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도님들 마음공부하는 글을 대하니 모두 반갑고 열심인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저도 이제야 조금씩 마음공부라는 것을 시작했다고 할까요.
함께 공부하고자는 마음으로 분별없이 올리니 분별없이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하고 수행합니다. 일원상 진리는 흔히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이라고 하지요.
일원은 우리가 법회 시간에 죽비를 탁 쳐서 입정에 들지요. 바로 그자리, 입정처를 말합니다.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요] 라고 서원문에 써있지요.
한 물건도 없는 깨끗한 마음, 빈마음, 일념미생전, 텅비어 고요한데 신령스럽게 아는 그것(공적영지)이며,
우리가 육근을 움직일때 사용하는 그것이지요.
또한 우리를 살아 숨쉬게 하는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가 소리를 들을때 듣는 당처 그 자리이기도 하지요.
일원은 마음인데 마음은 너와 나가 없어 하나입니다.
이 일원상을 체받아서 (마음에 심고 확실히 믿어서 - 이것이 신앙이고) 이 일원상을 사용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일원상 서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를 늘 잃어버리지 않고 늘 지성으로 사용하는 마음입니다.
경계가 왔을 때 바로 이 입정처 그자리를 관조해서 일원상을 세워 요란함과 어리석음과 그름을 없애는 것이지요.
본래가 깨끗하고 텅빈 그자리를 세운다는 것이 자성의 정, 혜, 계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가 있기전부터 계속 입정처 그자리(마음)을 관조하고 있다면 경계에 동하지도 않고 어리석고 그르지도 요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 일원상에서는 하나이기 때문이지요. 너와 내가 없고 우주만유가 일원상이요 처처불상이기 때문이죠. 나도 부처 너도 부처입니다.
일어나는 마음을 보지만 경계에 동하거나 물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란함을 없게하는 것으로써 자꾸 돌리는 공부를 하지만 또 요란함이 솟아나오고 또 올라옵니다.
이것은 본래 나라는 것이 없는데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착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없는 그자리를 제대로 비추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육신은 죽어갈 수 있고, 생각과 소리는 왔다 갈 수 있고, 형상은 인연따라 왔다 인연따라 갈 뿐이지만 마음은 여여해서 생긴적도 없고 멸할 날도 없이 우주에 꽉 차 있습니다.
어떤 경계도 본래가 공하다는 것을 비추면 자성의 정 혜 계가 세워집니다. 전부가 법신불일원상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본래가 하나인 한몸뚱이기 때문에 왼손이 다쳤다고 오른손이 나무랍니까? 그렇듯이 일원상을 세워서 경계가 하나인줄 알면 그대로 편안해집니다.
마음을 대조해서 공부하다보면,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다고 했는데.... 없다고 했는데...." 하면서 돌리고자 생각하다보면 오히려 사견을 세워서 또 다른 인과를 만드는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일원의 관조의 횃불을 비춰서 무명의 어둠을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면 일원상의 진리를 확실히 알고 굳은 믿음의 서원을 세워야 합니다.
항상 마음(언어도단의 입정처)을 관조해서, 그 깨끗하고 텅빈마음을 눈을 사용할 때 쓰고, 귀를 사용할 때 쓰고, 코, 입, 몸, 마음을 사용할 때 써야 합니다.
눈으로 볼 때 보기전을 사용하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 듣기 전을 사용하고, 마음이 일어날 때 일어나기전을 사용하고, 코,입,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성성할 때 적적을 사용하고 적적할 때 성성을 사용하라는 말과 같지요.
일원상을 매 경계위에 육근을 사용할 때 써나가면 그것이 바로 무시선이요 무처선입니다.
공적영지가 앞에 나타나게 하는 것이 바로 선입니다.
이상 부족하지만 제가 이해되는대로 [관심입정 견성성불]이라는 대종사님의 말씀을 새기면서 써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