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택 2013-07-06 10:4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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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년 6.25 전쟁을 되돌아보다
김태문
얼마 전 6.25 전쟁발발 63주년이 지나갔다. 이제 우리나라에 6.25를 직접 보고 듣고 체험한 이들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아득한 옛날 내가 겪었던 그 전쟁을 되돌아보면 우리 가족은 결과적으로 인적 피해가 없었지만 큰 고비를 아슬아슬하게 넘겼다.
이 전쟁은 일어난 해의 간지(干支)를 따라 임진왜란(壬辰倭亂,1592), 병자호란(丙子胡亂,1636)처럼 이름 붙인다면 경인북란(庚寅北亂)이나 경인공란(庚寅共亂)으로 불릴 터이다.
<북한군의 6.25남침, 3개월의 공산통치,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당시 나는 15살로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우리 가족은 고향인 경북 예천과 서울 두 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서울 돈암동 집(성북구청 부근)에는 신혼의 누님 내외와 중4의 형님, 나, 어린 여동생, 그리고 중5의 4촌 누님이 있고, 고향에는 40대 중반의 부모님이 어린 3남매를 데리고 사셨다.
1950년 6월 25일은 일요일이었다. 새벽부터 38선 일대에서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무렵 38선 일대에서 종종 피아간 전투가 벌어졌고, 전년쯤 그런 전투를 소재로 한 반공극(反共劇) ‘육탄10용사(肉彈十勇士)’를 관람한 터여서 대개는 “또 터졌구나” 하는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것이 참혹한 전쟁의 서막인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북쪽의 치밀한 전쟁준비를 간파하지 못한 채 아무런 대비 없이 평소 “북진명령만 내리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고 헛소리쳤던 당시의 국군 수뇌부나 정부는 얼마나 얼빠지고 한심했던가?
북의 인민군은 15만 병력에 중국 팔로군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지휘관과 전투기와 탱크를 각200여대씩 가졌는데 남의 국군은 5만 병력이 1년 전 500명의 고문단만 남기고 철수한 주한미군으로부터 경무장만 인수하였으니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무방비상태였던 것이다.
더구나 얼마 전까지 북측의 제의로 북에서 투옥된 조민당수(朝民黨首) 조만식(曺晩植)선생과 남에서 투옥된 남로당 간부 김삼룡(金三龍), 이주하(李舟河)의 교환문제가 논의되어 한껏 평화적 분위기가가 무르익고 있었다. 전쟁준비를 숨기기 위한 북측의 위장평화공세였다.
서울은 개전 3일만인 28일 새벽 인민군에게 점령당하고 말았다.
나는 25일 오전 돈암교 부근 미아리고개를 넘는 큰 길에 나가서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로 위장한 여러 대의 트럭이 무장 군인들을 태우고 북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가슴 뿌듯이 바라보며 힘껏 박수를 쳤다.
26일(월)은 등교했다가 휴교조치로 이내 귀가했다. 나는 ‘49년 9월초 경기중학교(6년제)에 입학하여 9개월만인 ’50년 6월초에 2학년으로 진급한 지 한 달이 채 안 되었다.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여기저기서 승전 중이라는데 의정부쪽에서 피난민들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온다면서 동네가 술렁거렸다. 밤에는 멀리서 은은하게 “쿵-쿵-” 대포소리가 들려와 불안하기만 했다.
27일 우리는 이웃에 사는 당숙네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가기로 했다. 보따리를 싸들고 먼저 서울역으로 향하는데 인산인해를 이룬 시민들을 헌병이 제지하면서 귀가를 종용했다. 발길을 돌려 재동의 친지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밤에 비가 내렸고 이승만 대통령의 대국민 방송을 들었다. "맥아더장군 휘하의 미군이 곧 참전하니 국민들은 안심하라“는 요지였는데 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떠나고 녹음만 틀어준 거짓말이었다.
28일 새벽 멀리서 가끔 땅이 긁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더니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이 이미 서울을 점령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창경원 부근에서 낯선 복장에 다발총을 든 인민군 행렬과 함께 어깨가 쳐진 국군 포로들의 모습을 보았다. 난생 처음 그들의 육중한 탱크(북측은 “땅끄”라 함)도 구경했다.
그 뒤 가끔 학교를 오가며 창경원 앞을 지날 때면 서울의대 쪽에서 악취가 심했는데 구내에 쌓인 군인들 시체 때문이라 했고, 길가에 주저앉은 스리쿼터 차 밑에는 시신에서 흘러내린 구더기가 수북이 쌓였다.
이후 3개월간 서울은 ‘인민공화국(人共)’ 세상이 되었다. ‘서울시인민위원회’가 통치를 하는가 하면, ‘민청’(민주청년동맹)과 ‘여맹’(여성동맹) 등 단체가 설치면서 ‘반동분자’를 찾아 인민재판에 넘긴다고 했다. 고위공직자, 군인, 경찰관, 우익인사들은 가족까지 집에서 쫓겨나거나 잡혀서 생명이 위태로워졌다.
곳곳에 세워진 큼직한 남한 지도에는 7월말까지 계속하여 남쪽으로 내려가며 작은 적기(赤旗)가 꽂혀서 파죽지세로 남하하는 인민군의 기세가 나타났다. 도대체 고향의 우리 가족 다섯은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 지주이자 우익인사인 아버지가 걱정이었다. 자형과 4촌 누님도 각자 고향의 부모형제를 열려하였다. 전화는 아예 없고 우편도 끊겼으니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전란 중에 흔히 겪는 큰 고생은 식량난이다. 당시 서울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러 교외 농촌으로 나다니고, 예금이 있어도 은행문이 닫혀서 아끼던 패물이나 옷을 식량과 바꾼다고 했다. 우리는 다행히 전쟁 전에 쌀을 두어 가마니 사두어 고생을 면했는데, 식량난을 겪을지 모를 이웃 때문에 식사 때면 밥그릇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나는 7월 초순 방을 보고 등교하여 몇 백명의 학생들과 함께 화동의 높다란 교정에서 UN 공군기가 용산부근의 군사시설을 폭격하는 장면을 멀리 내려다보았다. 교실에서는 공습시 대피요령을 배우고, 강당에서는 그들의 국가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배웠다. 가사 중에 ‘원쑤’니 ‘붉은피’니 하는 섬뜩한 낱말이 들어있었다.
어느날 강당에서 색다른 행사가 벌어졌다. 먼저 낯선 학생이 등단하여 교장을 제치고 낯선 이를 새 교장으로 소개했는데, 그들은 형무소를 갓 나온 ‘붉은 투사’로 전에 경기중에서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투옥된 교사와 학생이었다. 사회자는 “영용한 인민군은 조국통일 성전을 수행하는데 우리만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모두 의용군으로 나가자”고 주장하고 “옳소”하는 응수와 “반대가 있는가?” 묻고는 ‘만장일치 가결’을 선포하였다. 강당에 있던 4학년(현재 고1) 이상 학생은 꼼짝없이 ’지원자‘로 붙들려갔다. 그 후로 4학년 이상은 학교에 얼씬도 안 했다.
경복중 4년생이던 형님도 학교에 갔다가 비슷하게 끌려가는 도중에 도망쳐 왔다. 그러나 7월 중순 기어이 큰 일이 났다. 밤중에 민간복장에 총을 멘 사람들이 들이닥쳐 집뒤짐을 하다가 나이 어리지만 키가 170cm인 형님을 데려갔다. 이튿날 수많은 의용군 징집자와 함께 하룻밤 머물었던 초등학교를 떠났다.
8월 15일에 북한당국은 서울에서 성대한 기념행사를 추진하였다. 아마 당초에는 남한의 적화통일 완성을 축하하는 행사를 꿈꾸었을 것이다. 나는 동네반장의 지시에 따라 인공기를 종이에 여러 장 그려 냈다. 그들은 서울시청의 큰 현수막과 사방의 벽보에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 만세”와 “영명한 김일성 수상 만세” 같은 구호를 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김일성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전쟁을 일으켰음을 자백하는 대목이 아닌가? 표면상 한국전과 무관한 쏘련 수상의 이름을 왜 내걸었는지? 전에 우리나라 신문에 양국 대통령 사진이 함께 나올 때면 이승만 다음에 트루먼이었는데 그들은 스탈린 다음에 김일성이었으니 감히 상전 앞에 나설 수는 없었나보다.
8월에는 숨어 지내던 자형이 가택수색으로 끌려갈 번한 위기를 넘겼다. 밤중에 들이닥친 이들은 젊은 남자가 없는지 묻고는 방마다 들여다본 뒤 다락에 올라가 잔뜩 쌓인 보따리를 조금 들쳐보다가 갔다. 그 밑에 숨었던 자형 못지않게 밖에서 누님과 나는 어린 동생이 불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면서 태연한 척했다.
8월 들어서 전쟁의 양상이 조금씩 바뀌는 듯했다. 거리에 세워진 지도에 표시된 인민군의 남하속도가 점점 느려지더니 어느새 지도가 슬며시 치워졌다. UN공군의 공습과 치열한 대공포사격이 잦아졌고, 기체가 먼저 보이고 소리가 뒤에 들리는 제트전투기가 처음 등장하였다. 초기에는 공습 때 경보 사이렌이 울리고 통행이 금지되었으나 차츰 서울보다는 북한으로 향하는 폭격기 편대의 고공비행이 밤낮 계속되면서 공습경보와 해제는 아예 없어졌다.
서울에 대한 폭격은 군사목표에 한정된 듯 우리가 살던 돈암동 방면은 안전지대였다. 자형은 가끔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몰래 라디오를 틀어 일어와 한국어로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듣고 희망적인 전황을 귀띔해주었다. 8월 말과 9월 초에 4촌 누님과 자형이 각기 부모형제를 찾아 고향까지 1주일쯤 걸릴 먼 길을 도보로 떠났다.
9월 중순쯤 밤에 멀리서 천둥 같은 “우르릉”하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차츰 더 커지고 낮에도 쿵쿵 울리는 포성으로 변했다. 바로 UN군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추석인 25일까지 서울이 수복된다는 소문이 났다. 하순에 포탄이 우리 머리 위로 “쉬잇”하며 날아가 “쾅” 터지는 소리와 밤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조명탄 발사가 잦아진 다음 드디어 28일 서울이 수복되었다. 나는 큰 길에서 시민들과 함께 북진하는 UN군의 낯선 행렬을 박수로 환영하였다.
당시.. 저는 부산까지 몇날 몇일이걸리는 피난열차 곡간(군수물자)차 지붕?위애서 아버지로 기억되는 사람이 열차아래로 몰려드는 밤장사로부터 삶은 밤 꾸러미를 총 개머리판에 걸어받아올려온것을 먹던 제일 처음의 기억(세살 때?)이 . . . 일도 | 13-07-06 20:28 | 댓글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