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정전(正典) 교의편 제3장 사요(四要)의 제1절은 “자력양성”이다. 어린이, 노인, 병자가 아니면 누구나 의뢰생활을 하지 말 것, 남녀는 똑같이 교육을 받고 결혼 후에도 경제생활을 각자 자립적으로 하고 가정과 국가에 대한 책임을 동등하게 질 것, 자녀에 대한 재산상속은 최소한으로 하되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말 것 등을 가르치고 있다.
“자력양성”은 당초 “남녀권리동일”이란 제목으로 정신의 자주력, 육체의 자활력, 경제의 자립력을 기르기를 강조한다. 80여년 전 뿌리 깊은 남녀차별 시대에 내놓으신 “남녀권리동일” 조항이 당시에는 수긍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인데, 지금은 법률과 제도가 남녀평등정신에 맞게 바뀌었으니 얼마나 시대를 앞선 가르침인가?
나는 이 자력양성 조항을 나의 가정생활에 비추어 얘기해 보겠다.
나는 남존여비사상이 유별나던 경상북도 태생이다. 어린 시절 할머니한테서 “사내는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얘기를 자주 들었다. 부엌에는 물 마시러, 또 가끔 어머니를 도와 아궁이에서 불 때느라 드나든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침실의 이불을 개고, 방과 대청마루를 쓸고 닦는 일은 사내애들 몫이었다.
나는 ‘64년 29세에 부산에서 26세의 구명신과 결혼했다. 이른 출근, 늦은 퇴근에 휴일에도 자주 공장으로 불려가느라 가끔 연탄불을 가는 것 말고는 가사를 돕지 못했다. 취사, 세탁, 육아는 아내가 어린 가정부를 데리고 도맡았다. 아내는 결혼 후 대학원을 나와 부산대 영문과 강사로 있다가 1년 만에 내가 서울로 전직하는 통에 그만두었다. 지금 같으면 주말부부로 지내며 교수가 되었을 텐데 미안한 노릇이다.
‘69년 첫 해외여행으로 3개월간 영국출장을 갔다. 울산공단에 화학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영국 기술과 기자재를 차관으로 들여오는 계약을 맺은 때문이다. 공장장으로서 공장설계 협의와 운전법 숙달이 목적이었다. 선진국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웠다.
식사초대를 받고 영국인 가정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집에 도착하여 부인과 차를 마시며 얘기하는 동안 남편이 앞치마를 두르고 콧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장만하는 광경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50대의 어느 가장은 매년 집 안팎 페인트칠을 직접 한다고 했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업무 외에 나들이, 외식 등 모두 가족 중심이었다. "Lady first"를 실감하였다. 나는 가사를 돕지 않은 일이 너무 미안했고 처음으로 아내의 옷가지를 샀다.
이어 공장건설차 울산에 온 영국인 기술자 가족들과 1년 반 동안 같은 사택 안에 살았다.
70년대 중반에 여수공단에서 역시 영국 기술과 기자재를 차관으로 들여오면서 영국인 기술자 가족들과 1년 반 동안 사택에 함께 살았다. 그들은 집에서 손님을 접대할 때 남편이 음식과 음료를 서비스했다.
나는 40대 초반 처음으로 가스레인지 사용법, 밥 짓기, 라면 끓이기를 배웠다. 아이들 중학교 진학 때문에 나만 남고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한 탓이다.
‘87년 막내아들이 대학에 입학하자 아내는 20여 년간 가족에게 헌신했으니 이제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49세에 이대대학원 여성학과에 입학하여 딸의 결혼과 출산을 뒷바라지하면서 5년 만에 “원불교 여성교역자의 활동에 관한 연구”란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0여년간 대학에서 강의를 맡고, 가정법원 가사조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간 가족들은 가사를 도왔고, 나는 밥짓기, 된장찌개, 설거지에 제법 익숙해졌다. 두 아들도 그 시절부터 훈련시킨 탓에 요새도 우리집에서 회식이 끝나면 곧잘 설거지를 한다.
우리는 사요 중 “자력양성”의 내용을 체득하여 가정에서 실천에 옮기면 좋겠다. 이제 아내가 세 끼 밥을 챙겨주기를 기대하는 은퇴남편이 어떤 대접을 받는 세상이 되었는지는 다들 잘 안다. 남자들은 최소한 취사의 능력을 기르고, 부인들은 남편과 아들이 그런 자력을 갖추도록 도와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