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대학졸업 반세기를 회고하며

김인택 | 2009-03-06 19:59:00

조회수 : 2,882

 

                         대학졸업 반세기를 회고하며

                                                                                               김태문

  <졸업식 전후>


  금년 ‘09년은 나의 대학 졸업 50주년, 초등 졸업과 중학 입학 60주년이다.


  우리는 ‘59년 3월 28일 서울대본부가 있는 동숭동에서 윤일선(尹日善)총장을 모시고 졸업식을 치렀다. 십여명의 박사, 백여명의 석사, 천여명의 학사가 배출되었는데, ’55년 입학생 약2천명(공대 10개과 4백여명) 중 약 절반이 졸업하고 나머지는 뒤쳐져 졸업하였다.   


  서울대는 ‘46년에 일제시부터 수도권에 있던 경성제대와 여러 공립전문학교를 통합하여 발족한 관계로 12개 단과대학이 서울과 경기도 각지에 산재하다가 ’74년에야 현 관악캠퍼스로 모였다. 내가 대학본부를 들릴 기회는 매학기 등록시와 입학식, 졸업식이 고작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45년 광복, ’48년 정부수립, ‘50년부터 3년간 6.25전쟁을 치르고 전재복구에 골몰한 상태였다. 낙후된 남한의 산업시설은 전쟁으로 거의 파괴되고 국민들은 의식주 해결에 급급하였다. 국가경제는 미국의 원조 없이는 지탱하기 어려운 상태로 인구의 2/3가 살던 농촌은 매년 봄 “절량(絶糧)”의 아픔을 겪었다. 세계 최빈국의 하나였다.
 

  대학과 대학생이 적은 중에 수도권 공대는 서울대 외에 단과대인 한양공대와 신설 인하공대, 또 연대 이공대 뿐이었지만 워낙 산업시설이 빈약하여 취직할 공장이 별로 없었다. 공대를 나와 고교 이과계 교사로 진출하는 이들도 있었다.

  화공과 동기생 44명 중 도미하여 박사가 되고 눌러앉은 10여명을 뺀 나머지는 직장을 찾아 수도권, 부산, 충주 등지로 흩어졌다. 우리가 처음 현장에 갔을 때 지도해줄 선배가 없어 각자 시행착오를 겪으며 익히는 경우가 많았다. 


  <경인/부산 공업지대>
  

  화학산업은 비누, 고무신, 밀가루, 설탕, 조미료, 치약/칫솔 등 생필품과 페인트, 타이어 등의 소규모 공장이 경인지방과 부산 등에 약간 있었다. 전후 원조자금으로 시멘트(문경), 판유리(인천)공장이 생기고, 전형적 화학공장인 비료는 충주(1肥)와 나주(2비)공장이 시운전 단계였다. 두 비료공장에서 경험을 쌓은 숱한 기술자와 기능공들은 뒷날 여러 비료와 석유화학공장의 건설, 시운전, 운전시 큰 역할을 맡게 된다.


  나는 처음 3년 남짓 영등포의 조미료와 제분공장에서 작업복을 입고 일하면서 각종 기계장치를 익혔다. 월급이 몇 달 밀리는 어려움도 겪었다.
  중앙청부근 자취집에서 전차로 출퇴근하면서 ‘60년 4.19로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하고, ’61년 5.16으로 장면정부 대신 박정희장군이 이끈 군사정부가 등장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전기사정이 나빠 “특선(特線)”을 쓰는 곳만 빼고 밤에 일반 가정과 공장은 정전이 되었다. 토요일도 윗분의 눈치를 봐가며 퇴근을 했다.
 

  ‘62년부터 정부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연이어 추진하면서 수입대체용 공장이 생겨나 기술자들의 활동무대가 점점 늘어났다. ’62년에 환→원 화폐개혁이 있었고, 나는 부산으로 전직하여 소규모 신규 화학공장의 건설, 운영 책임자인 생산과장, 부장으로 근5년간 일했다.
 

  첫 20t/d 포르말린공장은 일본기술로, 둘째 30t/d 공장은 자체 확대설계로, 3t/d 펜타공장은 실험실-실증시설-본공장까지 자체개발로 건설하였다. 30대의 사장은 20대 동기생인 공장장과 나를 잘 대우하고 공장 일을 다 맡긴 대신 휴일에도 수시로 공장으로 불러내는 통에 쉬는 날 실컷 자는 것이 소원이었다.  

  초창기 우리의 현장숙소는 태풍에 날아갔고, 옮겨간 하숙집은 ‘63년 극심한 식량난으로 배급쌀을 타야만 밥을 주었다. ’64년 내 결혼 때 사장은 전셋집을 얻어주었다. 우리 손으로 기간직(주로 SKY출신)과 기능직을 공채하여 회사를 알차게 키웠다.


  <울산석유화학단지와 150t/d 메탄올공장>    


  ‘60년대에 늘어나는 내수시장을 겨냥하여 정유공장은 울산(油公)과 여수(湖油), 비료는 울산(嶺南-3비, 韓肥-5비)과 진해(4비), 합성섬유(나일론, 폴리에스터, AN등)는 각지에 건설되었다. 

  다른 산업분야도 내수와 수출용 합성수지, 합판, 신발, 고무, 타이어, 제강, 자동차조립, 라디오/전화교환기, 모터/변압기, 농기계 등 공장이 건설되고 발전소 신설, 석탄 증산, 사회간접시설 확충이 이뤄졌다. 
 
  한국경제는 1,2차 계획기간(‘62-‘71년)에 연평균 약9%씩 성장하여 1인당 GNP 87→278$, 수출은 0.5억→11억$로 증가하였다.


  정부는 ‘60년대에 울산석유화학단지를 추진하였다. 사업주체로 나프타분해는 공기업인 유공, 각 계열공장은 공기업인 충비(忠肥) 자회사와 몇몇 사기업이 지정되었다.
 

  동시에 계열공장은 아니지만 대성목재가 150t/d 메탄올공장 사업주체로 지정되어 나는 ’67년 프로젝트 책임자로 옮겨갔다. 첫 과제는 차관(借款)계약으로 일본, 독일과 협상하다가 뜻밖에 최신 제조공법에 의하여 훨씬 싸고 좋은 조건을 제시한 영국측과 건설/차관계약을 맺었다.

  상업적 조건은 미국유학파의 도움을 받았지만 기술사항은 나와 후배 엔지니어 몫이었다.
 

  계약 후 수개월 걸린 외자도입승인, 영국 장기출장으로 엔지니어링사와 기술협의 및 메탄올공장 실습, 공장요원의 충원과 훈련, 건설사무소장으로 영국인들과 함께 건설공사를 챙겼다.
 

  ‘71년 공장이 준공되자 내 직함은 공장장으로 바뀌고 상공부차관을 모신 준공식에서 장관표창을 받았다. 36세 때로 산업이 급성장하던 당시 3-40대의 젊은 공장장이 흔했다. 마치 6.15전쟁 중 국군이 5만에서 50만으로 급팽창하면서 20대 장군이 여럿 나온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이 무렵(‘65-’75년) 국내외 정치, 경제적 중대사가 많이 생겼다. ‘65년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 68년 김신조팀의 청와대 습격기도, ’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 ‘71년 닉슨의 주한미군 감축발표, ‘72년 울산석유화학단지 준공, 7.4 남북공동성명, 10월유신, ’73년 포항제철 준공, 현대조선소 기공, ‘73/’74년 제1차 석유위기, ‘74년 육영수여사 피격, ‘75년 월남공산화.

  이 가운데 석유화학단지와 조선소 행사에는 나도 단상에서 박대통령의 연설을 들었다.


  <여수석유화학단지와 1,000t/d 메탄올공장>


  ‘70년대 들어 정부는 우리나라 제조업을 중화학공업화, 수출주도형으로 바꾸기 위하여 대규모 철강, 석유화학, 기계(방위산업 포함), 조선, 전자공업의 중점 육성책을 채택하였다. 이 무렵 건설업체들의 중동진출과 맞물려 우리 기술자와 기능공들은 전례 없는 활황기를 맞이하였다. 많은 한국인이 국내 합작투자와 해외 건설공사를 통하여 세계화의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다.

  ’79년까지 1인당 GNP는 1,546$, 수출은 147억$로 성장하여 대망의 1,000$와 100억$를 돌파하였다.
 

  여수석유화학단지는 국제적 규모로 추진되어 외국 대기업의 합작투자를 적극 권장하였다. 동시에 여수에 나프타를 원료로 대규모 비료(남해화학: 7肥)와 1,000t/d 메탄올공장 건설이 진행되었다. 우리는 일본측과 합작으로 대성메탄올을 설립하고 영국과 공장건설/차관계약을 맺었다.

  나는 역시 공장장으로서 충원과 훈련을 하고, 건설공사를 맡았다. 박정희대통령은 7비와 메탄올공장 합동기공식에 참석했었고 건설 중에도 불시에 우리 현장을 방문할 정도로 국책사업에 관심이 컸다.

  나는 신임 도지사(고건)에게 대통령의 관심이 큰 여수공단에 자주 들릴 것을 권했고, ‘76년 준공식에서 상공부장관(장예준)으로부터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처럼 나는 3-40대 10여년간 울산과 여수 메탄올공장의 건설, 운영을 맡았다. 건설기간에 현장에서 영국기술자들과 함께 일하고, 사택에서 그들과 가족의 숙식을 뒷바라지하느라 애쓰고, 또 운영기간에는 간부직원들과 함께 사택생활을 하며 갖가지 애환을 겪었다.

  유감스럽게도 제2차 석유파동에 의한 유가급등으로 원료로 나프타를 쓰는 일본과 한국의 메탄올/암모니아 공장은 천연가스를 쓰는 산가스국 공장에 비해 경쟁력을 상실하여 결국 폐쇄되고 말았다. 


  <에너지원다변화와 중동 LPG의 대량도입>
 
   

  ‘78/79년 제2차 석유위기로 메탄올공장은 나프타 대신 대체원료를 확보해야 하는 난제에 직면하였다. 조사결과 가능한 해답은 “중동LPG의 수입”이었다. 때마침 정부도 에너지난 해결책으로 에너지원 다변화(多邊化)를 추진하던 터여서 석유 외에 석탄과 가스를 대량 도입하는 방안이 제시되어 추진주체로 LNG는 한전, LPG는 대성메탄올이 지정되었다.
 

  대성메탄올은 새 회사를 창립하여 중동LPG의 수입을 위한 장기공급계약과 기지건설을 추진하였다. 이 무렵 국내정세는 ‘77년 카터의 주한미군철수 발표, ‘79년 10.26 박대통령시해, 12.12 쿠데타, ’80년 5.18 광주비극과 전두환대통령 취임, ‘83년 아웅산 테러 등 격동을 거듭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명은 정우에너지로, LPG 저장방식은 지상탱크에서 지하동굴로, 용도는 화학원료에서 민수용으로 바뀐 채 나는 기지건설을 총괄하였다. 이제 20년간의 공장생활을 끝내고 본사 임원으로서 프랑스측과 기술/차관계약체결, 대형 여수LPG수입기지 건설과 운영을 담당하였다.


  드디어 ‘82년부터 매년 대량의 LPG가 수입되어 다양한 민수용으로 공급되고, ’87년부터 한국가스공사(한전자회사)가 대량의 LNG를 수입하면서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가스시대”에 접어들었다.

  준공식에서 나는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극심한 불황기의 투자였기에 전남에서 열린 행사에 특별히 전대통령과 내무(노태우), 동자, 총무의 3장관이 참석했는데 경호실의 보안조치가 대단했다.
 

  ‘84년 회사 경영권이양을 계기로 나는 유공(현 SK)으로 옮겨 또다시 LPG도입사업을 추진하였다. 유공가스(현 SK가스)는 울산기지를 건설, ’88년부터 수입을 개시하여 현재까지 호유에너지(현 E1)과 더불어 매년 수백만톤의 LPG수입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나는 이렇게 10여년간 중동LPG의 대량도입을 위하여 여수와 울산의 대규모 수입기지를 건설, 운영하고, 그 경험을 국제회의에서 발표하였다. ‘80년대쯤 여러 동기생들은 기업임원, 또는 대학교수로 서울에 다시 모였다.  


  <마무리>
 

  나는 유공에서 한동안 석탄사업의 CWF(석탄-물 혼합연료)개발과 석유사업의 상압증류, 중질유분해 등 신증설사업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화석연료 중 가스를 위주로 하고 석탄과 석유 관련기술까지 조금 다뤄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러한 나의 경험과 자료를 바탕으로 몇권의 책을 펴냈다.

  “한국 메탄올공업의 역사”, “LPG도입 10년의 회고와 과제”, ”하류에서 상류로“(직장생활회고), 동기생 교수와 공저인 ”21세기의 에너지“, SK가스의 의뢰로 쓴 전문서적 “액화석유가스(LPG)" 등이다.

  이런 책을 쓰려면 상당한 기초자료가 필수적인데, 평소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일본인 선배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회갑 때 직장생활을 마감하고 ’97년말 산학연 합동으로 창립된 한국가스학회의 초대회장에 추대되었고, 전에는 화공학회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현재도 세계와 한국의 에너지, 특히 LPG의 수급자료 등을 꾸준히 모으고 있다.


 직장생활 30여년을 되돌아보면 성실히 협동하며 일했고 좌절도 겪었지만 보람이 더 컸다. 직장상사, 동료, 부하들은 모두 소중한 존재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과거 이런 우스개가 있었다. “나라 살림을 박정희 사장, 정주영 건설부장, 이병철 경리부장, 김우중 영업부장이 해나간다”. 한국은 세계 최빈국에서 ‘60-’70년대 정부주도의 경제개발로 중화학공업과 수출산업을 기반으로 중진국으로 발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우리 기술자들은 현장책임자로 작업복을 입고 열심히 뛰었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느낀다. 나는 박정희에게 투표한 적이 없지만 그는 분명히 ‘한강의 기적’을 주도한 국가적 지도자다.


  나는 화공과 동기회장으로 장기집권 중인데 특히 졸업30주년 기념앨범, 회갑기념 부부여행(캐나다), 입학50주년기념 부부여행(하와이)이 기억에 남는다. 현재 6명이 고인이 되었다. 

  • 은산님, 존경합니다.  서울대 화공과에 합격하면 천재란 말을 들었었죠. 더구나, 상주 시골에서....  은산님의 걸음걸음이 우리나라 산업화의 노정같아요. 사회과학 하는 사람은 이게 내가 한 거다 주장하기가 쉽지 않은데, 은산님은 그 족적이 뚜렸하니 보람을 느낄만합니다. 우리 교당에 이런 분이 계시다니 우리의 자랑입니다. 건강하시고 慧족족, 福족족하소서. 수산 | 09-03-14 19:14 | 댓글달기
  • 우리나라가 국민 소득이 2만달러 가 되고 중화학 산업 국가로 이만큼 부강하게 되것은 은산님 같은 실력이 있는 젊은 역군의 땀이라고 생각 합니다. 보람있고 큰 일을 했습니다.  존경 하고  감사하게 생각 합니다. 김경원 | 09-03-24 22:00 | 댓글달기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79 Fun 다음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79 Fun 다음
© ::: 희망분당 700 원불교 분당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