處處佛像 事事佛供
우리 표어는 원불교의 강령을 간결하게 표현한 짧은 어구입니다. 교전 편수에 매우 정성들인 흔적이 보입니다.「원불교 교전」이라는 속 제목 바로 뒷장에 덩그러니 일원상만 있습니다. 신앙과 수행의 표본입니다. 그 다음 쪽에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 14자가 한 쪽을 차지하여 ‘바꾸자!’고 외칩니다. 그 다음 쪽에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 ‘동정일여 영육쌍전’,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의 4개의 표어를 배치하여 ‘이렇게 바꾸자!’ 하고 바꿀 내용이 나타납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만유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삶 자체를 공부로 삼아 낙원세계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법신불 일원상은 곧 우주만유 전체로서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모두 하나의 진리 덩치이므로 진리불공과 실질불공을 하여 원만한 신앙과 수행을 하도록 본교의 강령을 밝히신 것입니다.
1. 뜻풀이
(1) 세 가지 부처
‘처처’는 ‘곳곳이’의 뜻이요, ‘불상’은 ‘부처님’의 뜻입니다. ‘처처불상’의 의미는 곳곳이 부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부처는 3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전체불이신 법신불입니다.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이니 곧 법신불입니다. 그리고 일원은 곧 사은으로 은혜를 나타내시니 진리불공을 합니다.
우주만물은 비록 수없이 나뉘어져 그 모양이 각각이지만 사실은 우주 그 자체입니다. 하나와 여럿은 서로 응하고 서로 융합합니다. 만약 여럿이 하나로 돌아간다면 하나도 또한 여럿으로 돌아갑니다. 따라서 우주 가운데 어떤 아주 微小한 사물도 모두 하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만유불이신 화신불입니다. 우주는 큰 일원이고, 만상 또한 각각 일원입니다. 본성은 하나이나 그 특성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각 특성에 따라 당처에 실지불공을 합니다. 은혜는 대상과 나를 결합하는 힘입니다.
셋째, 자심불이신 자기부처님입니다. 신분의성(信奮疑誠)으로 삼학불공을 합니다. 곳곳이라 하니까 나는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자심불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에 의지하여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고, 사리를 원만하게 알고, 심신을 원만하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밖으로부터 우리 자성으로 향하는 길이 없습니다. 자심불에게 하는 불공은 곧 수행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일체의 행위는 그것이 선한 일이건 악한 일이건 모두 자기 자신에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행한 악한 행위는 다른 사람에게만 파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기 전에 먼저 자신 속에 있는 본성(하나)을 잃어버리기(분리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을 잃어버리면 우리가 가진 가장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본성(하나)을 손상시키면 자기 자신도 반드시 해(분리)를 입습니다. 파괴적인 사람은 파괴의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본래 성품을 잃었기 때문이다.
(2) 세 가지 불공
‘사사’는 일마다의 뜻이요, ‘불공’은 좁은 의미로 보면 ‘부처님의 위력과 법력을 얻기 위하여 정신, 육신, 물질로 정성을 바치는 일’입니다. 넓은 의미의 불공은 좁은 의미의 불공에 수행이 포함됩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곳곳이 부처님이니 일마다 불공하자”는 구호입니다.
천지만물의 본성은 모두 같기 때문에 진리불공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특성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사실불공을 해야 합니다. 정산종사께서는 이를 아울러야 원만한 불공이 된다고 하셨습니다.(<한>제3장 제15절)
1) 진리불공
형상 없는 허공법계를 통하여 법신불께 올리는 것이 진리불공입니다.(교의품 16장) 진리불공 하는 법에 대하여 “몸과 마음을 재계(齋戒)하고 법신불을 향하여 각기 서원을 세운 후 일체 사념을 제거하고 선정(禪定)에 들든지 또는 염불과 송경을 하든지 혹은 주문 등을 외어 일심으로 정성을 올리라”고 하셨습니다.(교의품 16장) 진리불공은 자성에 머무는 것입니다.
2) 실지불공(협의의 불공)
사은 당처에 직접 올리는 것이 실질불공입니다(교의품 16장) “우주 만유는 곧 법신불의 응화신이니, 당하는 곳마다 부처님이요, 일일이 불공법이라, 천지에게 당한 죄복은 천지에게, 부모에게 당한 죄복은 부모에게, 동포에게 당한 죄복은 동포에게, 법률에게 당한 죄복은 법률에게 비는 것이 사실적인 동시에 반드시 성공하는 불공법이다.”(정전 제10장 불공법) 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과거 부처님께서 ‘모든 부처를 만나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한 분도 빼놓은 일이 없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곧 지극한 불공을 말씀하신 것이라 하셨습니다.(대종경 선외록 13.불조동사장(佛祖同事章) 제5절)
실지불공의 방법으로 대종경과 예전에 경외심을 놓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때 어디서 어떠한 사람을 대하거나 어떠한 물건을 대하거나 오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인도품 33장) “처처불상 사사불공과 무시선 무처선의 도리를 생각하여 천만경계에 항상 공경 일념을 놓지 말 것이니라”(<예> 통례편 제2장 평거 제2장 평거시의 주의)
3) 자기불공(광의)
이상 두 가지 불공 이외에 수행을 의미하는 자기불공을 말씀하셨습니다. “과거와 같이 자기 불공을 다른 사람에게 의뢰할 것이 아니라, 자기 불공은 자기가 주로 하여야할 것이니 그 방법의 강령은 곧 이 교리와 제도다.”(교의품 제14장) “이 삼대력(三大力)으로써 일상생활에 불공하는 자료를 삼아 모든 서원을 달성하는 원동력을 삼게 하면 교리가 자연 통일될 것이요 신자의 수행도 또한 원만하게 될 것이니라.”(서품 19장)
2.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의의
(1) 신앙과 수행을 아우르는 우리 교리를 함축적으로 표현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원불교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낸 표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처불상은 신앙의 강령이고, 사사불공은 수행의 강령입니다. 교리도 상에 ‘무시선 무처선’은 수행문에 본 표어는 신앙문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문의 강령이라고 풀이하는 것은 무리입니다.(각산 신도형선진님의 「교전공부」와 최근에 나온 유성태교무님의「정전풀이」)
이 표어는 신앙과 수행을 모두 아우르는 표어입니다. 처처불상은 신앙문에 사사불공은 ‘무시선 무처선’ 대신에 수행문에 두어도 무방하게 보입니다. 우리의 공부가 수행에 그 중점이 있으므로 「무시선 무처선」을 수행표어로 두시고 다시 신앙표어에 수행표어를 덧붙여 놓으신 것으로 보입니다.
신앙표어에 수행의 의미가 포함된 것은 첫째, 동양종교 특히 불교의 깨달음은 수행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서양종교는 신을 인간의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신은 저편에 인간은 이편에 있는 상대적인 존재로 전락시켰습니다. 그와 반대로 불교는 신은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로 나를 비워서 신과 우주와 합일하는 것이 신과 통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일원상서원문에 ‘일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대종경 성리품 제31장에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고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하셨습니다. 생각으로 아는 것이 아니고 수행으로 합일하라는 말씀입니다.
인도품 1장과 2장에 도(道)라 하는 것은 길을 이름이니, 길이라 함은 무엇이든지 떳떳이 행하는 것을 이름이요, 덕(德)이라 하는 것은 어느 곳 어느 일을 막론하고 오직 은혜(恩惠)가 나타나는 것을 이름이다 하셨습니다. 즉 도는 행위입니다. 떳떳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라 덕이 따릅니다.
정전에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에 돌아갈 뿐이요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나니, 예를 들면 줄기와 가지와 꽃과 잎은 좋은 나무에 결실이 없는 것과 같다”(작업취사의 목적) 하셨습니다.
둘째, 불공의 의미입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불공은 ‘부처님의 위력과 법력을 얻기 위하여 정신, 육신, 물질로 정성을 바치는 일’이라고 좁은 의미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교의품 14장의 말씀대로 해석하여 사은사요 삼학팔조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교리와 제도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대산상사님께서는 “처처불상=견성=정각=혜, 사사불공=성불=정행=복”이라 하셨습니다. 정행이란 수행을 말합니다.(<대의> 대산종사법문집 표어해의)
좌산상사님께서도 “원불교 신앙의 핵심이면서 종합적 표현은 처처불상 사사불공이다.”(<출가단회보> 제124호 2002년 8월 1일)하셨습니다.
경산종법사님께서도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만물 속의 진리불을 찾아서 불공하는 원리라고 하셨습니다.(장응철 역해 <자유의 언덕․반야심경강의> 70쪽)
(2) 보은이 곧 불공
개인적인 수행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전인류가 함께 수행하여 불국토를 만드는 방안으로 일원대도를 밝히시고, 일원은 곧 사은이며 사은은 곧 삼라만상이므로 나를 포함한 천지만물이 곧 부처님인 줄 알아 자력양생과 지자본위와 타자녀교육과 공도자숭배의 사요 실천으로 보은이 곧 불공임을 밝히셨습니다.
(3) 공부가 곧 불공
과거불교는 불상에 절하고 복을 비는 데 그쳤으나 일원상을 드러내시어 개인적인 불상을 벗어나서 법신불을 이미지화 하시고, 일원상은 사은이고, 사은은 곧 우주만유임을 밝히시어 보은이 불공임을 가르치시고, 자성이 곧 내 몸이 모시는 자기부처님으로 불공을 삼학팔조까지 확장하셨습니다.
“사․농․ 공․상 을 여의지 아니하고, 또는 재가 출가를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공부하는 불법이 될 것이며, 부처를 숭배하는 것도 한갓 국한된 불상에만 귀의하지 않고, 우주 만물 허공 법계를 다 부처로 알게 되므로 일과 공부가 따로 있지 아니하고, 세상일을 잘하면 그것이 곧 불법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요, 불법 공부를 잘하면 세상일을 잘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서품 15장)
(4) 인생의 요도와 공부의 요도를 인류의 병을 치료할 약재와 의술에 비유
교의품 35장에 지금 세상의 이 큰 병을 치료하는 큰 방문은 곧 우리 인생의 요도인 사은 사요와 공부의 요도인 삼학 팔조라, 이 법이 널리 세상에 보급된다면 세상은 자연 결함 없는 세계가 될 것이요, 사람들은 모두 불보살이 되어 다시없는 이상의 천국에서 남녀노소가 다 같이 낙원을 수용하게 되리라.
‘인생의 요도는 공부의 요도가 아니면 그 길을 밟지 못할 것이요, 공부의 요도는 인생의요도가 아니면 그 공부한 효력을 다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공부의 요도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과 같고, 인생의 요도는 환자를 치료하는 약재와 같다.’(교의편 제6장)
(5) 생명존중의 사상이요 환경보호의 방안
오늘날 지구촌 전체가 환경오염과 온난화로 인해 각종 자연재해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천지만물을 모두 부처로 모시는 불공이야말로 전인류 전생령을 살리는 길입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이야말로 상생의 길로 인도하는 원리이자 실천을 촉구하신 간절한 당부이기도 합니다.
3. 불공의 실천방법
앞서 자기불공을 논할 때 말씀 드렸듯이 대종사님께서는 교의품 14장에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불공법은 우리 교리와 제도라고 하셨습니다. 또 삼대력으로 불공하는 자료를 삼아 서원을 달성하는 원동력을 삼으라 하셨습니다.
동정간에 쉼 없이 삼대력을 키우는 방법으로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을 두셨습니다. 정할 때는 정기훈련법으로 수양․연구를 주체 삼아 상시공부의 자료를 준비하고, 동할 때는 작업취사를 주체삼아 정기공부의 자료를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정기훈련법에 11과목이 있는데 그중에서 취사훈련 과목으로 정해놓으신 것이 상시일기․주의․조행입니다. 11과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상시일기․주의․조행이라고 봅니다. 상시일기․주의․조행 공부로 끊임없이 실행에 옮겨 일원의 체성에 합할 수 있게 됩니다.
4. 응용
(1) 객관세계의 인식과 탈객관세계
우리는 ‘왜 사느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스스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짐승들은 이런 질문을 하지 못합니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객관세계에 계속 머물러서는 핵심으로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객관세계에 머무는 것을 그만 두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이 일을 어찌할꼬’ 하시다가 그 생각마저 놓아버리고 입정에 드신 것에서 그 해답을 볼 수 있습니다. 나를 접촉하는 사물 가운데 놓지도 아니하고, 또한 사물과 나를 대립시키지도 아니하는 까닭에 주관이라고도 할 수 없고, 객관이라고도 할 수 없는 세계에 놓인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이런 이치를 깨달으시고 사은사요의 인생의 요도와 삼학팔조의 공부의 요도로 이 세계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2) 깨달음의 어려움
우리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반야심경을 독경하면 반드시 외웁니다. 색이 곧 공입니까? 공이 곧 색입니까? 그렇다면 소유와 삶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고 계십니까?
石巩이 师弟 西堂 智藏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허공을 잡을 수 있는가?” “잡을 수 있소.” “그렇다면 한번 잡아보게.” “좋아요.” 智藏은 허공을 움켜쥐는 흉내를 내었습니다. “겨우 이것인가? 결과적으로 잡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군.” “그렇다면 사형은 도대체 어떻게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石巩은 智藏의 코를 움켜쥐었습니다. “마땅히 이렇게 잡아야지.” “아 야 야 야 야!”
어차피 色이 곧 空이요, 空이 곧 色이라면 손을 뻗어서 허공을 쥐기보다는 상대방의 코를 움켜쥐는 것이 진실에 더욱 가깝습니다.
(3) 아는 것을 행하기 어려움
우리는 모두 ‘알기는 어렵고 행하기는 쉽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기도 어렵고 행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을 거의 망각하고 있습니다. 지행이 합일하지 않으면 아직 모르는 것입니다.
행하기가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각자 오랜 습관에 길들여진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에 끌려서 아는 대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4) 공부 경험
① 걸음마
우리는 이미 공부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두 훌륭하게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은 걸음마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바로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일 먼저 익힌 것은 누운 자세에서 엎어지는 것입니다. 엎어진 다음에는 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기어 다닐 수 있게 된 다음에는 일어서기 위하여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일어 선 후에는 다시 수없이 넘어지기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걷게 되었습니다. 걷게 된 후에는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달리는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아기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이 아기가 걷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아기는 모두 걷는 것을 보았습니다.(信) 아기가 기는 모습을 보셨습니까? 팔꿈치가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도록 사정없이 기지 않습니까?(奮:忿자가 아님) 아기는 다른 사람은 다 걷는데 나는 왜 걷지 못할까 수없이 생각했을 것입니다.(疑)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졌습니다. 성공할 때까지 넘어졌습니다.(誠)
② 운전(주의 과목의 수행 예)
우리는 대부분 운전을 합니다. 처음 운전을 배울 때 우리는 육근과 모든 주의심을 기울여 긴장을 합니다. 그러나 차차 운전이 익숙해짐에 따라 의식적인 긴장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여전히 누구나 차에 대하여 주의심을 갖습니다. 설사 조그만 소리라도 귀에 익숙하지 않은 소음은 즉시 알며, 도로의 달라진 점에 대해서도, 앞뒤 차들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주의력을 집중합니다. 운전이 익숙해짐에 따라 이런 모든 요인들을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느긋하면서도, 방심하지 않은 상태에 있고, 안전운행과 관련된 모든 변화에 대하여 열려 있습니다.
③ 갓난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주의(주의 과목의 수행 예)
아이에게 어떤 신체적인 변화가 나타나든가, 불안 따위가 다른 사람에게 똑똑히 전달되기 전에 어머니는 그것을 압니다. 어머니는 다른 소리라면 더 큰 소리가 나더라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때도, 아기의 울음소리에는 잠을 깹니다. 이것은 어머니가 아이의 상태에 대하여 깊은 주의를 기우리고 있음을 뜻합니다. 어머니는 조심도, 고민도 하고 있지 않지만, 어떤 작은 암시일지라도 아기의 상태를 알아 챌 수 있는 방심하지 않는 균형상태에 있습니다.
④ 자신의 불균형에 대한 민감성과 합리화(주의 과목의 수행 예)
우리는 자신이 피로하거나, 침울하거나, 우울한 느낌을 쉽게 감지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왜 이렇게 우울할까?’ 반문합니다. 이때 대부분 자신의 불균형 상태의 원인을 합리화해 버리고 균형상태로 돌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때는 우리의 이성의 소리를 활짝 열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치 숙달된 운전자의 경우처럼...
⑤ 절실함과 공명
이 동일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말초로부터 핵심으로 침투해야 합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사랑합니다!”라고 합니다. 이 말씨가 전달하는 인간 존재 속에 담겨 있는 핵심적 영역의 깊이에 따라 전달되는 감정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놀라운 공명에 의하여 듣는 사람에게 같은 깊이로 전달(공명)됩니다. 따라서 같은 말이라도 절실함의 차이에 의하여 같은 깊이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완전한 공명을 일으키려면 이성과 감성 모두로 곧 온몸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곧 일백골절이 다 힘이 쓰이고 일천 정성이 다 사무쳐야 전 생령과의 공명을 일으킬 것입니다.
5. 현대사회와 사사불공
(1) 우리가 처해진 환경 분석(疑)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직장에서 최소 8시간 이상의 시간을 정해진 틀 속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커다란 톱니바퀴의 한 톱니로 움직입니다.
직장에서는 정교하게 짠 프로그램에 의해 반복된 숙련을 거쳐 능숙하게 업무를 수행하도록 훈련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과가 끝난 다음의 시간은 직장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과 같은 잘 짠 프로그램에 의하여 훈련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그와는 반대로 업무가 끝나면 구속으로부터의 해방감이나 정해진 틀에 대한 반동으로 해이해져 게으르고 무원칙의 절도가 없는 생활을 합니다. 자신의 생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을 원합니다. 따라서 주변을 둘러보기 보다는 자신의 자유를 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얻은 시간을 과연 재충전을 위한 휴식의 시간으로 보냅니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그 시간은 오락이나 유희 등으로 오히려 더 피곤하기만 할 뿐입니다.
(2) 왜 사는가?(疑)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왜 삽니까?” 저는 ‘성불제중하기 위해서 산다’는 말보다 ‘살기 위해서 산다’고 답하겠습니다. 성불해야할 내가 있고 제중해야할 중생이 있는 세계는 상대세계입니다. 방거사는 ‘신통묘용이 물 긷고 나무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행위를 통하여 자아의 이상적인 모습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목적이라는 말씀이지요. 나라는 존재가 그 행위의 이면에 있습니다.
우리는 탐진치에 끌려 자기가 주인인 줄을 모르고 객으로 지냅니다. 세상의 주인이 될 능력이 있으면서도 그런 줄을 모릅니다. 성현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세상의 주인인 줄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바로 주인이 되지는 못합니다. 능력을 구비하는 데에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삶을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기 위하여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호흡을 할 줄 압니다. 그러나 활을 잘 쏘려면 활쏘기에 적합한 호흡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근을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생산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생산(生産)이란 생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생산적이라는 말을 우리는 물질에 대해서 사용하고 있으나 사실은 정신적인 면에 적절한 말입니다. 물질이 어떻게 생을 낳습니까? 생을 낳는 것은 정신입니다. 생산적 활동은 내적인 정신활동입니다. 생산적인 인간은 그가 접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습니다.
삶이란 생명을 부여하는 과정입니다. 탄생이란 태어나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탄생합니다. 삶을 통하여 자아를 끊임없이 탄생시킵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일은 자기 자신에게 새로운 탄생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자기 내부에 있는 가능성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인간이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노작은 자기 자신의 인격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신분의성으로 삼학의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 가장 큰 일입니다.
삶의 특성은 소유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나’마저 소유하지 않습니다. 소유는 <사물>을 대상으로 만듭니다. 삶은 경험을 대상으로 합니다. 온전한 삶을 영위하려면 자기중심이나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을 비움으로서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대상과 자아에 집착하는 만큼 존재에서 온전한 삶에서 멀어집니다.
삶의 또 하나의 특징은 능동적입니다. 능동적이란 관심을 가지는 것, 참가하는 것, 주는 것, 자신을 새롭게 하는 것, 흘러넘치는 것, 자아의 감옥을 초월하는 것, 세상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극적 의미의 능동은 자율(自律)입니다.
‘왜 사느냐’고 물은 이유는 우리의 삶이 분별과 주착이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별과 주착이 따르지 않으면 나의 본래 면목이 드러납니다.
수행은 곧 인사를 주고받거나, 세수를 하거나, 밥을 먹는 등 일상의 세세한 일을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 자체가 깨달음입니다. 왜냐하면 수행(삶)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혜복이 인생의 목적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목적은 행위의 이면에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혜복은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부수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자기 자신의 본 모습으로 되어가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것일뿐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목적은 오직 하나 온전한 나입니다.
(3) 인생에 과정은 없다(誠)
전기를 공부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능동적으로 궁금하여 연구를 합니다. 어두워 지척을 분간할 수 없던 세상이 전기가 들어오자 갑자기 환해 졌습니다. ‘이게 무엇인가?’하고 전등불빛에 사로잡혔습니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합니다. 식사 때가 되어도 배고픈 줄도 모릅니다. 주변 사람들이 보기에는 힘들겠다고 생각하겠지만 본인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괴롭다는 인식이 없습니다. 그 결과 이치를 터득했습니다. 그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은 전기에 대한 흥미는 없지만 먹고 살기 위하여 직장을 갖기 위하여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고통은 훗날 입사시험합격이라는 열매로 보답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참고 견디자.” ‘인생은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는 식의 사고입니다. 그리하여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그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단 열매만 생각한다면 일생에 걸쳐 그런 시간이 몇 시간이나 되겠습니까?
삶에 과정이 있습니까? 내일은 목적이고 오늘은 그 목적을 위한 과정으로 보는 삶이 있습니까? 인생에 과정이란 없습니다. 그렇다면 미래의 순간을 위하여 희생해야할 현재도 없습니다. 현재는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영원이 되기도 하고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원이란 끝없이 긴 시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시간으로 가정에 불과합니다. 영원의 진정한 의미는 삶 그 자체가 갊아 있는 시간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시간입니다.
전자의 삶은 일생을 그렇게 영원한 시간으로 채웁니다. 인과가 있기 때문에 즐거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의의는 결코 결과에 있지 않고, 생의 매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시시각각, 곳곳에서 생활의 각 구체적인 과정에서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을 영원히 하나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밥 먹을 때 밥 먹고, 잠 잘 때는 잠자고.
(4) 우리는 대각여래위에 오르는 비행기를 탔습니다(信)
파리도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기만 하면 쉽게 뉴욕에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요행히 대종사님이 마련해 주신 대각여래위행 비행기에 탔습니다. 그리고 이런 천운을 만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도중에 내리실 분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