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敎史 - 가난한 그때 제 8차 교의회에서의 대종사의 눈물 (펌)

조제민 | 2009-01-30 08:19:47

조회수 : 1,929

출처 :  박맹수 원광대학교 교수님 글

1916년 4월 소태산 박중빈 선생의 깨달음을 계기로, 1924년 6월에 전북 익산에서 창립된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는 원불교의 옛 이름이다. 불법연구회는 당초 소태산을 중심으로 풀뿌리 민중들이 모여 만든 공동체였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을 비롯한 물적 토대들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불법연구회 회원들은 초창기부터 금주단연, 공동노동, 허례폐지 등을 실천하며 저축조합 운동을 벌이고, 바다를 막아 간척지를 일구며, 낮으로는 일하고 밤으로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실천하면서 식민지 조선 민중들의 경제적 자립을 돕는 한편, 일제의 식민지배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정신개벽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왔다. 그러나 이 같은 불법연구회의 운동은 결코 순탄하게 전개되지는 못했다. 1932년 봄, 그러니까 불법연구회가 창립된 지 8년 째 되던 해에 연구회는 중대한 난관에 봉착하였다. 중대한 난관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그 숨 막히던 역사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기로 한다.           

  “본년(1932) 정기총회를 대신한 제 8회 평의원회 석상에서 어떤 간부들(원불교 교무)의 생활보장 여부의 건을 토의할 새, 사정은 대단히 난처하였다. 생활을 보장하여 주자면 회(會)(원불교)의 예산이 부족하고, 생활을 보장치 아니하여 주자면, 그들 사가(私家) 생활이 막연하여 그들을 회중에서 내놓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으며(집에 돌려보내지 않으면 그집 식구들이 생계가 막연하여 돌려보내지 않으면 안되겠는지라), 그들을 내어 놓는다면 회중 사업은 운전할 수 없는 난경에 빠지게 될 가위 진퇴유곡의 경계이었다. 그리하여 평의원 이하 일반은(원불교 교무와 신도는) 용이한 해결을 얻지 못하고(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장내는 침묵한 그대로 일분 이분을 경과할 그 찰나, 덕의심(德義心)이 무비한 예의 이공주(李共珠) 선생은 정중하고 쾌활하고 또 선명하게도 그 생활을 자기의 절약 절검으로써 독단 보장할 것을 선언하였다.(신도한명이 그 교무들의 사가 생계를 책임져 주기로 하였다.) 때에 장내는 마치 깊은 함정에서 살아 올라온 것 같은 환희와 안심의 빛이 모든 사람의 얼굴에 돌고, 이어서 감사를 표시하는 박수소리가 요란하였다.

  이 때에 회장(會場) 서쪽 편에 좌정하였던 종사주(宗師主; 소태산 박중빈 선생에 대한 당시의 호칭)께서는 존안에 처연한 빛을 띄우시고 감개 깊으신 어조로,「내가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1924년)에 동지 몇 사람인 그들과 영광(靈光)에서 부안(扶安), 부안으로부터 익산(益山)에 나올 때는 우리의 정신과 몸까지 희생하여서라도 일체 인류에게 이익됨을 끼쳐 주자고 굳게 맹세하였더니, 아! 세상일이라는 것은 과연 뜻과 같이 되지 못하는 것이로구나. 남에게 이익됨을 끼쳐 준 것은 아직 없고, 도리어 각 방면으로 소소(小小)한 생활까지 남의 의뢰를(도움을) 받게 되니 이 어찌 우리(원불교)의 본뜻이랴」하시고 성안에는 눈물의 흔적이 나타나시었다.” (불법연구회 기관지,『월말통신』35호, 1932년 4월호)

  • 제5장 의두요목/ 4장세존이 열반(涅槃)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찌기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김형안 | 09-02-02 16:02 | 댓글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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