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 시대란 바로 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과거 선천(先天) 시대 즉 온갖 차별이 만무하던 시대에는 힘 있는 강자(强者)가 있어서 차별하고 억압하고 구속하여 노예 생활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후천(後天)시대 즉 물질이 풍부하여 선천시대보다는 물질의 은혜를 받으며 살아갈 뿐 아니라 선천시대에 빚어진 차별이 극복되어 평등생활이 상당히 보장되는 시대에는 부분적으로 선천 시대와 같은 차별 구도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사람이 사용해야 할 물질(또는 물질문명)이 나를 구속하는 주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마음의 힘이 없으면 파란고해(波瀾苦海)에서 살고 힘이 있으면 극락 생활을 하고 낙원 세상에서 삽니다.
마음을 멈추고 내가 무엇에 구속되어 살아가는가 살펴봅시다. 스스로 고삐를 풀어야 합니다. 나를 구속한 것도 나 자신이고 나를 풀어 주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나를 자유롭게 하고 물질을 마음껏 선용(善用)하게 하는 것도 나 자신입니다.
원만한 종교 생활이란 바로 신앙과 수행과 마음공부를 같이 하는 생활입니다. 원만한 종교의 신자란 바로 이런 생활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입니다. 원만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 곧 성불(成佛)이고, 가정, 이웃, 세상을 살기 좋게 만드는 일이 곧 제중(濟衆)입니다.
우리 스스로 묶은 고삐가 있다면 그 고삐를 풀고, 족쇄가 있다면 족쇄를 풀고, 감옥에 갇혀 있다면 감옥을 벗어나고, 짐을 지고 있다면 짐을 벗어야 합니다. 그 당사자, 주인공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를 봅니다. 저 중천(中天)에 떠 있는 해는 어느 누구에게든 차별 없이 떠 있습니다. 문을 열면 햇빛이 들어옵니다. 누구나 문을 연 만큼 햇빛의 은혜를 입습니다. 햇빛이 안 들어온다고 탓하지 말고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면 법신불 사은님의 은혜를 입고(햇빛을 받고), 마음의 문을 닫으면 닫은 만큼 그 은혜를 못 받습니다. 문을 못 여는 것은 습관과 업력에 끌려 못 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한 ‘참 나’가 아닌데, 내 영생을 책임지고 자유스럽게 할 ‘나’인 줄 알고 사는 게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다시 한번 개벽(開闢)의 의미를 깊게 새겨 봅니다.
한 뼘 쯤 열어 놓은 미닫이 문 사이로 바깥 세상이 빼꼼하게 보입니다.
이 문을 통해서 내 눈이 볼 수 있는 세계가 곧 세상의 전부일까요?
그 정도 밖에 못보는 것은 내 눈이 문제입니까?
아니면 한 뼘 정도 열린 미닫이 문이 문제입니까?
그 정도 밖에 안보이는 저 바깥 세상이 탓입니까?
세상은 내 마음이 열린 만큼 수용하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목적을 일러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을 구하고 중생을 가르치는 일이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깨달음을 구하면서 사람들과의 삶을 소중히 해야 합니다. 대종사께서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인 물질이 개벽되는 시대에 정신을 개벽하는 깨달음의 길을 가도록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은 물질로만 행복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