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마음 공부 주제는 의두요목입니다. 단회를 하다보니 제가 전에 연마한 적이 생각났습니다. 단원 중에 한 분도 제글을 읽으신 분이 없으신 것 같이 다시 한번 올립니다. 의두공부는 진리와 내가 확실히 확실히 하나가 되는 단계의 공부입니다. 제가 공부하기는 의문이 나는 것 모두 의두였습니다. 의두공부를 통하여 내가 주인인 것을 알고, 나를 되찾아, 주인이 됩시다.
이 먹고
1. 머리말
“이 멋꼬?”라고 해야 할 것을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고 묻는 분이 계시겠지요. 경상도 스님과 함경도 스님이 만났습니다. 경상도 스님이 말했습니다. “이 먹고?” 함경도 스님이 그 말을 듣고 “이 먹고가 무시기?”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경상도 스님이 “무시기가 먹고?”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함경도 사람이 ……
잘 생각해 보니 제가 처음 중국어를 배울 때 중국어 교제 제1과에 나온 말이 바로 이 말이었습니다. 중국어를 공부할 때는 이 말이 그렇게 중요한 말인 줄 몰랐는데 공부를 하다 보니 대종사님도 이것을 연마해야만 견성을 할 수 있다고 하셨더군요. 그러고 보니 영어를 배울 때도 일본어를 배울 때도 교재 첫머리에 나와 있었습니다. 이 말이 중요한 말인 것은 틀림없는 것 같군요.
“이것이 무엇인가?”입니다. 여기서 이것은 하루에도 수 만 번 생겨났다 없어지는 마음의 주인공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疑頭라 하고 불교에서는 話頭라고 합니다. 화두의 뜻은 한문 그대로 풀이하면 말머리입니다. 말머리라는 표현보다는 의심머리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의두는 견성으로 가는 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먹고”를 ‘나’의 인식에 국한하지 않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의문으로 확대하고자 합니다. 일상생활을 떠나지 않고 경계 따라 일어나는 한 생각 한 생각을 ‘이 먹고’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2. ‘이 먹고’의 실종
1) 교당과 학교의 乖離
대종사님은 꿔서라도 견성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견성을 하려면 疑頭에 들어야 합니다. 의두에 들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는 학창시절입니다. 아직 습관에 물들지 않고, 두뇌가 명석한 시기입니다. 그런데 요즘 교당에 학생이 없습니다. 부지런히 의두를 연마해야 할 시기에 교당에 나오지 않습니다. 자연히 견성한 도인이 적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 때문에 교화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음공부는 학교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아 교당에 나와 마음공부를 하다보면 다른 아이들에 비하여 학교공부가 뒤처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교당에 나오면 좋은 학교에 입학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입니다. (제 생각이 맞지요?) 부모님들도 자녀들에게 교당에 나가 공부하라고 하지 않고, 학생들도 교당에 나가 공부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표어에 「佛法是生活, 生活是佛法」이라 하셨습니다. 즉 불법이 곧 생활이고 생활이 곧 불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종교의 생활화를 주장하신 것입니다. 또「處處佛像 事事佛供」이라 하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부처이므로 모든 일에 불공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학교공부가 곧 불법이요 학교생활이 곧 불공입니다. 이제 보니 그래서 모두들 교당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셨군요. 제 말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실제로 자녀들의 의두 연마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佛法是學校生活 學校生活是佛法」이 되기만 하면 수많은 견성한 도인의 출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학교공부도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학교공부를 하면서 성불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교당과 학교를 원활히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저의 오랜 疑頭였습니다. 지금도 이 ‘의두’연마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로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2) 전기란 무엇인가?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기 위하여 먼저 우리는 과거 우리가, 그리고 지금 우리의 자녀가 어떻게 학교공부를 하고 있는가 살펴보겠습니다.
기차를 탔습니다. 맞은편에 학생 둘이 앉아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군. 어느 학교에 다니는가?”
“××공업전문학교에 다닙니다.”
“지금 무슨 책을 보고 있는가?”
“전기설비설계입니다. 며칠 후에 입사시험이 있어서요.”
“잠시 좀 보세.”
그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기도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학생에게 책을 돌려주면서 물었습니다.
“전기란 무엇인가?”
제 질문에 두 학생은 대답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복잡한 도식은 이해하지만 전기가 무엇인가는 간단히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3) 황당한 대학강의
방송대 학생들의 출석강의 시간이었습니다. 과목은 경서강독시간이었습니다. 직장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나이든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교수님은 학생들이 지루해 하자 격려의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덥고 졸리지요. 잠깐 쉽시다. 공자님이 논어 첫머리에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하셨는데 정말로 공부를 하는 것이 즐겁습니까? 그것은 이상을 말씀하신 것이고, 현실은 그와는 다르지요. 나는 전혀 즐거움을 모르겠습니다. 괴롭지만 참고 견디면 지금보다 나은 미래가 있어서 참고 견디는 것 아니겠습니까? 정말로 즐거울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우리가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수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매우 실망했습니다. 대학에서 유교경전을 강의하는 교수가 공자님의 본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설령 그 말이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한 말이었다 하여도 그것은 공자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4)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우리는(학생들이 아니라 우리라는 말로 바꾸겠습니다. 사실 따져보면 그 학생들이나 우리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五十步百步지요.) 시험공부를 하는 힘든 그 순간보다는 시험에 합격한 희열에 찬 그 순간이 훨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은 힘들고 괴롭지만 시험에 합격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직장을 갖는 그 순간을 위하여 참고 인내하자고 생각합니다.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책상머리에 써 붙이고, 머리를 싸매고 공부합니다. 강의하는 선생님도 강의를 듣는 학생도 모두 인내를 강조합니다. 몰려오는 졸음을 참자고 다짐합니다. 따분하고 지루함을 견뎌내고, 불안함을 극복하라고 격려합니다.
3. 왜 사느냐?
잠시 말머리(話頭)를 돌리겠습니다.
“왜 삽니까?”
어떤 사람은 ‘먹기 위하여 산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살기 위하여 산다’고 합니다.
저에게 물어 보십시오.
“다, 맞고요. 저는 살기 위하여 삽니다.”
말장난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찌 귀중한 제 삶을 허튼소리로 허비하겠습니까? 삶은 자기목적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묻는 물음은 사실은 삶의 의의를 묻는 것이지 목적을 묻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삶이란 그 자체가 의미를 가지고 있지 다른 무엇을 위하여 삶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삶 자체가 자기목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미래의 어느 시간이 현재 시간보다 더 가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가버려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도래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주장은 사실입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더 귀중하게 평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시험에 합격하여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현재는 괴롭지만 참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배웁니다. 미래의 시간이 현재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생각은 보다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의 삶을 단축시킵니다. 결국 이런 관점으로 일생을 보낸다면 의미 있는 삶은 극히 짧은 시간으로 압축될 것입니다.
4. 외경의 세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제대로 된 공부, 법대로 하는 공부가 되겠습니까? 만약 대종사님이 지금 학교에 다니신다면 어떻게 공부하시겠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둠 속을 조심조심 더듬어 전기 스위치를 켜자 온 방이 환해졌습니다. 캄캄한 암흑의 세계로부터 갑자기 모든 사물이 환히 보입니다. 순간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환한 빛을 발하는가’하는 놀라움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이 먹고’ 의문에 사로잡힙니다. 궁리에 궁리를 거듭합니다. 전문서적을 보며 밤을 새워 탐구합니다. 전문가를 찾아가 질문합니다. 심지어는 밥 먹는 것도 잊습니다. 잠자는 것도 잊습니다. 괴로움도 없습니다. 부끄러운 것도 없습니다. 추위도 모릅니다. 더위도 모릅니다. 때로는 입정에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이치를 터득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어느날 또 다른 이치를 터득합니다.
그렇게 궁리하고 탐구하는 동안 전혀 힘들거나 괴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괴로워할 나가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합격이라는 다른 순간에 의의를 둔 좀 전의 학생들이라면 그 배우는 과정이 괴로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시험에 합격하는 순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공부하는 순간은 인내해야할 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먹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그 궁리하는 시간 자체에 의미가 주어집니다. 같은 100년을 한 사람은 몇 시간 살다가는 결과가 되고, 한 사람은 온전히 100년을 살다가는 결과가 됩니다. 기쁨도 취직시험에 합격할 때도 기쁘지만 ‘아 이것이구나!’하고 깨닫는 순간의 기쁨도 그에 못지않습니다. 그리고 궁리하는 그 순간도 외경심으로 기쁨이 충만합니다.
다시 한번 질문 드리겠습니다.
“‘이 먹고’하고 궁리를 하다가 ‘아, 이것이구나’하고 크게 깨쳤습니다. ‘이 먹고’하고 궁리하는 시간과 ‘이것이구나’하고 깨친 시간에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는 궁리하는 시간이고, 하나는 깨달음을 얻은 시간이니까 당연히 가치에 차이가 있겠지요? 아닙니다. ‘이 먹고’ 하는 그것이 바로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은 신앙을 외경심을 놓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신앙의 대상은 일원이고, 일원은 곧 우주만물입니다. 우주만물에 대하여 외경심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一物에 국한하지 않고 一圓을 통하여 만물과 하나가 되는 一物입니다.
다시 말머리를 돌립니다.
결국 疑頭란 궁리입니다. 의무요목에 나와 있는 것은 例에 불과하고 외경심에 사로잡히면 모든 의문이 견성으로 들어가는 疑頭입니다. 그것을 궁극적인 관심이라는 말로 표현한 분도 있습니다. ‘나란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왜 사느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 궁극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집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화가가 그림을 그리며 그 속에서 궁극적인 것을 찾는다면 그 화가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바로 종교라고 봅니다. 이처럼 종교를 확대하여 생활화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대종사님이 처음부터 종교의 생활화를 표어로 내걸고 계십니다. 생활이 곧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외경을 만물에 확대해야 합니다. 외경을 만물에 확대하는 과정을 학교생활로 삼으면 학교생활이 곧 疑頭硏磨요 修行이 아니겠습니까?
5. 체험
승산님은 제가 청소년기에 접어들어 자각이 생기기 전에는 그다지 言敎를 하시지 않고, 행교로 일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심심하시면 疑頭로 저를 골탕 먹이셨습니다. 다음은 제가 몇 가지 끙끙 앓으며 연마했던 ‘이 먹고’를 소개드리겠습니다. 저는 상근기가 못되어 깨치는 것이 매우 늦었습니다. 손에 쥐어 주듯이 가르쳐 주셨는데 제 때에 터득하지 못했습니다. 이야기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약간 덜 못나게 보이도록 미화한 부분이 있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성냥갑을 그려라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 승산님은 일시 휴가를 내어 사가에 돌아오셨습니다. 저희 집이 시골이라 도시에 있는 조부님 밑에서 학교를 다니다 방학이 되어야 집에 돌아왔습니다. 제가 좀 우둔한 편이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3학년 겨울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온 다음날이었습니다. 아침을 먹고 나자 승산님이 성냥갑(당시 큰 통성냥이 있었지요)을 방 한가운데 놓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보아라.” 제가 그린 성냥갑은 실물과는 전혀 다른 사각형 하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요즈음 아이들은 너 댓 살만 되어도 다 아는 이치를 전혀 터득하지 못했던 지진아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네가 보기에 이것이 성냥갑으로 보이느냐?” 물론 제가 보아도 그것은 단순한 네모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성냥갑을 잘 주시해 보면서 계속 그려보아라.”
오후 내내 성냥갑과 씨름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역시 선을 몇 개 더 긋는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제 수준은 아직 2차원의 종이 위에 3차원의 입체를 표현하는 것은 아직 2차원의 세계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저에게는 지나친 주문이었습니다.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적어도 초등학생에게 미적분을 가르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호롱불 아래서 승산님은 성냥갑을 들어 올리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냥갑의 면이 몇 개나 되는가 세어 보아라.”
“여섯 개입니다.”
“한 면을 어떻게 생겼느냐?”
“사각형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기준으로 다시 그려보아라.”
이튿날 저는 하루 종일 진땀을 흘리며 성냥갑을 그렸습니다. 역시 성냥갑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제보다 더 복잡한 추상화가 되었습니다. 어제는 사각형 하나에 불과했지만 오늘은 사각형이 여섯 개가 되었으니 복잡한 피카소가 그림이 되었지요. 사각형이 뒤엉킨 복잡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날 저녁 다시 승산님과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네가 그린 그림은 사각형이 몇 개냐?”
“여섯 개입니다.”
“그럼 이 그림이 성냥갑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모르겠어요.”
“네 눈에 보이는 것은 실제 사물이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과는 다르다. 네 눈에는 내 등 뒷면이 보이냐?”
“아니요.”
“네 그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그린 결과가 되지 않았느냐? 다시 그려보아라.”
다음날에도 종일 성냥갑과 씨름을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밑면, 뒷면, 반대편 측면을 제외하고 세 면만 그렸습니다. 어제의 그림에 비하여 사각형이 3개가 줄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실물과 같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린 사각형은 모두 직사각형이었습니다. 도저히 실물과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다시 호롱불 아래서 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승산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그림은 여전히 성냥갑으로 보이지 않는구나.”
승산님은 성냥갑을 모서리가 정면에 오도록 놓으시고 물으셨습니다.
“네 눈에 윗면이 직사각형으로 보이느냐?”
“아니요.”
“그럼, 윗면만 그려보아라.”
승산님은 성냥갑의 이리 저리 움직여 모서리가 측면으로 가도록 하기도 하고 반대편으로 가도록 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윗면의 사각형이 어떻게 보이느냐? 가로로 길게 보이던 것이 이제는 세로로 길게 보이지 않느냐? 아까 보이던 것은 모서리가 정면에 있으니까 어떤 모양이냐? 잘 관찰하여 다시 그려보아라.”
승산님은 성냥갑을 다시 모서리가 정면에 오도록 바꿔 놓았습니다. 우둔한 저는 당시사각형과 마름모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아무리 궁리를 해도 사각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물끄러미 성냥갑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윗면만 선명히 보였습니다. 그것은 면이 아래, 위로가 아니라 모서리가 아래, 위에 놓인 마름모였습니다. 윗면이 사각형의 아니라 마름모라는 것은 엄청난 발견이었습니다. 그리고 눈에서 가까운 모서리와 먼 모서리 밑으로 선의 길이를 같게 하여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선을 잇자 그처럼 고대하던 성냥갑의 모양이 나타났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묘사한 것은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 점도 있고, 또 구성을 좀 재미있게 하려고 꾸민 부분도 있지만 제 기억으로는 며칠간의 疑頭가 아니고 그보다 더 긴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그 깨달음의 즐거움입니다. 어려운 문자를 통한 이론은 몰랐지만 입체감에 대한 이해, 원근법에 대한 이해 그리고 사물의 실제와 보이는 부분은 다르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글씨나 사물을 묘사하는 부분에 자신이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무슨 일이나 궁리를 하면 알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그 후 4학년이 되면서부터 학교성적도 아주 좋아졌습니다.
2) 별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중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학교에서 물상시간에 천체에 관하여 공부했습니다. 시간의 변화에 따른 별자리의 변화를 알려주는 성좌시각표를 가지고 책상에 앉아 별들의 변화를 살피고 있는데, 승산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책상에 앉아서 하늘의 별이 실제로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과 같을 수 있겠느냐? 밖으로 나가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 그야말로 참 공부니라. 앞으로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별을 관찰하고, 자다가 일부러 일어나 별자리를 관찰하지는 못하더라도, 자다가 소변이 마려우면 방에서 요강에 소변을 보지 말고 밖에 나가 소변을 보면서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보아라. 그것은 비단 하늘의 별을 관찰할 뿐 아니라 밀폐된 방안에서 호흡하던 답답한 공기를 벗어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게 되니 네 건강에도 좋다. 별들을 관찰한 후에는 별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간단한 말로 답변해 보아라.”
왕복 2십리 길을 걸어 학교를 다니며 농사일도 거들다 보니 매우 피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자다가 일어나 밖에 나가는 것이 끔찍한 일로 여겨져 억지로 소변을 참기도 하였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야만 일어났습니다. 때로는 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 소변을 보고 슬그머니 잠자리에 들려고도 하였다. 그러면 그 때마다 승산님은 마치 주무시지 않으셨던 것처럼 나무라셨습니다.
“밖에 나가 별을 보아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별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았노라고 말했다. “모든 별은 동에서 서로 움직입니다.” 그 말을 들은 승산님이 단호하게 말했다.
“틀렸다.”
“틀림없이 책에도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저는 책을 뒤져 제 말을 증명할 수 있는 대목을 펼쳐 보여드렸습니다.
“이 책도 틀렸다. 모든 것은 다른 사람이 가르쳐 주어야만 아는 것은 아니다. 네 자신 속에 본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힘이 갖추어져 있다. 네 눈으로 잘 관찰하면 될 것을 어찌 남이 하는 말만 믿고 네 눈을 믿지 않는단 말이냐? 다시 잘 살펴보아라.”
그 다음해 여름이었다. 모깃불을 피워놓고 마당의 평상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니 총총한 별들이 눈앞에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누운 채로 한동안 하늘을 바라다보았다. 초저녁에 아스라이 보이던 별들이 손에 닿을 듯이 가깝게 보였습니다. 잠들어 있는 사이에 하늘에는 신비로운 별들이 지상에 내려와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경외심에 쌓였습니다. 이 우주는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인가? 언제 생겼을까? 우주는 끝이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로 일어났습니다. 매일 보는 별도 관심이 생기기 전에는 그저 멀리 낮선 존재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관심이 생기자 그것은 새로운 학교였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아름다운 우주를 만들었을까 궁금하였습니다. 차츰 그것은 외경으로 변하였고, 그 외경의 마음은 다른 사물에 전이되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동녘하늘에 떠오르는 태양도 날마다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이라고 여기던 일들이 모두 하나하나 의문으로 다가왔습니다. 우주는 학교였습니다. 신기한 학교였습니다. 배우는 것이 재미있었습니다. 예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별은 매일 조금씩 위치가 달라집니다. 한밤중이면 봄철 하늘에도 여름철 초저녁에 볼 수 있는 별자리가 보이고, 새벽녘에는 가을철 초저녁의 별자리가 보입니다. 봄철 초저녁의 별자리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북쪽 하늘에 높이 떠 있는 큰곰자리의 북두칠성입니다.
봄철에는 은하수가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기 때문에 밤하늘이 훨씬 멀리까지 보입니다. 여름철에는 은하수가 다른 철보다 한결 뚜렷하게 보입니다. 북쪽 하늘에서 남쪽 지평선으로 흐르는 은하수는 참으로 장관입니다. 가을철 밤하늘에 가장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안드로메다자리입니다. 겨울이면 일년 중 별이 가장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공기가 맑아서 다른 철에 비하여 별이 뚜렷하게 보였습니다. 아름다운 것은 하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영롱한 달빛이 어린 밤이슬을 밟아도 보고, 밤을 새워 부르는 풀벌레의 합창에 빠져도 보고,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설원을 노니는 달빛도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귀찮던 일이 이제는 흥미를 갖게 되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관심에 의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별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별을 보면 볼수록 더 큰 의문이 쌓이게 되었습니다. 누가 이처럼 경이롭고, 신비스럽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황홀하기까지 한 이 별들을 하늘에 펼쳐 놓았을까? 도대체 이 우주는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의문은 의문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존재에 대한 의문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싹텄습니다. 때로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고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문득 북극성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별이 동에서 서로 움직인다는 대답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었다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승산님이 자신의 눈을 잘 활용하라는 말씀이 지당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도 알고 보면 마음이 보는 것인데, 그 마음에 그릇된 주관이 들어 있어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날마다 쉬지 않고, 별을 보면서 외경을 배웠습니다. 책을 보아야만 아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배워야만 아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궁리하여 터득하는 즐거움을 배웠습니다. 밝은 대낮 천만가지로 갈려져 있던 만물이 어둠 속에서 “이 먹고?”하는 명상 중에 하나가 되는 것을 배웠습니다.
3) 구름 위를 걷다
밤늦게 시내에서 귀가하신 승산님이 눈을 털고 들어오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저녁 구름을 타고 왔다.”
“정말요?”
“구름이 땅에 내려 왔더구나.”
“그건 눈이잖아요.”
“그렇다. 하지만 땅에 내려오기 전에는 분명 구름이었지.”
“구름하고 눈하고 어떻게 같아요?”
“구름이 하늘에 있으면 구름이라 하고, 땅에 내려오면 눈이라 하지 않느냐? 내가 밟고 온 눈은 땅에 내려온 구름이 아니고 무엇이냐? 변하는 세계에서 보면 어느 한 물건도 그대로 있지 않는다. 구름이 눈이 되고, 눈이 물이 되고, 물이 수증기가 되고, 수증기가 구름이 되고, 다시 구름이 눈이 된다. 이중에 어느 것이 참 모습이겠느냐?”
“어느 것 하나 참 모습이 아닌 것이 없겠지요.”
“그렇다. 지금 열거한 여러 가지 모습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지정하여 그것만이 참 모습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중 지상에 가장 많은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물이다. 이 물은 거대한 바다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로 나타나기도 하고, 깊은 산 속의 옹달샘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피어오르는 안개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를 흐르는 지하수일수도 있고, 수증기로 공중에 떠오르기도 한다.
수증기는 높은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된다. 안개는 지면에서 만들어진 구름이라 할 수 있겠지? 안개 속을 거닐면 구름 속을 거니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한 여름 천둥․번개와 함께 소나기로 쏟아지기도 하고, 겨울에 평화로운 모습으로 온 세상을 하얗게 덮는 것이 눈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모습을 바꾸면서 하늘과 땅과 바다를 순환한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물은 수소 두 개와 산소 한 개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물은 다시 산소가 되기도 하고, 수소가 되기도 하겠지. 그리고 산소와 수소는 다시 여러 가지 다른 물질과 화학반응을 하여 수많은 모습으로 변한다. 지상의 수많은 생물이 물을 마시고 살아간다. 사람도 60%가 물로 이루어졌다고 하더구나. 수박은 97%가 물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수박을 물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수력발전을 이용하여 물의 힘으로 전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처럼 千變萬化하는 것이 물이다.”
“눈은 이불이 되기도 한다. 땅위의 온도가 0도 이하로 떨어져도 쌓인 눈 밑에는 0도 이하가 되는 일이 거의 없다. 눈 밑의 보리가 활발하게 분얼을 하는 것도 이른 봄 머위가 눈 사이로 꽃잎을 내미는 것도 겨울 동안에 눈이 이불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치로 얼음도 단열재의 역할을 한다. 얼음은 좀처럼 열을 전하지 않는 성질이 있어서 밖의 차가운 공기로부터 물 속의 생물을 보호해 준다. 얼음이 보온벽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물 속의 생물들은 다 얼어 죽고 말 것이다.”
승산님은 마치 탐구에 몰두한 학생처럼 진지한 자세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짐작하겠느냐?”
“구름이 솜털처럼 가벼우니까 하늘을 날겠지요.”
“어느 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권층운에는 1㎦의 구름의 무게는 약 50톤쯤 되고 적란운에는 5000톤이나 된다고 한다. 1년에 지상에 내리는 비의 무게가 약 300조 톤이나 된다고 한다. 이처럼 물의 순환은 기상의 변화를 만들고, 지상의 생물을 기른다. 사람들은 흔히 물은 형체가 없는 부드러운 것이라고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홍수가 내리면 지상의 어느 자연재해보다 큰 피해를 주지 않니? 물은 자유롭다. 때로는 흰 구름으로 유유히 하늘을 떠돌고, 때로는 먹장구름으로 덮어도 보고, 때로는 부드러운 이슬비로 새싹을 깨우고, 때로는 소나기로 뿌연 불투명 수채화로 평야의 풍경을 그리기도 한다.
때로는 오늘처럼 세상의 온갖 소리를 잠재우며 평화로운 눈 내리는 밤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눈보라로 광야를 휘몰아치기도 하며, 땅 속 깊은 골을 흐르기도 하고, 시냇가에 서 송사리를 키우고, 때로는 넓은 바다에 나가 남극과 북극을 오가기도 한다. 그 부드러운 물도 거대한 빙하가 되면 몇 만 톤이나 되는 선박도 침몰시킨다. 뜨거운 증기가 되어 철마를 움직이지 않느냐? 이 얼마나 신비로운 것이냐!”
“성가에도 있듯이 물은 만물을 기르면서도 스스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겸손의 덕을 갖고 있으며, 물은 본래 그 성질 부드러워도 처마 끝의 낙숫물이 방울방울 돌도 뚫는 꾸준한 정성의 덕을 갖고 있으며, 물은 맑고 흐림을 두루 합하여 맑히며 여울지어 바다를 이루는 국한 없는 단결의 덕이 있다.”
4) 굼벵이가 날개를 단다?
밭일을 하다 번데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징그럽다고 죽이려고 하자 승산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죽이지 말아라. 생명이란 네 생명이 귀하듯이 번데기의 생명도 귀한 것이다. 네 눈에는 그것이 보기 흉한 벌레로만 보이겠지만 그 번데기도 며칠 후면 하늘을 날아다닐 것이다.”
“이 번데기가 날아다니게 되어요?”
“대부분의 나무를 갉아먹거나 땅속에 있는 벌레들을 보면 모두 그 벌레가 나중에 날개를 단 곤충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부분의 벌레가 날개가 있는 곤충이 된다. 자연의 변화는 오묘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하고 한 순간의 모습만 보면 그 전체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가을밤에 어둠 속에 반짝이는 반딧불을 많이 보았겠지? 반디는 어미가 물가의 풀잎 위에 알을 낳는다. 알은 시기가 되면 깨어나 물로 떨어진다. 반디는 애벌레 때는 물 속에서 생활하다가 이듬해에는 땅위로 올라와 생활한다. 그리고 땅속에 들어가 번데기로 지내다가 탈바꿈하여 반디가 되면 하늘을 날아다닌다. 물 속에서 호흡을 할 수도 있고, 땅속에서 번데기로 지내기도 하고 하늘을 날기도 한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느냐? 게다가 뜨겁지 않은 빛을 깜박이는 것이 기이하지 않느냐?
자연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지내는 일들이 수없이 많다. 굼벵이가 탈바꿈하여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으면, 소우주라고 하는 사람이 탈바꿈하면 어떤 모습이 되겠느냐? 사람이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집착을 벗어나면 된다. 마음이 무엇인가에 집착하면 올바른 눈으로 사물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눈으로 볼 때 어디에 붙잡히고 얽매인 바가 없이 보고, 귀로들을 때, 어디에 집착된 바 없이 듣고, 이렇게 6근을 작용하면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볼 수도 있고, 자신의 본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고 자신의 본래 마음으로 행동할 수도 있게 된다. 일이 없을 때는 모든 잡념을 놓아버리고 편안하게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모습을 관조하여야 한다. 이것이 쌓이면 큰 힘을 얻게 되어 마치 번데기가 바깥에서 보면 아무 움직임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활발히 변화를 하여 날개를 만들고 곤충의 모습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5) 진땀을 흘리며 받은 입학선물
제가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아침이었습니다. 아침식사를 하시면서 승산님이 “오늘 네 입학식에 같이 가자꾸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유일하게 학교에 오신 기념할만한 일이었습니다. 명목은 입학을 축하한다고 하셨지만 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희말라야시다가 아직 찬바람이 봄기운을 시샘하는 회색의 교정에 푸른빛을 발하며 서 있었습니다. 입학식이 시작되기 전 교정의 벤치에 앉아 승산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고등학교 입학을 축하하여 내가 너에게 입학선물을 주고자 한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형편이 남들과 같지 않아 다른 사람들처럼 물질적인 선물은 못하겠구나. 나는 정신적인 선물을 하나 주겠다. 그런데 이 선물은 내가 준다고 하여 네가 쉽게 받을 수 있는 그런 선물이 아니다.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모쪼록 네가 받아 가져서 네 인생에 귀중한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선물은 다름이 아니라 ‘왜 배우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태어나서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람이 길을 가는 것을 예로 들어보자. 목적이 없는 사람은 아무 성과 없이 배회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가치 없는 일에 힘을 소모한다. 목적이 분명한 사람은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일 없이 곧장 목적지에 도착한다. 사람의 일생은 매우 짧아서 나이가 들어 다시 시작하려면 이미 때는 늦다.
朱子께서 勸學文에 이르시기를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하고,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하라.
日月逝(이)歲不我延이니
嗚呼老(이)是誰之愆인고 라고 하였다. 그 뜻을 해석하면 이렇다.
오늘 배우지 않아도 내일이 있다고 이르지 말고,
금년에 배우지 않아도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마라.
세월은 가는데 나이는 길어지지 않나니,
아아! 늙었도다. 이 누구의 허물인고?
아침에 하루 생활을 계획하고, 봄에 1년 중의 계획을 세워야 하듯이, 한 평생의 계획도 청소년기에 세워야 방황하지 않고 보람찬 일생을 보내게 되지 않겠느냐? 요즈음 누구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이라는 16년이라는 세월을 공부 한다. 너도 이제 중학교까지 9년을 학교에 다녔다. 그간은 목적을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남이 가르쳐주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스스로 가치판단을 하여 모든 행위의 목적과 방법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우선 ‘왜 배우는가?’ 즉 ‘무엇을 위하여 공부를 하는가’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여러 가지로 답변할 수 있겠지만 누구에게나 타당하고 간명하여야 한다. 앎에도 여러 단계가 있는데, 그저 지식으로 아는 것은 마치 귤의 겉면만을 보는 것과 같다. 귤껍질을 벗기고, 쪼개고, 맛을 음미하여야 비로소 귤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정확히 안다면 자연히 답변도 간명해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네가 내 선물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저는 아버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