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마음이 부처라 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가.
양현경
마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동하지 않고 정하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본래의 성품자리이나, 경계에 동하면 비둘기랑 토끼가 나오는 마술사의 모자처럼 온갖 희노애락과 탐진치와 생각이 나오고 만들어지고 비롯되는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 부처는 능이성 유상하고 능이성 무상하여 한없는 무량세계를 전개하고 나타내는 일원상의 진리 자리이다. 우리 사람도 일원상 진리의 작용으로 정한 자리에서 보면 상주 불멸로 여여자연하고 동한 자리에서 보면 심신 작용을 나타내는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이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이 마음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심결 4장의 말씀처럼 날씨가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더우면 더운 줄 알고 때가 되면 배고픈 줄 알고 진심도 내고 기뻐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순간 순간 나타나는 경계에 대한 반응으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결정하면서 능이 우리 스스로 무량 세계를 전개해 나간다.
그런데 이 불성은 내 마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도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현상은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분별이 나타나고 이 부처의 마음을 가진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의 마음 작용의 결과이니 우리는 그 현상을 직시하여 내 마음을 먼저 부처의 마음으로 챙겨 관하고 행동을 취사해야 한다. 본래 맞고 틀리고 잘하고 못하고 좋고 나쁘고 싫고 좋고 기쁘고 우울하고 힘들고 살기 싫고가 없다. 경계는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나타나는 분별이고 선악 업보에 나타나는 차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왜 팀장님은 저렇게 밖에 못할까” 라는 인식이 내 마음에 생기는 것도, 팀장님 자체도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나타나는 분별이며 차별이다. 큰오빠의 사고도, 작은 할아버지의 뇌사도,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이 슬픈 내 마음도 내 눈에, 내 마음에 나타나는 분별이고 차별이다. 이는 우리가 희노애락의 마음을 가진, 불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곧 부처이니 원만 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자리를 가지고 있다. 부처님, 대종사님이 밝혀주신 자리이다. 우리는 이 성품 자리로 돌릴 수 있다. 계속 분별심에 끌려다닐 건지, 내 부처의 성품 자리로 갈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마음을 펼치면 전 우주를 더 덮고도 남는 다는 것을, 닫으면 바늘 끝 한 자리 들어갈 틈도 없다는 것을 안다. 나타나는 경계도 부처요, 내 마음도 부처임을 알고 있다. 공적영지의 광명을 우리가 나타낼 수 있다.
이 의미를 생활 속 경험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20박21일 연수 기관을 심사하고 있었다. 심사 일정은 각 기관 PT가 10분, 질문이 5분이었다. 총 3기관이 응모했다. 애시당초 8명 심사위원을 불러놓고 질문 시간을 5분으로 정한 건 말이 안되는 거였지만, 그리 알고 2시에 지정된 장소에 갔다. 역시나 첫 번째 기관 심사 질문 시간이 5분이 아닌, 시간을 보진 않았지만, 대강 20분 이상 걸렸다. 두 번째로 설명하는 기관에서 솔깃한 제안을 했다. 확인하고 싶어서 다른 심사위원의 질문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난 후 질문을 했고, 질문과 대답, 질문과 대답이 오갔다. 난 사전연수를 2번 진행해 보았던 사람으로서 그 제안이 사전연수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판단하고 질문을 했고 또 심층 질문을 했다. 그 때 ㅇㅇㅇ 님이 그건 협상 단계에서 해도 되는 얘기라며 대화 끝부분에 개입을 한다. 첫 번째 기관 PT와 질문이 계획보다 길어질 때도 내뱉은 혼잣말을 들었었다. 순간 욱했다. 지금 시간 지키기와 그 다음 순서를 기다리는 기관보다 더 중요한 건 사전연수의 목적을 최대한 달성할 수 있는 기관을 선정하는 거며, 난 이미 두 번을 진행해본 사람으로 중요한 걸 물어본 건데, 왜 저러지? 생각했다. 그리고 예의없이 사람 말 자르는 건 또 뭐지? 화가 났다.
멈췄다.
첫 번째는 그 사람이 날 우습고 당황하게 만드네... 하는 생각
두 번째는 이 연수에 대해서, 일의 중요도의 순서도 모르면서 끼어드네 하는 생각
세 번째는 예의없음에 짜증이 났다.
첫 번째 날 무안하게 만든다는 생각은 일어나는 분별일 뿐이다. 그 사람이 날 무안하게 만들던지 아니던지, 무안함이 없는 내 성품자리로 갈 건지, 계속 무안함을 느낄 건지는 선택이다. 두 번째 쥐뿔도 모르면서 끼어든다는 생각은 틀릴 수도 있다는 거며 내 분별이다. 그 분이 알던지 모르던지 그건 알 수 없다. 그 분이 끼어들던 안끼어들던 그건 부처의 마음을 자리를 가진 그 분의 분별이다. 세 번째 예의없음도 내 문제가 아니다. 그의 문제이다. 예의 없다는 생각 또한 틀릴 수도 있다는 거며 그것 또한 내 문제가 아니다.
일어나는 일은 일어난 대로 바라볼 뿐이며 그에 따라 일어나는 분별과 화는 걷어내야 한다. 그 분이 뭘 알던지 모르던지 그건 내 문제가 아니다. 어떤 생각과 마음을 낼 것인지가 내 문제이며 내 선택이다. 대종사님은 경계에 닥쳤을 때 경계를 없애는 게 아니라 요란함을 없애라고 하셨다. 경계는 부처의 자리에서 보면 그냥 일원상의 진리대로 흘러가는 강물과 같다. 흘러가는 강물에 대고 화를 낼 수 없지 않을까. 수심결 5장에서 성품이 어느 곳에 있냐는 질문에 작용하는 데 있다고 했다. 부처의 마음 자리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리라는 선택을 하고 돌리는 게 이 의두요목의 의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