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독백(獨白)
숙 산 김 성 규
익산에 다녀왔다. 지난주에는 다섯 분의 원로(元老) 스승님들께서 함께 먼 길을 떠
나시었다. 날씨가 고르지 못한 환절기 탓이었을까? 퇴임 후 연로하신 몸으로 병상(病
床)에 계시던 스승님들께서 안타깝게도 연이어 열반에 드신 것이다.
평생을 오직 한 길로 일원대도의 성업(聖業)에 헌신해 오신 스승님들이시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오로지 깊은 수행과 중생제도로 일관해 오신 그 거룩한 생애의
곡절 앞에서 누구라 감히 그 끼치신 공덕(功德)을 일일이 다 사뢸 수가 있을까만,
후진(後進)들은 비워두고 떠나신 그 크고 넓으신 자리들을 돌아보며 못 다한 불충(不
忠)에 어찌 다 그 죄스러움을 고(告)해야 할지 몰랐다. 힘든 병상이었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온화한 모습으로 반가이 맞아주시며 또렷한 음성으로 일일이 안부를 챙겨
주시고, 법대로 반듯하게 잘 살아가기를 당부하시었는데..... 그 때의 그 자상하시던
모습들을 생각하면 그렇게 망연(茫然)하고 죄송스러울 수가 없다.
한 생(生)을 어떻게 살다가 또 떠나야 하는지를 되새겨보는 한 주일이었다.
‘삶을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그만큼 생사(生死)의 연민으로부터 초연(超然)할 수 있다’
고 한 ‘톨스토이’의 말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누구나 잘 살다가 잘 떠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한 마디로 훌륭하게
죽는 법을 모르는 사람은 살았을 때도 사는 법이 나빴던 사람이라고 말들을 한다.
결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가 아니건만,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돌아보며 다시금 옷깃
을 여미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머지않아 나도 길을 떠난다. 때가 되면 여한(餘恨)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길을
나설 수 있어야 할 것이건만..... 쉽게 그리 될 것 같지가 않아 마음이 가벼워지지가
않는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시간들을 생각하면 마음부터 급해진다.
이미 지어놓은 허물들도 버거운 터에 자꾸만 늘어만 가는 죄업(罪業)들을 어찌 하고
떠날 것인지 생각만 해도 호흡부터 가빠진다. 혹자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라
고 충고를 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는 거다. 분연히 일어나, 남은 순간순간마다의 삶
에 더욱 엄정하고 충실하라고 한다. 아무쪼록 좀 더 깊이 생각하고 더욱 폭넓게 궁리
하여, 비록 짧은 한 마디 말이나 한 발짝의 거동이라도 진중하게 삼가며 살라는 거다.
제 무단히 마음 좁혀 제 인생에 누(陋)만 더 해 갈게 무어냐는 것이다.
최근 UN에서 발표한 인류의 평생연령분류표준에 의하면 나는 아직 앞길이 창창한
중년층(66세~79세)에 해당한다. 그렇거늘, 제 미리 반백(斑白)의 머리칼 따위에 주눅
이 들어 벌써부터 뒷방노인네를 참칭(僭稱)하며 스스로의 인생에서조차 변방인(邊方
人)으로 돌아앉으려 하다니..... 분연히 일어나 분기(奮起)할 일이다.
가소(可笑)롭기 짝이 없는 나이 궁상(窮相)일랑 멀리 떨쳐 버리고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