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성요론 12.
정당한 일이거든 내 일을 생각하여 남의 세정을 알아줄 것이요.
반갑습니다. 22단 신소명입니다.
저희 단에서 받은 강연 주제는 솔성요론 12조 "정당한 일이거든 내 일을 생각하여 남의 세정을 알아줄 것이요." 라는 조항입니다.
저는 "정당한 일이거든 내 일을 생각하여"를 놓고 두 가지 방향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내가 정당한 일을 행한다 해도 내 일을 생각하여 남의 세정을 알아주라는 것, 둘째, 상대가 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라면 내 일처럼 생각하여 그의 세정을 따라 줄 것이라고 나눌 수 있겠습니다.
인과품 29장에 보면, 영광에서 농부 한 사람이 어느 해 여름 장마에 관리 세 사람을 월천을 하여 준 일이 예화로 나옵니다. 그 농부는 한날 한시에 똑같은 수고를 들여 세 사람을 건네 주었건마는 후일에 세 사람이 그 농부의 공을 갚는 데에는 각각 자기의 권리와 능력의 정도에 따라 상당한 차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만약 농부가 월천해 준 값을 50씩 요구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랬다면 세 사람의 관리들은 어떠했을까요? 그 50이 500이나 5000으로 힘겹게 또는 부당하게 느낄 만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도 있겠지요.
대종사님께서 솔성요론 13조에 "정당한 일이거든 아무리 하기 싫어도 죽기로써 할 것이요"라고 하셨으니 정당한 일만 행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일을 할 때도, 저편의 세정은 어떠한지 살펴야 원망이나 불평이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씀 같습니다.
둘째, 정당한 일을 행하고 있는 상대편에서 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예수님이 공자님이 오셨을 때 그 일을 믿고 따랐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역사가 발전적으로 진급해 올 때는 그 선도자가 있었을 것이고 그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대각을 하시고 법을 펼치실 때도 구인 선진님께서 방언 공사를 하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일상 생활을 하시던 분들이 젊은 대종사님을 그것도 그간의 구도 행각으로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찌 비춰질지도 모르는 분을 스승님으로 생불님으로 모시고 따라다니며 시키는 대로 일을 해나갈 때 뭇시선들이 곱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인 선진님들은 혈심을 바쳐 초기 교단을 일구어내셨고 지금 저희에게 교단 100년을 바라볼 수 있는 현 상황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내가 아니라 남이라도 정당한 일을 행하고 있다면 남의 세정을 알아서 도와주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정당한 일이라면 협조를 해서 공생 상생하는 길을 열어가야 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솔성요론 12조는 내 형편과 심경을 미루어서 남의 어려운 형세, 딱한 형편, 불안한 심경을 십분 이해하고 도와주자는 것입니다. 단 부당한 일까지 그 세정을 알아서 도와주라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저희 22단에서 솔성요론 12조를 놓고 단회 때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몇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대인관계에 관련해서 이야기가 많이 진행되었는데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내 세정을 알아주기를 바라지만 남의 세정 알아주기가 참 어렵다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마음이 밝지 못하고 너와 내가 하나라는 큰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입장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그 원인인 것 같습니다.
또한 세정을 알아줘서 도움이 되는 일, 그런 순간이 있고 아닌 순간이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그래서 '정당한 일이거든'이 아주 중요한 주의 사항이 되겠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좌석을 두고 묘한 신경전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젊은이들은 '나도 저렇게 늙을 일을 생각하여' 행동한다면, 어르신들도 '젊은애들이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고단하겠구나' 생각한다면 서로 은혜로운 관계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카페에서 어린 애들을 데리고 온 엄마들이 식사를 하면, 미혼 여성들은, 식사 예절을 안 가르치나, 꼭 이런 데 데려와서 소음을 일으켜야 하나, 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만 결혼과 육아를 해 보면 당연히 온몸으로 이해하게 되는 일이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22단에서는 우리가 솔성요론 12조를 잘 실행하려면 역지사지, 자리이타 등을 행하면 훨씬 쉽겠다는 결론도 함께 내렸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몰랐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회적 이슈가 되는 어떠한 사건을 조사하며 주변인 인터뷰를 할 때 '어쩐지 그 사람이 좀 수상쩍게 느껴졌다'는 말, '평소 행동을 볼 때 그런 사람인 줄 정말 몰랐다'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것 역시 남의 세정을 살펴보지 않거나 내 잣대로만 재어 본 결과 내 상식과 주견 안에서의 이해가 아닐까 싶습니다. 남을 알기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그 '남'이 '나'가 아니라서가 아니라 사람은 시시때때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내 마음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내가 하려는 일도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 또한 어떤 사회적 경제적 상황에서 어떻게 할 지는 지금 이 순간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습니다. 나도 닥쳐보고 겪어보고 돌아봐야 나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요?
종영한 지는 좀 되었는데 '내 딸 서영이'라는 드라마를 볼 때 제가 계속 궁금했던 게 있습니다. 천호진 씨가 분한 '아버지'역할을 보며 어쩜 저렇게 며느리의 입장에서 보면 다정하고 자애롭기만 한 아버지가 딸 서영이의 입장에서는 인연을 끊고 싶은 아버지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삶 속에서 변화했지만 과거의 아버지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정황들이 나오더군요. 그런데 그것은 드라마입니다. 종영이 정해져 있고 해피 엔딩을 향해 가고 있는 가족드라마였지요. 하지만 우리 삶은 애석하게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교차로들에 신호등이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헤밍웨이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들에서 빚어진 선택의 결과가 어떻게 어떤 부메랑으로 내 앞에 돌아올지 잘 알지 못합니다. 내 자신을 변호하고 이해를 구할 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인연과는 영원히 소통 부재로 화해 불가능으로 끝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이것이 정당한 일인가 살펴보고 정당한 일이라면 내 일을 생각하여 남의 세정을 알아주는 것이 나와 너가 모두 하나의 '큰 나'가 되어가는 길 같습니다.
레미제라블의 장발장과 자베르의 입장을 보겠습니다. 장발장은 굶어 죽어가는 조카를 위해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19년 동안 복역했습니다. 그는 가석방이 되었지만 '위험인물증서'가 꼬리표로 붙어 어디에도 숙소를 정할 수 없고 어느 곳에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증오가 점점 깊어가던 장발장은 신부님의 은총으로 주님이 인도하는 길을 가겠다고 결심합니다.
자베르는 평생 24601의 죄수를 뒤쫓습니다. 장발장이 사업체를 꾸려 빈민들을 구제해도 시장이 되어도 자베르의 눈에는 장발장은 그저 경멸의 대상, 영원한 죄수일 뿐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프랑스 혁명을 꿈꾸는 초라한 시민군 진영에서 장발장과 자베르는 운명적으로 마주서게 됩니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쏘지 않고 보냅니다. 장발장은 자베르 경감이 평생 자기를 쫓은 건 그의 의무에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인정하는 것이지요. 자베르는 혼란을 겪게 됩니다. 자신이야말로 법의 수호자가 되어 주님이 인도해주는 선한 길을 걸어왔는데, 분명 장발장은 영원한 죄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말입니다.
장발장은 자베르를 만날 때마다 두려움 속에서도 의연했습니다. 판틴을 치료해야 하니 병원으로 자신을 체포하러 와라, 코제트를 살려야 하니 사흘만 기다려 달라, 마리우스를 살려야 하니 자기 숙소로 자기를 체포하러 오면 된다고 했었습니다. 자베르는 자신과 장발장은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괴로워하지요. 자신은 분명 의무를 다하고 주님의 뜻대로 선한 길을 걸어왔는데 이제 와서 자신의 삶에 회의를 가집니다. 결국 자베르는 자진합니다.
자베르는 언제나 어느 곳에나 있습니다.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을 정당하다고 믿으며 자기 나름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지요. 과거 우리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천민들이 인간의 기본적 인권도 보장받지 못하고 천대를 받다가 몰매를 맞고 비명횡사 할 때, 그들을 부리는 양반들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의 사고방식으로서는 그것이 정당한 일이라고 치부되었겠지요. 그래서 누구나 자기 자신의 이념이 과연 정당한지 확신하기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정산종사법어 응기편 9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루는 학인들이 각기 일방적인 의견을 주장하면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함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모든 사물의 양면을 두루 살피지 못하고 하나에 편벽되어 원만하지 못하나니, 그대들은 제 주견에 끌리지 말고 그 때 그 처소에 일의 양면을 두루 보아서 적당한 비판과 취사를 하여 나가기에 노력하라."]
부부간에도 내 일을 생각하여 남의 세정을 알아준다면 화목한 가정이 될 것 같습니다. 수행품 31장에서 "여자들은 대체로 주밀하나 고정하여 용납성 없는 것이 병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강연 주제를 연마하는 동안 재미있는 생각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인가 원태연 시인이 "손끝으로 원을 그려 봐, 그만큼만 빼고 너를 사랑해" 그런 시를 썼습니다. 연습장 같은 것에 적혀 있으면 아 유치해, 라고 생각했었지요.
지금 제가 생각을 고쳐 봅니다. 살다 보면 부인이 혹은 남편이 이것도 맘에 안 들고 저것도 맘에 안 들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것만큼 원을 그려서 묶어두고, 그 만큼만 빼고 나머지를 보면 참 괜찮은 사람이 내 부인이구나 남편이구나 할 것 같습니다. 좀 유치하고 개인적인 말씀인데, 강연 순서를 기다리는 몇 달 동안, 남편을 보며 제가 했던 생각입니다.
이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