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경인년 6.25전쟁을 되돌아보다(하)

김인택 | 2013-07-09 08:13:43

조회수 : 2,339

<UN군의 북진, 중공군 참전과 1.4후퇴>

10월에 아버지가 자형과 함께 상경하여 우리는 그간 서로 몰랐던 안부를 듣게 되었다. 아버지는 장남이 의용군으로 끌려간 일에 크게 낙담하셨다. 그 동안 고향에서는 아버지와 외숙만 대구로 피신하고 남은 가족들이 교외에서 함께 피난살이를 했는데 9월 중순 어머니와 외숙모가 읍내 우리집에 들렀다가 후퇴하는 인민군과 추격하는 국군의 전투 틈바구니에서 유탄을 맞아 어머니는 손에, 가정부는 다리에 파편이 박히는 부상을 입었다고 했다.

얼마 뒤 나는 밭은기침과 신열 때문에 진찰을 받고 늑막염으로 옆구리에 고인 물을 빼고 나니 중증 폐결핵이어서 드러누웠다. 11월 중순 나는 아버지와 함께 트럭편에 조수석에 앉아서 이틀이나 걸려 대구까지 갔다. 전쟁 초에 폭파된 한강인도교 대신 마포 부근에 임시로 놓인 부교(浮橋)로 한강을 건넜다. 도중 유성의 여관에 하룻밤 묵으며 온천욕을 했는데 부근의 다른 온천장은 폐허가 되어있었다.

비포장의 경부국도(京釜國道)는 교량이 모두 폭격으로 무너져 임시로 고쳤든가 개울로 우회했다. 포화로 부서진 숱한 차량은 양편 논바닥으로 밀쳐져 나뒹굴었고, 가까운 건물에 숨겼다가 UN공군기에 박살난 인민군 탱크의 잔해도 곳곳에 보였다. 치열한 격전의 흔적이 역력했다.

예천은 벽지여서 서울을 오가려면 전에도 기차와 버스를 몇 번 갈아타야 했는데 당시에는 교통망이 다 망가지고 군수품 수송으로 붐벼서 대구를 거쳐 트럭으로 가는 길 밖에 없었다.

대구 이모댁에는 어머니가 와 계셨는데, 당시 예천에는 의사가 없어 돌팔이가 손바닥의 파편을 빼다가 출혈이 심해 급히 대구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이모는 군의관으로 징집된 이모부 대신 자녀를 돌보면서 한동안 사랑채를 친척들의 ‘피난수용소’로 내주고 숙식을 제공했다. 오랜 의사 부인의 관록으로 간단한 속병이나 외상에 대해서 직접 약을 지어주는 등 치료도 했다. 그곳에 우리 모자가 함께 ‘입원’해 있을 때 어머니가 갑자기 파상풍(破傷風)으로 죽음의 고비를 맞이하자 이모는 비상한 노력으로 의사와 혈청을 구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7월과 8월 중에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여 대한민국 영토가 부산-대구 정도만 남아서 국운이 풍전등화 같았는데 이번에는 인천상륙작전에 뒤이어 10월과 11월에 UN군이 기세 좋게 북진하여 평양과 원산을 점령하고 국군이 압록강에 도달하는 등 남북통일이 목전에 온 듯하였다. 그러나 뜻밖에 대규모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재역전되어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었다.

12월 하순에 ‘1.4후퇴’로 누님 내외가 여동생을 데리고 서울서 대구까지 피난하여 그곳에 합류하였다. 내가 이모댁 사랑채에 몇 달 머무는 동안 안채의 이종들과는 접근금지였고 이모는 몇 번 잉어곰을 끓여주고 어렵게 구한 스트렙토마이신 약20병을 주사해 주었다.

전시에 우리집은 인민군에게 징발되어 병원으로 쓰여서 가끔 간장, 된장만 갖다 먹었다는데, 어느날 UN공군기의 기관포탄이 사랑채와 안채 사이 장독대에 큰 구멍을 냈지만 건물은 파편이 박힌 것 말고는 말짱했다. 지주였던 우리집은 전쟁 직전에 토지개혁으로 농지를 대부분 수용당하여 이미 지주가 아니었지만 만일 당시에 한국이 공산화되었더라면 아버지와 우리가족은 ‘지주계급의 반동분자’로 몰려 어떤 운명을 맞이했을지 상상하기조차도 끔찍하다.


<지루한 휴전회담, 반공포로석방, 7.27 휴전>

‘51년 4월과 5월 한반도에서 UN군을 몰아내기 위한 두 번의 중공군 대규모 공세가 실패로 끝나자 양측은 지루한 국지적 진지전과 휴전회담을 2년 이상 끈 나머지 ’53년 7월 27일 38선 대신 휴전선을 경계로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그 무렵 전황(戰況)은 일진일퇴를 거듭했고, 예천에서는 한동안 신문도 없이 라디오로 청취한 뉴스를 등사판으로 만들어 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당시는 트랜지스터식 이전의 진공관식 라디오인데 그다지 흔치 않았다. 나는 ‘52년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사건과 정전회담반대 학생데모, ’53년의 반공포로석방 등 뉴스도 이렇게 접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으로 수백만의 사상자가 생기고 전국토가 폐허가 되었는데 그냥 전전(戰前)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북진통일’을 부르짖었다. 결국 휴전을 수락하는 대신 한미방위조약과 경제원조를 받아냈다.

나는 ‘51년 3월 대구에서 고향 집으로 돌아왔는데 집안 분위기가 아주 침울했다. 어머니는 완쾌했지만 장남은 행방불명, 차남은 폐결핵으로 기약없이 요양 중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뒤 2년간 집에서 칩거(蟄居)하며 대구에서 이모가 보내준 PAS(가루약) 2병과 한약 2재를 먹었다. 내가 4학년까지 다녔던 예천서부국민학교는 전시에 교사가 불타서 가건물을 지었는데 창문도 없고 흙바닥에 가마니를 깔았다. 동생들은 작은 앉은뱅이 책상을 집으로 가지고 다녔다.

나는 약1년간 쉬다가 부산으로 피난한 B등 경기중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학업에 대한 의욕이 되살아나 영수과목을 독학한 끝에 ‘53년 봄 예천농고 2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나는 6.25 전쟁으로 어머니를 잃을 번했고, 형님 대신 장남이 될 번했는데 천행으로 형님이 무사귀환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온 가족이 그의 안부를 몰라 애태우는 중에 뜻밖에 ‘51년 8월 형님의 편지가 군사우편으로 배달된 것이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지 13개월 만에 국군이라니? 뒷날 형님이 들려준 사연은 이렇다. 

그는 ’50년 7월 중순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바로 평양(20일간)을 거쳐 원산에서 3개월간 해군통신병 훈련을 받았다. 10월 초순 UN군이 북진함에 따라 압록강변의 강계를 거쳐 개마고원의 혜산진-백암-무산을 가로질러 상삼봉으로 이동하였다. 12월 거기서 육군으로 재편되어 청진 부근에서 북진하는 국군을 상대로 정찰분대로 나갔다가 추위와 허기로 빈집에서 잠든 새 국군에 포위되어 꼼짝없이 포로가 되었다.

그런데 포로를 심문해보니 분대장을 빼고는 모두 5개월 전까지 서울의 중학생이었고 그 중에도 형님은 17세로 가장 어렸다. 어쨌든 포로는 모두 수용소로 보내야 되는데 고참 상사가 형님만을 소대에 남겨두었고, 얼마 뒤 국군이 전면철수하게 되자 흥남에서 부대와 함께 수송선을 타고 묵호로 이동한 뒤 현지에서 입대하였다. 형님은 백골부대 기관총사수로 중동부전선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숱한 전투를 치른 참전용사의 일원이 되었다.

당시 형님보다 조금 뒤 7월 하순이나 8월에 의용군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거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진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어 다치고 죽거나 아니면 지리산 공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6.25 전쟁을 치르면서 예천까지 생겨난 몇 가지 현상이 있다. 야전식량인 C-레이션은 귀한 선물이었다. 속에 든 비스킷, 사탕, 햄, 가루주스 등은 얼마나 항과 맛이 좋던지. 작은 봉지에 든 까만 가루는 대개 맛이 쓰다고 내버렸는데 그것이 ‘커피’인 줄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전에는 냉면이란 음식을 들어본 적도 없는데 이북 피난민이 들어오면서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성탄절에는 교회에 많은 남녀노소가 모여 어린이 성극을 구경한 뒤 나눠주는 미국 구호품인 헌 옷을 받아갔다.

전쟁 초기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신속히 UN안보리의 침략격퇴 결의와 UN군 파견결정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와 우리 가족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단행되지 않았더라면 전세가 역전되었을까? 필경 북한은 당초 목표대로 1개월 안에 적화통일을 달성하고 우리는 엄청난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적절한 표현이 ’천우신조(天佑神助)‘가 아닐까? 또 중공군이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진작 통일이 되었을 텐데 당시의 국제정세가 이를 허용하지 않았으니 무척 아쉬울 따름이다.

3개월의 공산통치를 경험했던 나는 매년 6월 25일이면 <6.25의 노래>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6.25의 노래>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 역사와 생활의 사실을 실감있게 읽습니다.
    3호4호 계속기다립니다.
    이선조 | 13-07-14 12:58 | 댓글달기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79 Fun 다음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79 Fun 다음
© ::: 희망분당 700 원불교 분당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