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대판 봉불식 에 다녀왔습니다.
감동한바 5가지를 간추려 봅니다.
하나는/17평(3층 1층에6평남짓 )건물에서 숨죽이며 18년간 일원 교법의 삶을 살아오신 교역자 정신 입니다.
법조교무님이 18년간 숨죽이며 지낸 교당에 들렸다.
두세 점 전시된 아이들의 그림 속에 우리교당 크게 만들기 우리 교무님방 제일큰방 주세요. 라 멧세지가 담긴 그림이 게시판에 전시되어 있다.
법조교무님 염원이 그림 속에 가득 차있다. “헌집 줄께 새집 다오 ” 아이들의 노래 소 리가 들리는 듯하다 .
사심이 없어진 교무님과 교도들과 그 자녀들이 하늘마음과 통하여 3배가 확창된 교 당이 마련되어 새집을 가기게 되었다는 감동을 받았다.
이곳에서 교포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와 원불교교법을 설하시며 지내오신교무님
“ 작지만 깨끗하게 ” “힘들어도 끝까지 정성으로 ” 가 법조교무님이 18년 동안 오사카 교당을 지켜온 리듬 이었다.
둘은 /17시간 일해서 정제1억을 희사 하신 ()()() 교도님의 불심과 희사심 이다..
지바법인 때문에 우울해진 일본교화현장에 오사카 교당은 희망과 행복감을 주었다.
좌산상사님께서 오사카교당을 방문하면서 “1억을 담당해 볼 터이니 집을 좀 넓혀보라 “ 용기를 얻은 ()()() 교도님이 서원을 세웠다. 제가 하루에 17시간 일을 해서 그 수당으로 1억을 모아 보겠습니다. 발심은 실천과 기적을 만들었다. 보통 8시간 일하던 리듬을 9시간 더 일하여 교당 불사에 저축하기 시작했다. 이런 실천은 오사카 교포들에게 전율을 느끼게 하고 교무님께 든든한 힘줄이 되어 용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 님은 친정부모가 서울의 알뜰한 교도 라 했다. 교포생활을 하면서 보람을 얻게 됐다 며 감동의 눈물로 남타원 법조교무님 품에 안기는 모습을 응시 하며 눈시울을 붉히며 눈물을 닦아야 했다.
셋은 /한국어를 잊지 않고 구사하시는 교포교도들 이다.
치밀하고 정성스런 법조 교무는 한번 맺어진 인연들에게 편안 하면서도 질기게 인연이 되어 갔다. 해방후 모국으로 돌아가려는 교도들 중에는 한국에 돌아갈 곳이 없어서 남은사람, 이미 일본에 삶의 자리가 잡혀져서 버리고 가기가 어려워서 못가는 분류가 있었 다. 교포 2세 3세가 되었으니 대부분은 한국말을 잊었다. 6‘25전쟁이후 교도들 사이에도 조총련과 민단 이 나눠졌다. 교포2세 들 중에는 <한국말을 잊어버리면 모국에 가 지 못한다.> 는 생각으로 조총련 민족학교에 자녀를 교육보내기도 하고 본인도 글자. 배우는 써클 활동을 해온 사람들도 있었다. 한때 북쪽이 잘 살 때는 일본의 교포가 한국말을 배우도록 학교에 지원이 많았다한다. 사상과 이념을 넘어서 우리는 말을 잊어서는 안된다. 는 교포들의 순수한 그리움은 원불교 법조 교무님을 만나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해소 되고 김치전을 붙여 대접하는 법조교무님의 정속에서 자연스럽게 한국문화와 언어가 읽혀졌다 . 100주년과 봉불식을 기하여 교전쓰기 일기쓰기. 교서읽기 등의 교화프로그 램 속에서 잊었던 한글이 살아 움직여 봉불식 모국 사람들과 한국어로 이야기하려고 많은 준비를 해온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몇몇의 교포교도들은 법조교무 학년들의 됴쿄 관광과 봉불식 준비에 진행위원이 되어 능숙하게 가이드를 해냈다.
법조교무의 형부이자 교도회장이신 ()()()님은 교포 생활만 60년이 되어 한글에 서툴었는데 교전을 3회 읽고 그림 그리듯이 글짜를 쓰면서 한글에 달인이 되어 우리말로 환영사도하고 인사 응접등 교도회장 역할에 훌륭한 성과를 내주시며 내 조국 대한민국에서 오사카법당 마련에 도움 주셔서 진정으로 감동을 먹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여러 방법으로 표현해 주셨다.
회장님 과 교도들은 일본에는 부모 때문에 오게 되었지만 전쟁 중 슬프게 허기질 때 처음 먹어 보았던 우동 한그릇 맛은 잊을 수가 없어서 지금도 제일 맞잇는 음식은 언제나 우동이라고 말한다.
넷은/ 유학생활 속에서 교당의주인 되어주신 교도들과 그의 가족들 이다.
임은수교도 벌써 40대 후반이다. 일본에 유학을 간후 석사 박사 그리고 동경에서의 교수 임용까지 18년3개월 된 영동교당 학생회 청년의 출신이다. 그녀의 할머니 대구 서성로교당 창립교도 원타원 유대신행님이시고 그녀의 어머니 박신영님은 도봉교당 화정교당의 봉공회장을 여기하시는 알뜰한 교도이시다. 김법조 교무 가 도봉교당 부교무 시절에 할머니 제사 지내려 오고가며 인연된 청년이 법조교무가 오사카교당으로 발령 나자 당시 오사카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 은수씨는 어머니를 만난 듯 위로가 되었고 부교무 처럼 교당일에 주인으로 봉사 하게 되었다. 법조교무역시 천군을 얻은 듯 의지가 되어 작지만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어린이교화 학생교화를 하게었다. 방학때 휴가 때 마다 임은수씨 가족은 더욱 헌신적으로 오사카교무님을 돕게 되었다.
황자명 청년은 마산교당 교도 딸이다.
이모는 분당교당(임성원) . 외숙모는 청학교당. 온가족이 신심과 공부심으로 원불교와 삶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오사카교당의 건축성금을 모금을 위한 기도 때 온가족이 십시일반 공덕주가 되었다. 황자명 청년은 교당의 성가 반주 성가지도에 주역을 맡으며 교무님의 손발이 되고 있었다.
다섯은 / 끊임없이 후원과 격려를 해주신 모국 인연들 이다.
10월 4일 전에 있던 교당에서 모모라지 지역으로 이안된 봉불식은 오사카교당 환경의 엄청난 변화이다. 동생을 위해 정신육신 물질로 바탕이 되어주는 신제주 교당 ()()()교도님은 법조교무의 언니다. 큰언니가 오사카에 살게 된 인연으로 동생이 오사카교당 교무로 홀로 사는 단독 교무로 발령 나는 교단에 대한 아쉬움을 본인이 교단의 입장에서서 오사카교당 교포들에게 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울어 나는 주인심 이랄까?
이 주인심 은 큰언니가족을 감동케 하여 교포교도들까지 끈끈하게 동지의 정으로 하나가 되기 시작하여 우주의 큰 기운과 합산하게 되었다.
법조교무님의 동기동창 일원학년
일원학년들은 고르게 우수한 학생들이었다. 재주도 많고 교단에 중년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졸업후 20년이 되어가니 어렵지만 단독으로 교당을 꾸려가고 있다. 졸업 20주년 기념으로 봉불식에 참여하기로하고 법조교무가 큰 교당을 마련하는데 성의껏 협력자가 되고 주선해주는 합의동지가 되는데 조금은 자유가 생겼다. 동지중에서 윤()()교무는 18년을 줄곳 김치를 조달하였다. 강원도 어려운곳 6급지 교무로 있으면서도 교포들에게 희망이되는 김치를 보내고 또 보내는 정성을 쉬지 않았다. 김치 담그는 강습도열어 문화교류에 덕을 심어 주었다.
일원학년은 법조교무 18년간의 정성에 자신들의 힘을 보는듯 모두 기뻐하고 감동을 받고있었다. 동기 생들은 . 수학여행에온듯 격의없이 놀고 주인되어 봉불식에서 안내 축하.식장준비.청소. 도시락베포. 텐트치기. 교도들과 대화하기. 설거지하기. 왁짜지껄 활기차게 행복하게 동기들과 지내고 있었다. 봉불식을 마치고 마지막날 귀국시간에 바쁜중에도 새벽에 잃어나 교포 학교학생들에게 주기위해 마음담아 김밥80줄을 쌓며 즐거워하였다. 조국정을 담은 음식을 먹은날 학생들의수업분위기는 조용하고행복해진다는 법조교무님 마음을 함께한것이다.
설타원 전명진교무님
영산대학교선배이며 차문화 교류로 일본에 다니며 해외교포와 교류를 맺은 전교무님은 김원화 라는 교포를 오사카 교당에 끌어 당겨 연연을 법연으로 법조교무에게 힘이 되도록 인연후원에 공덕이 있다. 안부며 전화 안부. 물질과 격려 이런 크고 작은 후원은 해외교화 든든한 배경이 되어 왔다.
좌산 상사님 을 비롯 국내의 교무님들 교도님들의 수고 많다는 격려한마디 한마디가 뭉치고 뭉쳐 80여평의 마당이 있는 집이 마련 되었고 뒷집 터를 분양 받아서 오사카 교화터전을 크게 자리 잡으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대판교도들은 100주년행사에 10여명이 방문을 하였고 이제 40여명 법회를 꾸려갈 희망을 일구고 있다. 18년 만에 일본인 이 처음으로입교되어 4종의무를 지키는 교도가 생겼다. 이도또한 원광대학 김범해교수의 친분이 역할이 되었다.
일본 정부 차관급까지 지내신분(히데오 이마가와상), 이분은 현재 일본국제직업훈련학교 이사장이다., 매번 법조교무님이 이 학교에 유학온 한국학생들에게 떡복이 김밥을 싸 가지고 와서 나누주시는 모습을 지켜보시고 감동하시어 바로 교도가 되었다. 이 분이 현지 교당 부지마련이 일본의 엄격한 법에 묶여 종교 부지허가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아시고 현재의 교당부지를 허가에서 부터 모든 행정적인 절차를 다 마치게 협조해 주시고, 일본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돕겠다고 하신다. 이 분은 지난해 한국에 오셔서 익산 총부에도 다녀가시고 (황자명) 집에도 가보고 하여, 자신은 남은 여생을 이 원불교와 같이 하겠다고 마음을 굳히시고 봉불식에서도 설법의 통역을 하셨다. 봉불식날 앞에 나서거나 상을 내지 않고 조용히 천막 한쪽 구석에 앉아 끝까지 그 더운 마당에서 힘께하시는 모습
일원학년들 노래를 따라부르는 천진한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모습이다.. .
오사카교당에 우리분당교당교도님들의 십시일반 동참 덕분에 마지막 잔금마감에 조금도움이 되었고봉불축하금도 함께 전하여 참 다행이었다. 이자리를 기해 감사함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