대의 황금 같은 기회였음을 그때는 상상하지 못했다. 한참 뒤에, 서울에 살다가 명절 때에 시골에 가보면 그 넓은 들판이 종로바닥을 휘젓고 다니는 서울 아가씨들의 한 아름이나 되는 엉덩짝 보다 좁아보였다.
사람들은 숲을 떠나기는커녕 자기의 숲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너의 편 내편 가르고 그들만의 숲 속에 모여든다. 그 속에 머물거나 집안에만 칩거해 있으면 넓은 세상이 돌아가는 현상과 이치를 모른다.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는 하늘이 항상 쟁반같이 동그랗게만 보인다. 외눈박이 인간사회에서는 눈이 두 개인 보통 사람을 보면 외계에서 나타난 괴물로 안다.
불가에서는 나를 놓아라, 나를 뛰어넘어라 한다. 나라는 착심을 놓아라, 우리의 국집(局執)에서 벗어나라고 한다. 그래야 세상이 제대로 훤히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없고 우리 집이 없으면 세상이 다 내 집 내 이불이 된다.
경상도사람은 경상도를 떠나봐야 경상도의 위상과 상황을 차원 높게 더 잘 알뿐 아니라, 호남을 객관적으로 보고 나라 전체를 알 수 있다. 전라북도 사람들은 새만금 간척에 매몰되어서 나라 전체를 보지 못했다. 그러니 국가에 쌀이 남아 골칫거리인데 세계 최대의 간척을 해서 대단위 농토를 만들자고 했다. 이제 완공이 되었으니 뒷북쳐서 무엇 하랴. 지금이라도 숲속에서 헤매지 말고 저 넓은 세계를 내다보고 어렵사리 확보한 그 땅, 농토로 쓰느니, 세계적인 관광, 생명산업, 의료첨단산업 등 타용도(他用度)로 대담하게 전용(轉用)해야 할 거 같다.
산업기술과 학문의 영역에서도 한 부문의 전문화를 뛰어넘어 여러 부문의 범용화(汎用化)의 길을 걷고 있다. 학문영역은 과거의 학제적구분의 칸막이를 벗어나서 여러 학문간(多學制的, interdisciplinary)의 협력관계로 진전됨으로써 전문기술의 경계가 무너지고 이종(異種) 기술과 업종 간에 기술융합이 이루어지고 있다. 업종 간 경계의 붕괴 현상은 산업기술 측면 뿐 아니라 복잡한 사회현상의 원인을 규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 안에만 머물고 있으면 대한민국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외국에 나가보지 않고서는 로마, 파리, 런던, 뉴욕 등에 나붙어 뽐내고 있는 삼성이나 LG의 자랑스러운 대형 간판을 보지 못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임이 얼마나 부듯한지 느끼지 못한다. K 팝은 국내에서야 시큰둥한데 세계인들은 얼마나 미치고 열광하는지 나가보면 입이 떡 벌어질 거다.
2015년 2월 말 현재, 우리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나라의 면적을 합산해보면 지구 육지면적의 73.5%를 차지하고 있다. 대영제국이 가장 식민지를 많이 점령하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힘자랑을 할 때에 그 면적비율이 72%였으니 우리나라 자유무역협정 대상의 관할영토가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영국은 피 흘리며 무력으로 이룬 성과지만 우리는 21세기 세상 잘 만난 탓에 대화로 협상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으니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두둥실 춤을 추고 싶지 아니한가.
우리 선조들은 조선시대 쇄국을 하다 일본의 강점을 당하는 치욕을 당했었다. 우리가 일본보다 50년 가까이 늦게 개국하다 보니 일본이 저 만치 앞서 가 있었다. 북한이 꼭 조선 말기의 그 꼴이다. 백두산 혈통이니 주체니 하며 눈귀를 막고 국내에 파묻혀서 핵실험이나 하고 앉았으니 어찌 글로벌 시대에 지구촌의 변화에 적응하며 국민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겠는가, 한심하다.
우리나라 작금의 문제도 자기 숲속에 갇혀서 나만의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다 보니 문제가 꼬인다. 기업도 노조도 자기들만의 숲에서 벗어나 세계를 내다 봐야한다. 기업과 노조가 합력하여 제품을 만들고 이윤이라는 이름의 빵을 생산한다고 하자. 그 빵은 둘이 서로 많이 차지하겠다고 사생결단으로 싸움질하여 어느 한편의 잔치로 끝나야 할까. 요새는 소비자가 왕이 아니라 더 나아가 황제라고 칭하는 데 그 제품을 사주는 소비자와 고객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고객관리는 현대 기업의 최고 경영전략에 속한다. 이윤의 일부는, 마땅히 그들 고객에게 질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공급해주는 데 할당해야한다. 또 일부는, 취직을 못하고 실의에 빠져있는 청소년들에게 취업의 길을 터주는데 할애해야 한다. 그러자면, 그 빵은 (1)기업, (2)노동자(또는 노조), (3)소비자, 그리고 (4)실업자(잠재취업자)의 네 몫으로 나누는, 4분(分) 원칙에 대한, 사회적인 대타협(大妥協)이 필요하다.
「4분 원칙」은 길게 보아 이타행(利他行)에 그치지 않고 끝내 나에게 이익이 돌아오기 마련이다. 숲을 떠나는 것은 결국 자기를 위하게 된다. 이것이 나도 위하고 남도 위하는, 소위 자리이타(自利利他) 행을 실현하는 첩경이다. 자 우리 미련 없이 숲을 떠나 세계 여행에 나서자. 우리 노인도 더 쇠하기 전에 함께 나서서 우리가 일조한, 해 지지 않는, 우리 자유무역의 땅, 대한민국 경제영토를 떵떵거리고 밟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