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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구경

김인택 | 2009-02-18 15:22:25

조회수 : 2,758

 

                                극장 구경

                                                                                                    김태문


  최근 두 편의 영화를 관람하였다. 문외한인 내가 영화평을 할 자신은 없고 약간의 소감을 적어보려 한다.


   워낭소리:

  경북 봉화의 산골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온 노부부와 늙은 소가 엮어내는 고달픈 삶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다. 주인공은 배우가 아니고 그 고장의 80대 농민 부부인데 그들의 언행에서 전혀 “연기”의 낌새를 느낄 수 없었다.
 

  특히 이웃 예천의 농촌출신인 나로서는 타지방 사람들이 알아듣기 힘든 특유의 사투리가 정겨웠고, 우리 부모형제 세대가 살던 힘겨운 농사의 현장을 다시 체험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삼복더위에 허리를 굽혀 논매고 피뽑고 풀베기를 할 때 땅에서 내뿜는 열기는 얼마나 뜨거웠던지---.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농사를 접고 자식을 찾아가거나 이앙기로 모를 심고, 농약을 치고, 늙은 소를 팔아치우기를 거부한 채 40년간 가족처럼 살아온 소에게 무농약 풀을 베어 먹이면서 함께 쓰러질 듯이 힘겹게 일하는 모습이 무척 안쓰럽고 눈물겨웠다.
 

  자기와 소는 주인을 잘못 만나 평생 고생만 한다고 투덜거리는 할머니의 넋두리를 들으면서---. 버쩍 마른 소가 쟁기질하거나 달구지를 끌 때 그 목에서 달랑거리는 워낭소리는 무척 처량한데, 비실거리던 소는 드디어 일어나지 못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는다.
 

  오랜만에 보는 좋은 문화영화로 주먹질, 총칼질, 욕설이 없어 보기 편했다.  

 

  적벽대전-2:

  우리가 어릴 적에 읽었던 중국 고대소설 삼국지(三國志)의 하이라이트인 적벽대전(赤壁大戰)을 다룬 영화다. 적벽대전-1에 이어 나온 대규모 전쟁영화로 등장하는 인원과 물량이 엄청나 6.25 때 그들의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연상시킨다.

  장강(長江)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 위(魏)의 조조(曹操)와 오(吳)의 손권/주유(孫權/周瑜) 양군에다 손권과 동맹을 맺은 유비/제갈량(劉備/諸葛亮) 진영까지 가세하여 벌이는 교묘한 작전과 치열한 전투가 볼 만하다.
 

  소설만 읽고는 짐작하기 어려운 옛날 무기나 진법(陣法)을 눈으로 보는 재미도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숱한 무기 예컨대 무슨 도(刀), 창(槍), 모(矛) 등은 어떻게 생겼는지, 제갈량의 팔진법(八陣法)은 어떤 것인지를 적벽대전-1에서 볼 수 있었다.
 

  영화의 내용이 원작소설과 다소 다른 것은 흔한 일이지만 패전 후 조조가 손권/주유와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웠다.
 

  나는 중고시절에 “삼국지”를 열 번도 넘게 읽었다. 처음 중2 때 서울이 인민군 치하에 있을 동안 삼국지 5권 중 2권을 다 외울 정도로 여러 번 읽었는데 작가의 월북(越北)으로 나머지 3권이 안 나와 무척 아쉬웠다. 이어 폐결핵으로 요양할 동안 아버지가 빌려오신 한문본 삼국지를 망설임 끝에 몇 번 읽으면서 그 재미에 침식을 잊은 적이 있다.
 

  그 책은 상해판 15권이었는데 활자 대신 줄 사이에 쓴 작은 붓글씨를 새긴 석판(石版) 인쇄물로 매권 글씨체가 달랐다. 나오는 한자의 7-8할 밖에 몰라도 줄거리를 아는 데는 별지장이 없었다. 뒷날 삼국지의 한문은 쉽고 수호지(水滸志)는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뒤에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지가 몇 사람의 번역판, 만화, 심지어 컴퓨터 게임으로 나왔는데 나도 1권짜리 요약판을 읽은 적이 있다. 또 ‘80년대에 명동 중국대사관 부근 서점에서 대만판 “삼국연의(三國演義)”를 다시 사서 여러 몇 번 읽고 보관중이다.
 

  여기서 말하는 “삼국지“는 “삼국연의(三國演義)” 또는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로 오래 구전되던 3세기 삼국이 겨루던 이야기를 명(明)나라 초엽 나관중(羅貫中)이 정리하여 쓴 장편 역사소설이다.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시작으로 한(漢: 後漢=東漢)이 위, 오, 촉(魏吳蜀) 삼국으로 나뉘어 패권을 다투다가 진(晉)나라로 통일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은 역사상 실재 인물이지만 소설의 내용은 작가가 꾸며낸 부분이 많아서 예컨대 적벽대전의 경우 실제로 조조와 손권/주유 간의 전쟁이었을 뿐 유비/제갈량은 관여한 적이 없다고 한다.

  또 사가(史家)들은 삼국 중 가장 강대했던 위(魏)를 주류로 치지만 소설은 유비/제갈량의 촉이 한(漢)의 정통성을 이어받을 나라로 그려서 독자로 하여금 조조의 횡포와 승리에 분개하고 유비/제갈량의 실패에 가슴 아파 하도록 만든다.
    

  한편 원래 “삼국지(三國志)”는 중국에서 한(漢: 前漢과 後漢으로 나뉨)나라 다음에 패권을 다툰 삼국의 역사서로 진(晉)의 진수(陳壽)가 짓고 송(宋)의 배송지(裴松之)가 주해한 것이다. 위지(魏志) 30권, 오지(吳志) 20권, 촉지(蜀志) 15권으로 구성되었고, 특히 위지 동이전(東夷傳)에는 우리나라 고대 부족국가인 부여, 고구려, 읍루(挹婁), 옥저(沃沮), 예(濊), 삼한(三韓) 등에 대한 기록이 있어서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극장 구경 가자”. 지금 사람들은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들을까?

  우리에게 이 말은 “영화 보러 가자”는 소리다. 연극 공연장인 극장(劇場: theater)과 영화를 상연하는 영화관(映畵館: cinema house)은 다른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근년 대도시에 영화전용관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그런 구별이 없이 극장에서 주로 영화를 상영하고 더러 연극을 공연했으므로 “극장구경”은 곧 “영화관람”을 의미했다.
 

  그런데 6.25 이전 서울에는 연극 공연장으로 서대문에 동양극장(東洋劇場: 현 농협자리)이 있었고, 명동의 시공관(市公館)과 태평로 서쪽의 시민회관(6.25후 임시 국회의사당)에서 가끔 연극과 오페라를 공연했다. 나는 6.25전 경기중학 때 시공관에서 반공연극, 시민회관에서 우리 학교 음악선생님이 출연한 오페라 춘향전을 관람한 적이 있다.
 

  대학생이던 ‘50년대에 서울에서 영화상연관인 극장은 개봉관, 재개봉관, 삼류극장으로 구분되었다. 개봉관인 중심지의 국제극장, 단성사, 중앙극장, 수도극장, 명보극장 등은 너무 비싸 가보기 어려웠고, 다음 재개봉관으로 계림극장(을지로6가)과 성남극장(남영동) 등이 있었다. 나는 주로 변두리 싸구려 삼류극장을 애용했는데 대개 두 영화를 동시상영하는 곳으로 신당동에 광무극장이 있었다.
 

  당시 중고등학생은 학교의 허가 없이는 극장 출입금지로 몰래 갔다가 지도교사에게 들키는 날에는 정학 등 엄한 처벌을 각오해야만 했다. 극장 안 맨 뒤에 임석경찰관 자리가 있었는데 그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아리송하다.
 

  내 고향에는 일제시대부터 극장이 하나 있었다. 거기에서 초등학교 3학년 8.15 해방 때까지는 일본 사무라이나 만화 영화, 해방 후에는 “똘똘이의 모험” 같은 우리 영화를 구경했는데 전부 무성이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단상 귀퉁이에서 대사를 읊던 변사는 기억에 남는다. 우리는 사무라이 모습으로 막대를 휘두르거나 구성진 변사의 가락을 흉내 내곤 했다.
 

  처음 본 천연색 영화는 해방 후 유황도(硫黃島) 전투영화로 시뻘건 피가 흐르는 장면에 무척 놀랐다. 드물게 서울에서 신협(新協) 같은 극단이 내려와 연극공연을 할 때면 짙게 화장한 배우 몇이서 큰 선전판을 어깨에 메고 징을 치는 젊은이와 함께 길거리를 돌아다녔고 그 옆으로는 동네 애들이 졸졸 따라다녔다. 언젠가 신협이 연극 “뇌우(雷雨)”를 공연한 적이 있다.
 

  그 극장이 전쟁 때 타버리고 대신 임시 흙벽돌 극장이 지어졌는데 가물에 콩나듯 영화를 상영했다. 의자도 없이 맨바닥에 깐 가마니에 앉아 구경했고 낡은 외화를 상영할 때면 흐려서 잘 안 보이는 자막 대신 변사가 엉터리로 대사를 읊었다. 더러 필름이 끊어져 지체되면 “돈내라” 고함지르거나 휘파람을 부는 이들도 있었다.

  가끔 공짜 영화가 늦은 저녁 학교운동장에서 상영되곤 했다. 그러면 수많은 남녀노소가 커다랗게 세워놓은 스크린 양쪽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대한늬우스”부터 시작되는 영화를 구경하는데 비가 오거나 달이 너무 밝으면 낭패였다.         


  

       

 

         

  • 젊은이들보다 더 부지런하시고 활기차게 사시는 모습이 멋져 보이십니다.
     이렇게 영화평까지 올려주셔서 나눔의 본보기를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극장과 관련된 지난 이야기를 들으니 '극장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영화 '시네마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글을 읽다보니 함께 저에게 극장은 무엇이었나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건 새로운 세상, 넓은 세상, 꿈의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김경애 | 09-02-20 23:00 | 댓글달기
  • 어릴때 야밤에 누나들 영화구경 간다면 따라 나서다 얼마가지 않아 누나들 잃어버려 혼자 돌아 올때가 기억납니다.
    과거 추억을 떠올리게 하시는 은산님!
    책을 많이 하시어 부럽습니다. 아주 문학적이 십니다.감사합니다.
    김형안 | 09-02-25 10:46 | 댓글달기
  • 극장의 맨 뒷 좌석 임석경찰관석은 저의 어릴 적 기억에도 있습니다.  그 역할은 제가 들은 바로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 정책의 잔재로 알고 있습니다.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한계가 경찰 입회하에서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대종사님 당대 총부 구내에 북일 주재소 형사가 상주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해방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 나라 세우기가 급할때 우선 공무를 해본 유경험자를 찾다 보니 일제때의 한인 경찰과 하급 관리들을 그대로 다 기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 때 당시 마을의 집회 장소로서는 유일한 곳이 극장이다 보니 과거 잠재 습관이 저절로  제도화 되었다고 보아집니다. 사회 제도라는 것이 과거 기억의 잠재 의식과 관계되어서 실제 사용되지도 않으면서 없으면 이상하다고 생각되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치 남자 가슴에 불은 적꼭지처럼.

    눈이 펑펑 쏟아 지는 깊은 겨울 밤 난로에 장작불이 이글거리고 차를 마시면서 삼국지 애기 극장 얘기 다빈치 얘기로 밤을  지새우고 픈 ...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노변 정담.. 그런 자리에는 꼭 은산님을 모셔야 됩니다.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가는 데 완도 휴가가서 그런 시간이 있었던것 같은데요.제가 산 밑에 오두맏 짓고 차 마시는 장소 하나 만들어 볼려고 합니다.
    조제민 | 09-02-27 07:01 | 댓글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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