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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번역본-은산김인택님 번역.

이선조 | 2013-11-09 15:31:15

조회수 : 2,552

I.  태평양전쟁과 국민-머릿말


I-1 말없는 백골(白骨)
  
  “앗 인골(人骨)이다” 나는 일순 숨을 멈췄다. 회중전등의 희미한 불빛이 캄캄한 동굴 한구석을 동그랗게 비췄을 때의 일이다. 2 내지 6cm 정도의 백골이 불빛 속에서 나타났다. 밑에 둥근 징을 박은 일본군 군화바닥과 빈 통조림 깡통 등이 널려있었다. 빈 깡통에는 3cm 사방의 구멍이 뚫려있다. 총검으로 열어서 먹은 흔적이다. 입구 가까운 곳에는 검댕으로 그을린 아궁이가 나란히 놓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원시인의 동굴생활상이 멈춰선 것 같은 모습이다.

  1981년(쇼와56년) 12월 20일 나는 이 <쇼와(昭和)의 역사> 시리즈의 저자들과 함께 오키나와( 沖繩) 본섬 남쪽에 가까운 가라비호(壕) 안에 서있었다. 전길이 약300m이나 되는 이 대동굴은 오키나와전 때 제24사단 제1야전병원의 분원(分院)이었던 곳으로 오키나와 현립(縣立)제2고등여학교 학생 하쿠바이타이(白梅隊)의 야전간호부와 부근 마을의 여자청년단원들이 부상자를 간호하고 있었다. 미군의 추격으로 병원이 해산될 무렵 못 걷는 환자를 <처치>(독살)하거나 위생병이 척살(刺殺)하는 등의 참극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작은 백골의 주인공은 어떻게 죽었을까? 아마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얼마나 원통했을까?
이런 사람들을 이런 곳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누구인가?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패배하고부터 36년 남짓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백골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여기는 가달카날이나 뉴기니아의 정글이 아니고 일본 국내가 아닌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노여움과 참을 수 없는 기분이 가슴에 벅차서 나는 어둠 속에서 머리를 숙인 채 동굴을 빠져나왔다.

  이튿날 21일 우리는 군민(軍民) 약4,500명이 옥쇄(玉碎)한 이에지마(伊江島)로 건너갔다. 여기는 최근 섬 이곳저곳에서 유골이 나왔기 때문에 82년 1월부터 본격적인 유골수습이 시작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82년 5월 10일의 NHK TV <뉴스센터9시>에 의하면 이 1년간 46구의 유체(遺体)가 발굴되었지만 아직 약1,000구가 방치된 채로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전후(戰後)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면 국민에게 커다란 참화를 가져온 태평양전쟁이란 무엇이었을까?


I-2 전쟁의 가해(加害)와 피해(被害)

  만주사변(滿洲事變), 일중전쟁(日中戰爭) 및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은 그것을 통틀어 15년전쟁이라 일컫고 태평양전쟁은 15년전쟁의 제3단계에 해당한다. 내가 세 전쟁을 <15년전쟁>이라 말하는 것은 전쟁기간이 햇수로 15년에 이르는 것을 뜻하는 동시에 거시적으로 보아 세 전쟁이 우연히 그리고 제각각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첫째 이유는 세 전쟁이 각각의 국면(局面)에서 지도자의 교체와 전쟁수행 정책을 둘러싼 동요, 망설임, 곡절이 있었지만 일본을 아시아에 군림(君臨)하는 세계 유일의 대제국(大帝國)으로 만들려는 일본제국주의의 일관된 침략의도를 바탕으로 수행, 확대되었고, 둘째는 앞선 전쟁이 빚어낸 모순이 새로운 전쟁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이 세 전쟁이 일련불가분(一連不可分)의 인과관계로 얽혀있었다는 점이다.

  일중전쟁은 일본이 체험한 최초의 국가총력전(國家總力戰)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은 한층 대규모의 국가총력전으로 싸웠었다. 하지만 최종단계에는 국토의 일부가 가열(苛烈)한 전장(戰場)이 되어 연일 공습이 계속되었다. 그 때문에 국민은 엄청난 참화를 당했다.

  정확한 숫자는 아직도 분명치 않지만 15년전쟁으로 잃어버린 인명은 약310만명. 그 내역은 전사(戰死)나 전병사(戰病死)한 군인, 군속, 준군속 약230만, 외지(=국외)에서 사망한 민간인 약30만, 내지(=국내)의 전재사망자(戰災死亡者) 약50만명이다. 이 중에서 만주사변과 일중전쟁 중 육군의 사망자는 30여만이었으니 태평양전쟁의 손해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특징적인 것은 태평양전쟁 사망자의 태반이 1944년 10월 레이테 결전(Leyte 決戰) 이후에 생겼다는 사실이다.

  거기다 더하여 일본은 아시아 제민족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손해를 입혔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朝鮮)과 대만(台灣)의 민중은 일본의 지배자가 제멋대로 시작한 침략전쟁에 무조건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 더하여 다른 아시아 제민족은 국토가 전장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 특히 국토의 주요부분이 전장이 되거나 점령지가 되어버린 중국에서는 군인 사상자 약4백만명, 민간인 사상자 약2천만명이나 되고, 필리핀에서는 군민(軍民) 합하여 10여만이 희생되었다. 기타 지역에서도 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상세한 것은 불명이다.
  그 밖에 일본군과 싸웠던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장병도 숱하게 쓰러졌다.


I-3 전쟁책임의 문제  
  
  그러면 이러한 피해와 가해라는 대참사는 누구에 의하여 일어났는가? 태평양전쟁은 현지 군부(軍部)에 의하여 시작된 만주사변과 일중(日中)전쟁과는 달리 천황(天皇)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지배층 상층부가 정규 수속을 따라, 천황이 출석한 어전회의(御前會議)를 비롯한 각종 회의를 거듭한 끝에 납득(納得)하여 개전(開戰)을 결의함으로써 시작된 것이다. 개전결정에 이르는 회의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보였지만 직(職)을 걸고 전쟁을 저지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본가와 지주 가운데서도 전쟁반대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또한 개전결정에 관여했던 제3차 코노에(近衛文麿) 내각과 토조(東條英機) 내각에는 국민의 선거에 의하여 뽑힌 각료는 한 사람도 없었다.

  전쟁종결(終結)의 경우에도 구성원의 교체는 있었으나, 스스로 전쟁종결 결정을 내린 것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지배층 상층부였다. 전쟁의 피해를 입은 일본의 민중과 아시아 제민족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천황 이하의 지배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 대하여 대부분의 민중은 농담(濃淡)의 차는 있지만 전쟁에 가담하고 협력하고 용감하게 싸웠다. 적극적 또는 소극적으로 전쟁에 반대한 사람은 적었고, 그들은 민중에 의하여 <비국민(非國民)>으로 불리었다. 더구나 많은 경우 상관이나 지휘자의 명령이라 하여 아시아 제민족에 대한 온갖 잔학행위를 한 직접 하수인은 대부분 민중이었다는 것도 지울 수 없는 사실이다. 환언하면 민중은 일면에서 피해자임과 동시에 타면에서는 민족적 가해의 일단을 담당했던 것이다. 평화의 시대에 착한 아버지, 착한 형제로 평온한 생활을 보내던 사람사람이 제국주의나 군국주의 사상에 붙잡혀 일단 전장에 가서는 마성(魔性)의 인간으로 표변한다는 거기에 전쟁이 가진 무서움이 있다.

  밟힌 발의 아픔은 밟힌 사람 밖에는 모른다고 한다. 아마도 자기의 타인에 대한 가해(加害)를 인정하기는 괴로운 일이고, 또 가해를 자각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쟁이 항상 피해와 가해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이 두 가지 측면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런 사실은 모두 일본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연합국군이 일본 군민(軍民)에 게 행한 숱한 잔학행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면 나는 전쟁의 전개과정을 충실히 따라 가면서 그 안에서 피해와 가해의 양면성에 유의하여 태평양전쟁의 실상을 추적하려고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한 이 비참한 대전쟁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생겨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I-4 태평양전쟁이란 호칭에 대하여

  개전 직후인 1941년 12월 10일 타이홍에이(大本營)-정부 연락회의는 이번 전쟁을 “지나사변(支那事變)을 포함하여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이라 호칭한다”라고 결정했다. 그것은 무엇보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건설>이 일본의 적극적 전쟁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시아를 백인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해방하여 일본을 맹주(盟主)로 하는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한다는 슬로건은 실제로는 일본이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침략하기 위한 슬로건으로 기능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침략을 미화(美化)하고 긍정하는 <대동아전쟁>이란 호칭은 써서는 안 된다.

  한편 일미(日美=일본과 미국)전쟁은 미국에 의하면 분명히 태평양전쟁이었다. 전쟁종결  후인 ‘45년 12월 15일 연합군최고사령부(GHQ)는 이른바 국가신도(神道)에 관한 지령을 발하여 <대동아전쟁>이나 <핫코이치우(八紘一宇)>등 군국주의와 ‘긴밀하게 결합된’ 어귀(語句)를 일본의 공문서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 때문에 태평양전쟁이란 호칭이 일반화하여 교과서의 기술도 이것으로 통일되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란 호칭의 난점(難點)은 이 전쟁을 일미전쟁 중심으로 보아 일본과 중국, 또는 일본과 동남아의 전쟁으로 보는 관점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경향에 빠지기 쉽다는 점에 있다. 그 때문에 이 전쟁의 호칭에 관해서는 전후 때때로 논의가 되풀이되어 왔다.

  이 책은 1982년 간행된 원판의 복간(復刊)이란 형식을 지키기 위해 태평양전쟁이란 호칭을 쓴다. 그러나 나는 원판간행 후 ’85년 8월 최초 제창자인 후쿠시마(副島昭一)의 발언을 배워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새로운 호칭을 제창했다. 그것은 이 전쟁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및 태평양을 전장으로 하고 제2차세계대전의 일환으로 진행된 전쟁이고, 일본이 미영불란(美英佛蘭=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열강만이 아니라 아시아 제민족과 소비에트를 상대로 싸운 전쟁이라는 것을 밝히고, 또한 일본이 일으킨 무모한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의 뜻을 담아 이 전쟁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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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석
2013-10-19
18:03:02
크게보기 나에게는 이야기의 시작부터 흥미 진진한 것들일세. 지난 과거를 어떻게 일본학자들이 해석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포인트이기 때문이다. 따로 태평양 전쟁이건 대동아전쟁이건 혹은 제2차세계대전이건 일본이 구상하고 바라던 세계를 실현하려는 "그들의 理想" 때문에 벌어진 참사고 어마어마한 인류의 손실을 만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나의 중앙대학교 정외과 출신 제자 李炯哲, 현 나가사키 단기 대학 교수)가 고베대학에가서 이오기배 교수 밑에서 이 15년전쟁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동경에서 그 책을 출판했다. 한 가지 누가 책임이 있고 누가 어떤 과정에서 시작했건 천황의 입장은 특별히 미국 정부의 이해관계 때문에 결국 지금의 천황중심의 군국주의가 다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점은 미국의 점령정책의 가장 커다란 실패라고 생각된다. 맥아더 사령관이 조금더 깊게 그리고 멀리 생각해서 일 했어야 했던 것 같다. 나를 가르친 로버트 워드 교수도 점령당시 미국의 대 일본 국민에 대한 인도주의적이고 박애심을 가진 생각 때문에 지금 반성할 줄 모르는 일본의 지도자를 낳게 한 것 같다. 참 안타갑다. 언제 일본이 또 다시 깊은 반성의 기회를 갖게 될지 두고 볼 일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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