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리우에서 열리고 있는 2016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팀이 남녀 단체전과 개인전 금메달을 석권하는 신기록을 세워 폭염에 시달리는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나라 양궁(洋弓)의 역사는 40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59년 중학교 체육교사 석봉근이 청계천 고물상에서 버려진 헌 활을 주워서 연구하다가 ‘63년 서울 성동중학교에 궁도부를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양궁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한국이 국제양궁협회에 가입하고 최초의 양궁시범경기에 이어 공식대회를 개최하였다. 뒤이어 양궁은 전국체전에도 정식종목에 들어갔지만 국민들은 그것이 어떤 경기인지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한국인들이 양궁에 주목하게 된 것은 김진호(金珍浩)란 세계적 신궁(神弓)이 등장하고부터이다. ‘61년 경북 예천에 태생인 그녀는 예천여중 2학년 때 체육교사인 정갑표(鄭甲杓)의 지도로 양궁을 배우기 시작하여 꾸준한 노력으로 일취월장 천부적 소질을 꽃피우게 된다.
예천여고 1학년 때인 ‘77년 전국체전에서 1위를 차지했고, ‘7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개인전 금메달, 단체전 은메달을 땄다. 이어 ’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5관왕(30, 50, 70m, 개인종합, 단체전)을 차지하여 온 국민을 열광시키고 양궁에 눈뜨게 만들었다. 귀국시 김포공항에서 서울시내까지 환영인파 속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였고, 당시 예천에는 김진호양궁장이 생겼다가 뒷날 새로 국제규격에 맞는 예천진호양궁장이 들어섰다.
그 무렵 그녀의 실력으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서는 확실한 금메달후보로 기대되었지만 소련의 아프간전쟁 개입으로 서방진영이 일제히 참가를 거부하는 통에 무산되었다. 다시 ’83년 LA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이 되었으나 이듬해 ‘84년 LA 올림픽에서는 지나친 긴장감으로 동메달에 그치고 대신 금메달은 서향숙이 땄다.
김진호는 다시 ’86년 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이 됨으로써 건재를 입증하였고, 이후 우리나라에 양궁 바람을 일으켜 한국을 세계에 군림하는 양궁 강국으로 만든 <무녀리>가 되었다. 정갑표는 김진호를 발굴하여 세계적 선수로 기르고 한동안 국가대표팀 코취로 활동하였다. 한국양궁이 세계적으로 우뚝 서게 된 데는 김진호의 등장과 그를 길러낸 정갑표 코치의 공이 절대적이다.
여기서 한국 양궁의 역대 올림픽 성적을 살펴보면 여자팀은 단체전이 생긴 ‘88년부터 8회 연속 금메달, 개인전에서 ’84년 이래 ‘08년만 빼고 8회 금메달을 땄고, 남자팀은 단체전에서 ’88, ‘00, ’04, ‘08, ’16년 5회 금메달, 개인전에서 ‘12,’16년 2회 금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 밖에도 남녀 단체전과 개인전에서 숱한 은, 동메달을 땄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활쏘기에 능했던 먼 조상 동이족(東夷族)의 DNA가 남아 있나보다.
<여자> <남자>
단체전 개인전 단체전 개인전
‘84년 LA (제도 없음) 서향순
'88년 서울 <김수녕,왕희경,윤영숙> 김수녕 <박성수,전인수,이한섭> -
‘92년 바르셀로나 <조윤정,김수녕,이은경> 조윤정
‘96년 애틀란타 <김경욱,깁조순,윤혜영> 김경욱
‘00년 시드니 <윤미진,김남순,김수녕> 윤미진 <오교문,장용호,김청태>
‘04년 아테네 <박성현,이성진,윤미진> 박성현 <박경모,장용호,임동현>
‘08년 베이징 <박성현,윤옥희,주현정> - <박경모,임동현,이창환>
‘12년 런던 <기보배,이성진,최현주> 기보배 - 오진혁
‘16년 리우 <장혜진,기보배,최미선> 장혜진 <구본찬,김우진,이승윤> 구본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