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좀 들어볼라는가? 저 길룡리 앞 개펄을 막아 옥답을
만들면 어떻겠는가?
조합 자산이 그쯤은 돼야 만백성을 위한 회상 (會上)을 만
들수 있겄는디."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朴重彬.1891~1943.) 대종사
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불교를 개교한 지 3년째 되던 해였다.
대부분의 종교가 제자를 모아 수련을 시작하는데 반해, 원
불교는 간척사업을 먼저 벌인 뒤 이어서 굶주림 해결에 나
섰다.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모토를 내세운 종교
다운 첫걸음이었다.
원불교 개교(開敎)100주년을 맞아 창시자인 '소태산 평
전'(문학동네)이 발간됐다. 소설가 .시인인 김형수씨가 집
필한 평전은 한국의 4대 종교로 성장한 원불교의 뿌리를 더
듬는다.
소태산은 비슷한 시기에 발흥했던 민족종교 창시자들과도
다른 면모를 보인다.
우선 자신에 대한 어떠한 형태의 신비화도 금지했다."위대
한 분들이 모두 기적을 일으켜 옆구리로 낳고 동정녀가 낳
고 하였다하여 다음 성자가 못 나오도록 길을 막으셨다"는
것이다.
소태산이란 호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다. 오랜 수행끝에
그가 깨달음을 얻자 주변에선 "강증산(姜甑山)이 재림했
다'고 했다.그러자 박중빈은 "나는 시루(甑)가 아니라 솥이
오. 솥에서 산 사람이란 말이오"라고 답했다는 것. 즉 가끔
씩 떡을 찌는 시루가 아니라 매일 밥을 하는 솥이라는 뜻에
서 '솥에산'을 발음 그대로 옮겨 '소태산'을 호로 삼았다는
것이다.
김 한수 종교전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