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낫게 하는 법
중앙일보 칼럼 2015.11.29
정은광 교무
얼마 전에 머리를 빡빡 깍은 그가 나를 찾아왔다.
예전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에 웃음으로 먼저 인사를 나눴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했다.
그 분을 만난 지 어언 3~4년 된다. 처음 만났을 때 미술과 미학에 대해 대충 이야기하는 중이었는데 그분이 수첩에 받아 적는 것이다. “아니, 그냥 농담인데 그렇게 적으시는가요”하며 말렸지만 ‘처음 듣는 말’이라며 적기만 했다.
그렇게 긴 여름이 지났고 3개월 째 아무 소식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다. 그러다 불쑥 찾아온 거다.
“근데 어쩌다 스님이 되셨나요?” 내가 농을 하니 연쩍은 표정으로 그가 답했다.
“사실은, 제 아내가 유방암에 걸렸어요. 나이 예순이 넘었는데 무슨 유방암이냐고 검사를 했는데, 큰 병원에서도 암이니 알아서 하라고 해서 이 병원 저 병원 다녔습니다.”
그 사이에 그의 얼굴이 까칠하게 말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하나…. 커피를 마시며 침묵이 흘렀고 그의 삶은 가만히 바라봤다.
그가 경영하던 기업은 외환위기 때 넘어갔다. 잘 치던 골프도 그만두고 50대 후반에 한국화를 전공하겠다며 지방에 있는 우리 대학에 왔다. 그 나이라면 취미 생활로 평생교육원에서 해도 되는데, 왜 대학에서 20대 학생들 틈에 끼어 공부를 할까. 교수들도 의아해했지만 그는 학부를 마치고 박사 과정까지 이르렀다.
그래서 “박사를 해서 어따 써먹을 거요”라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냥 하는 거지요. 선생님 뵈러 오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박사는 뭐 하러 하겠어요.”
이렇게 나를 따르던 사람이 갑자기 스님처럼 하고 오셨기에 마음이 더욱 아팠다.
지난 5월 내 방을 찾았을 땐 이런 대화를 나눴다.
“강원도 정선에 다녀왔습다. 혼자서.” “뭐 하러 갔는데요.” “그냥 쑥 캐러 갔지요.”
서울 청량리에서 기차를 타고, 강원도 정선 읍내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한 시간 정도 깊은 산골마을로 들어갔다 했다. 한참을 걷다가 볏짚 다발이 있는 처마 밑에 앉아 들고 간 김밥을 먹고 있는데, 한 할아버지가 기침을 하며 나오시더니 “당신 어디 사는 누구요”라고 묻더란다. 그래서 “그냥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라고 했단다.
할아버지는 “이리 와서 묵은 김치에 점심이나 먹읍시다” 하더란다. 점심을 얻어먹고 혼자 사는 할아버지에게 “무엇이 먹고 싶으세요” 하니 국수를 사다 마을 노인들하고 나눠먹고 싶다고 해, 이웃에 혼자 사는 노인 다섯 분을 모시고 함께 국수를 끓여먹고 왔다는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듣던 내가 말했다. “나랑 같이 그 마을 갑시다. 다시 국수 끓여서 같이 먹으면 안 될까요?” 가을이 되면 그리 하자고 하던 그였다.
암이 걸린 아내는 아무리 잘해줘도 “당신 그 정도 밖에 못 하냐”고 남편에게만 짜증이라고 했다. 그는 “나도 살기가 싫을 만큼 괴로웠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한평생 인연이 되어 살다 한 사람이 먼저 아프면 나머지 사람은 마음이 아프게 된다. 몸과 마음이 하나인 두 사람은 서로 도와 상처를 낫게 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상처 난 나뭇잎이 있는데 그 상처 난 나뭇잎을 누가 위로해 주면 되나요?” 누군가 물었다. 방법은 하나다. 상처 덜 난 나뭇잎이 그 나뭇잎을 위로해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