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지의 밤
이순주(선조) 교무
충남 보령 서산시 비인면 갯벌 민박집을 휴가지 숙소로 정했다. 번잡한 휴가철을 빙자한 대학동기동창의 조용한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서울과 영광, 익산의 중간지가 충청도인지라 작년에 이어 올해의 휴가지도 보령으로 정한 것이다. 부담없이 만나, 부담없이 일정을 정하고, 자유로운 휴양지에서 일정을 보내는 일도 출가수도자의 고귀한 흔적이 된다는 사실을 작년 대천의 호도섬여행에서 이미 성취감을 체험한 터다. 그 여운을 끄집어내며 이번에도 기대 만만했다.
갯벌 민박집 주인은 서울 반포에서 일모작 인생을 마무리하고 이모작 인생을 귀촌하여 민박집을 운영하며 지내는 분이다. 비인면으로 온 지 4년, 어느덧 동네사람들과 친해져서 해수욕장과 김 생산지, 갯벌체험을 공동운영하며 마을공동체를 이뤄내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민박집 텃밭에 심은 토마토와 비트가 섞인 정열의 빨간 주스가 만들어져 나왔다. 텃밭의 싱싱한 고추가 저녁상을 재촉하며 입맛을 당겼다.
어머니께 부탁하여 가져간 고구마순김치, 깻잎김치, 우엉뿌리조림, 마늘종장아찌, 감자, 고구마, 가지, 호박, 개떡, 수박, 복숭아를 평상마루에 늘어놓으니, 3일간 지낼 일에 배가 부르고 평안이 왔다. 순식간에 발가벗고 시냇가에서 미역 감고 다슬기 잡던 어린 시절로 시간을 돌려놓았다.
보령시 비인면 갯벌체험은 무창포해수욕장과 자동차로 28분 정도 거리에 있다. 바다가 갈라지는 해수욕장으로 해마다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비인의 갯벌체험은 쌍섬이라 부르는 작은 봉우리 두 개가 형제처럼 바다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바닷물이 들어오면 섬은 갇히고, 물이 나가면 섬 길이 열린다. 주변은 길고 넓고 청결한 갯벌이다. 소문이 안 나서일까, 평일이어서일까? 사람들이 많지 않아 좋았다. 조용한 피서지를 좋아하는 우리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말고, 이곳에서만 보내자고 주장할 정도로 맑은 바람 냄새와 정갈한 주변정경에 취했다. 밤이 깊어갈수록 바닷물이 만들어 주는 바람은 시원한 생수를 마시듯 그윽하고 달콤했다.
저녁달을 맞으며 바닷물이 질주하듯 달려 들어오고 있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어느 시인의 절규는 이곳 비인에도 파도를 타고 날아왔다. 파도야, 인생을 내려가야 하는 시점에서 수많은 오점을 버리고 싶은데, 다 주고 그리워하는 사람으로 내려가고 싶은데, 어쩌란 말이냐?
물어물어 썰물이 되었다가 열심히 지금에 맞게 살아가는 거야 하며 그렇게 밀물이 되었다. 생각의 파도소리를 타며 밤바다 길을 맨발로 걸었다. 시골어촌인데 한적한 도시공원 같은 갯벌의 바닷가 정원에서 걷기도 하고, 추억의 노래도 부르며, 지난 기억을 끄집어내며 이야기로 자연과 동화되었다. 생각이 피곤해지면 저절로 선정(禪定)에 들어 달이 되기도 하고, 별이 되어 행복의 빛을 발하기도 했다.
민박집 아주머니가 모기향을 피워 주었다. 갯벌 바람 때문인지 모기소리는 파도소리에 묻혀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평상에 모기장을 치고 잠을 청했다. 바람소리는 자장가를 부르고, 새벽달은 전등불의 전구가 되어 모기장 안을 기웃거렸다. 나 이대로 죽는다 해도 여여한 자연의 진리야, 하루를 마감하는 언어를 선포했다. 모기장은 바람의 커튼이 되어 제 멋대로 흔들거렸다. 새벽에는 두 명이 더 모기장 속으로 들어와 자고 있었다. 50년 만에 평상에서 해탈한 아이가 되어 하늘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