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태평양전쟁 2-번역본

이선조 | 2013-11-09 15:44:29

조회수 : 2,690

키사카의 <태평양전쟁>-(2)
김태문 10-21 06:16 | HIT : 262
II. 서전(緖戰)의 승리


II-1 운명의 12월 8일

<기동부대(機動部隊) 출격하다>
  북국의 겨울밤은 늦게 밝는다. 미나미치시마(南千島)의 에토로후섬은 밤의 장막에 가려져 있다. 복동에서 남서로 가늘고 길게 뻗친 이 섬의 중앙 남쪽에 히토가쓰부만(單冠灣)이 있다. 혹카이도(北海道)의 네무로(根室) 북동으로 해상 약250km의 지점이다. 4일 전부터 갑자기 만내를 꽉 채워서 섬사람들을 놀라게 한 대함대(大艦隊)는 조용히 닻을 올려 바람이 센  북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헤치며 뒤이어 모습을 감추었다. 때는 1941년(쇼와 16년) 11월 26일 오전 6시. 이 대함대야 말로 아카기(赤城), 카가(加賀), 소류(蒼龍), 히류(飛龍), 쇼카쿠(翔鶴), 즈이카쿠(瑞鶴) 등 6척의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전함 히에이(比叡)와 키리시마(霧島) 2척, 중순양함 토네(利根)와 쓰쿠마(筑摩) 2척 등 31척으로 구성된 제국해군 최정예의 기동부대였다. 말할 것도 없이 목표지는 하와이의 진주만이었다.
  
  기동부대의 기함(旗艦) 아카기에는 제1항공함대사령관 나구모추이치(南雲忠一) 중장이 타고 있었다. 1887년 야마카다현(山形縣) 요네자와에서 태어난 나구모는, 수뢰전술(水雷戰術) 전문으로 항공분야의 경험이 적었지만 기동부대를 이끌고 개전벽두(開戰劈頭)의 대작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나구모는 하와이 진주만 공격에서 대성공을 거두어 용장으로 칭송을 받았으나, Midway 해전에서 참패함으로써 비운(悲運)의 제독이 되고, ‘44년 7월에는 결국 Saipan섬에서 옥쇄로 끝났다. 개전 후 나구모 제독이 그린 궤적(軌跡)은 그대로 대일본제국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기동부대가 출격하던 같은 11월 26일 워싱턴에서는 Cordell Hull 국무장관이 이른바 Hull Note라는 미국의 신제안을 노무라(野村吉三郞) 주미대사에게 건넸다. 그것은 일본군의 중국, 만주(滿洲, 중국동북) 및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로부터의 전면철수를 요구하고, 만주국의 존재를 부인하는 매우 가혹한 내용이었다. 일본측은 이 Hull Note를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으로 받아들여, 12월 1일의 어전회의에서 12월 8일의 개전을 최종적으로 결정하였다. ‘41년 4월 16일부터 워싱턴에서 이어져온 일미교섭(日美交涉)은 드디어 암초에 올라서 일미관계는 파국의 때를 맞게 되었다.

<토라토라토라>  
  오늘날 나가사키현 관광명소의 하나가 된 서해교(西海橋) 위에는 북쪽방향으로 3기의 무선탑이 보인다. 1923년에 해군이 건설한 이 132m의 탑이야말로 전시 중 몇 통의 극비전보를 받고 보낸 역사의 증인이다. 12월 2일 히로시마만에 떠있는 기함 나가토(長門)에 있는 연합함대사령부는 나구모기동부대에 대하여 “니이타카야마노보레(新高山 오르라)1208”이란 암호를 탑을 통하여 타전하였다. 신고산(新高山, 현재명 玉山)은 대만의 최고봉으로 그 의미는 12월 8일 오전 0시를 기하여 전투행위를 개시하라는 것이다.

  기습공격은 은밀 행동이 절대적 조건이다. 기동부대는, 보통의 상선항로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에토로후섬으로부터 정동쪽으로 항해하다가 이 암호전보를 수신하고는 4일부터 진로를 남남동으로 바꿔 전속력으로 진주만이 있는 Oahu섬으로 접근하였다. 그 사이 기동부대는 미국태평양함대의 전함들이 진주만내에 정박 중이라는 정보를 토쿄의 군령부로부터 무전으로 받았다. 그래서 7일에는 야마모토이소로쿠(山本五十六) 연합함대사령관에 대한 칙어(勅語)와 기동부대 전장병에 대한 야마모토사령관의 격려사가 전달되어 장병의 사기는 더 한층 높아졌다.

  그 무렵 승원 2명의 특수잠수정(特殊潛水艇) 1척씩 실은 이호(伊號)잠수함 5척이 미드웨이섬의 훨씬 남쪽으로 돌아서 직선으로 진주만 가까이 갔다. 이렇게 하와이작전에 참가하는 공격함대는 모두 은밀한 가운데 태세를 갖추었다.

  날이 밝으면 운명의 12월 8일. 일본시간 오전 1시30분(하와이시간 12월 7일 오전 6시), 오아후섬 북쪽 230해리의 바다 위로부터 기함 아카기의 비행대장 후치다(淵田美津雄) 중좌가 거느린 183기의 제1차공격대가 발진하고, 뒤이어 1시간30분 후에 167기의 제2차공격대가 날아올랐다. 어느쪽이나 ‘레이시키(零式)’ 함상전투기(艦上戰鬪機), 즉 ‘레이센(零戰)’의 호위를 받는 99식함상공격기와 99식함상폭격기로 이뤄진 공격대였다. 오아후섬 상공에 도달한 후치다 중좌는 전함이 진주만 내 Ford섬 동쪽에 2열종대로 나란히 정박하고 있음을 쌍안경으로 확인한 다음 오전 3시19분(하와이시간 7시49분) 제1차공격대에 대하여 “토토토----”라는 “토연송(連送)”의 약호로 “전군(全軍)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제1차공격대는 전함군(戰艦群)과 지상의 군사시설을 노려 쇄도했다. 오전 3시22분 후치다 중좌기로부터 “토라토라토라”란 암호가 타전되었다. 천리를 정복하고 돌아온다는 토라(=호랑이)를 본뜬 “우리 기습에 성공함”이란 의미였다. 이날 미국에서는 12월 7일 일요일로 미군은 완전히 뜻밖에 당한 것이다. 공격개시로부터 5분도 되기 전에 미군의 일부 대공포화가 응전하기 시작했지만 압도적인 일본기 앞에는 소용이 없었다.

  제1차와 제2차 공격대의 전과는, 격침한 전함 4척(Oklahoma, Arizona, California, West Virginia), 격파한 전함 4척(Tennessee, Maryland, Nevada, Pennsylvania)과 순양함 3척 등 외에 파괴한 비행기 231기, 사상자는 군인 3,681명, 민간인 103명에 이른 데 대하여 일본측의 손해는 비행기 29기와 특수잠수정 5척 만이었다. 미국측에서 행운이었던 것은 2척의 항공모함이 대양에 있느라 파괴를 면하고, 연료탱크와 공창(工廠) 등 군사시설의 손해가 가벼웠던 점이다. 또 Oklahoma와 Arizona를 제외한 6척의 전함은 뒤에 인양되어 복구공사가 실시되어 전투에 참가했다.

<속여서 공격했다는 오명(汚名)>  
  같은 8일 일본군은 Malay반도, 홍콩, 필리핀에 대해서도 공격을 개시했다. 진주만공격 약1시간 전인 오전 2시25분 일본군은 영국령 말레이반도의 Kota Bahru에 적전상륙했다. 뒤이어 중국파견군의 일부는 홍콩을 항해 진격을 개시하고, 대만 남부의 기지를 날아오른 항공부대는 필리핀 Luzon섬의 기지를 급습하여 미군기에 괴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기습공격은 모두 성공하여, 작전은 일본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태평양전쟁의 불쏘시개에 불이 붙었다.

  일본의 최후통첩은 진주만 공격개시 30분 전에 노무라 대사와 쿠루스(內栖三郞) 대사가 헐 국무장관에게 제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워싱턴 일본대사관의 서툰 일처리로 양대사가 Hull 장관에게 그 문서를 건넨 것은 공격개시보다 약1시간 뒤였다. 이미 공격개시를 알고 있던 헐 장관은 두 사람에게 의자도 권하지 않은 채 장관실의 큰 시계를 쳐다보며 시간을 확인한 다음 흥분한 어조로 “50년의 공직생활을 통하여 이처럼 왜곡과 허위에 찬 문서를 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일본은 “비겁하게 속여서 공격했다”는 오명을 영원히 듣게 되었다.


II-2 국운을 건 결단
     (생략)

II-3 넓어지는 점령지역

<말레이 근해 해전>
  일본군의 남방작전(南方作戰)은 먼저 Malay반도와 필리핀을 제압하고, 이어 동서로부터 가위질하는 것 같은 형태를 취하면서 Borneo, Celebes, Sumatra 등 섬을 공략하고 최후에 동서 양측에서 Java섬에 상륙하여 이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남방군<사령관 테라우치(寺內壽一) 대장>과, 제2함대 기간(基幹)을 주대로 하는 남방부대<사령관 콘도(近藤信竹) 중장>가 협력하여 작전에 임하기로 하였다. 서전 최대의 목표는 싱가포르를 공략하는 것으로, 일본군이 진주만 공격에 앞서 말레이반도의 코타바루에 적전상륙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기 대하여 영국측의 당면과제는 동아시아에 있는 식민지배의 거점인 홍콩과 싱가포르(Singapore)를 방위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홍콩은 일본이 남북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진주를 강행한 뒤에는 일본 세력권의 훨씬 후방에 남겨져 방위가 곤란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으로서 믿을 방위망은 Malay반도와 Singapore의 방위를 맡은 동양함대와 극동군이었다.

  12월 8일 저녁 영국 극동함대사령관 Sir Thomas Philips 중장은 기함 Prince of Wales에 앉아 순양전함 Repulse와 구축함 4척을 거느리고 싱가포르를 출격하였다. 배수량 35천톤의 전함 Prince of Wales는 갑판과 함측을 몇 겹의 장갑판으로 쌌고, 1분간 6만발을 쏘는 대공포화를 장비하여 자매함 King George V와 함께 ‘불침(가라앉지 않는)전함’으로 불리는 최신예함이었다. 그런데 Malay반도의 영국기(機)는 개전 이래 3일에 걸친 일본기의 공격을 받아 괴멸상태에 빠져서, 출격하는 동양함대를 호위할 수가 없었다.

  12월 10일 사이곤과 그 주변기지로부터 발진한 해군의 99식육상공격기와 1식육상공격기로 이뤄진 75기의 공격대가 말레이반도 동해안 중앙부의 Kuantan 근해를 항해 중인 영국동양함대를 만나서 습격하였다. 동양함대의 대공포화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격투 1시간8분만에 Repulse가 격침되고, Prince of Wales도 2시간5분 뒤에 해저로 자취를 감췄다. 키가 작아 ‘Thumb dome'이란 애칭으로 불리던 Philips제독은 퇴함을 권하는 부하의 말을 듣지 않고 기함과 운명을 함께 했다.

  일본의 손해는 3기에 불과했다. 남지나해의 제해권과 제공권은 일본군의 손에 돌아가 싱가포르는 벌거벗은 형국이 되었다. 처칠 수상은 ‘제2차대전회고록’에서 이 비보(悲報)를 들었을 때의 일을, “전쟁 전기간을 통하여 나는 그 이상 직접 충격을 받은 적이 없었다, 인도양에도 태평양에도 영미(英美)의 주력함은 한 척도 없었다”고 적었다.

  말레이 근해 해전은 세계 해전사상(海戰史上) 항공기만으로 항해 중인 전함을 격침한 최초의 예이고, 항공기의 호위를 받지 않는 전함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분명히 실증하였다. 그것은 또한 항공기, 특히 기동부대가 이제부터 해전의 중심이고,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는 과거의 것이 되었음을 보였다. 승리 가운데서 교훈을 배우기는 정말 어렵다. 말레이 근해 해전의 의의를 십분 이해하지 못했던 일본해군은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홍콩, 싱가포르 점령>
  Malay 근해 해전과 같은 12월 10일 일본군은 미국령 Guam섬과 Gilbert제도 북부의 Makin, Tarawa 양섬을 거의 무혈상태로 점령하였다.

  육상으로부터 홍콩 공략을 노리는 제23군<사령관 사카이(酒井隆) 중장>은, 12월 13일 구룡반도를 제압 뒤 18일 밤 홍콩섬에 기습상륙을 감행하여 섬의 북동부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지형과 견고한 요새를 이용하여 영국군이 완강하게 저항한 탓에 대본영은 초조한 빛이 보였지만 25일 X-mas 저녁에 영국군이 항복하여 홍콩작전은 싱겁게 끝났다.

  서태평양의 중요기지인 Wake섬에 대해서는 제24항공전대가 Truk섬과 Kwajalein섬에서 3일간 폭격을 거듭한 뒤 12월 11일 조조 육전대가 상륙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런데 고스란히 남았던 3개 포대와 그루만(Grumman) 전투기 4기의 반격을 받아 구축함 2척 침몰, 구축함 2척과 수송선 1척 소파, 사상자 408명의 손해를 입어 상륙작전을 중지할 수 밖에 없었다. 연합함대사령부는 하와이공격에서 귀로에 오른 나구모 기동부대에게 Wake섬 지원을 명했다. 제2항공전대의 공모(空母) 소류와 히류 등이 응원하러 달려가 12월 23일 드디어 Wake섬을 점령했다. ‘42년 1월 22일 일본은 이 섬을 <오토리시마(大鳥島)>로 명명했다. 그러나 제1차전에서 격침된 구축함으로부터 해군의 암호서를 건져낸 줄을 일본측은 알 까닭이 없었다.  

  여기 비하여 말레이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제25군<사령관 야마시타(山下奉文) 중장> 소속의 제18사단은 코타바루 상륙 후 말레이반도 동해안을 남하하여 12월 31일 콴탄을 점령하였다. 제5사단은 12월 8일 말레이반도 태국령 Songkhla와 Pattani에 상륙, 반도를 횡단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한 뒤 철도를 따라 전진하여, 이듬해 ‘42년 1월 11일에 Kuala Lumpur에 돌입하였다. 개전과 함께 캄보디아에서 태국으로 진주한 근위(近衛)사단은 태국을 통과하여 제5사단을 뒤쫓듯이 진격하여 서해안을 따라 남하를 계속하였다. 최후에 3개 사단이 합류하여 1월 31일에는 Johor주 주도 Johor Bahru를 점령하였다. 제25군은 송클라에서 조호바루까지 약1,100km를 55일간 1일 평균 약20km의 속도로 진격하였다. 한편 그 사이 교전횟수는 95회(1일 평균 약2회), 주된 교랑수리 250, 주정(舟艇)에 의한 해상기동 650km나 되었다.

  당시 Singapore섬은 동양 제1의 대요새라고 알려졌다. 하나 실제로는 섬 북동에 Seletar 군항이 있고, 군항을 지키는 Changi 요새의 대포는 바다를 향하여 설치되어 있을 뿐이어서 섬의 북서쪽에서 상륙해 오는 일본군을 막는 진지의 구축이 불충분했다. 2월 8일 야반부터 제25군은 일제히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영국군도 저항을 거듭하여 특히 Bukit Timah 고지를 둘러싼 공방은 최대의 격전이었다. 그러나 2월 15일 힘이 다한 영국군은 항복하고, 싱가포르는 일본의 세력권에 들어왔다. 대본영-정부 연락회의는 싱가포르를 ‘쇼난토(昭南島)’로 명명했다.
  
<필리핀 작전>        
  필리핀 작전계획은 개전과 동시에 항공격멸전을 결행한 뒤 제14군<사령관 혼마(本間雅晴) 중장>이 Luzon섬에 상륙하여 단번에 마닐라를 제압하여 승패를 가를 셈이었다.

  일본군을 맞이한 미국 극동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중장은 1880년생 61세. West Point(육군사관학교)를 수석(평균점 98점)으로 졸업하고, 이례의 승진을 계속하여 5년간 참모총장을 지낸 뒤 1935년 필리핀 군사고문이 되었다가, 태평양전쟁 개전 반년 전에 현역에 복귀하여 필리핀 방위의 임무를 맡았다. 아시아 제일주의를 신조로 하는 그는, 극동육군의 충실화를 여러번 본국에 요청했으나, 유럽 제일주의를 취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군부수뇌는 맥아더의 요청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극동육군은 총병력 15만(그 중 12만은 필리핀군), 폭격기 74기, 전투기 175기 등을 가지고 준비부족인 채 개전을 맞았다.

  맥아더는 마닐라 시간 12월 8일 오전 3시40분에 진주만이 습격당한 것을 알았지만 오전 10시 경까지 일본측이 심한 타격을 받았을 것으로 믿었다. 게다가 마샬(George Marshal) 참모총장한테서 "최초의 1발을 일본이 쏘게 한다“고 지시받은 일과, 레이센(零戰)의 항속거리(약2,200 km, 기름탱크 부착으로 3,300 km)를 과소평가하여 대만으로부터 레이센의 호위를 받는 육상공격기에 의한 공습이 있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하는 등 미국-필리핀군의 대응은 기선을 빼앗겼다.

  대만을 출발한 제11항공함대<사령관 쓰카하라(塚原二四三) 중장>의 공격대(九六式陸攻, 一式陸攻, 零戰 등)는 개전부터 3일 연속의 공습으로 미군기의 태반을 격파하였다. 여기 호응하여 12월 10일에 제48사단의 일부가 루존섬 북부 3개소에, 12일에 제16사단의 일부가 섬의 남부에 각각 상륙한 다음 22일에 제48사단 주력이 Lingayen만에, 24일에는 제16사단 주력이 Lamon만에 상륙하여 마닐라를 남북으로부터 협격(挾擊)하였다.

  여기 대해여 맥아더는 마닐라를 “비무장도시”로 선언하고, 사령부를 마닐라만 입구의 코레히도르(Corregidor)섬으로 옮기는 한편 주력군을 Bataan반도로 이동하여 저항한다는 작전을 택했다. 이 때문에 제14군은 ‘42년 1월 2일 손쉽게 마닐라를 점령했으나 도시 공격에 지장을 받아 미국-필리핀군의 주력을 격멸하지 못하였다.
  
  바탄반도에 틀어박힌 맥아더군은 산악지대와 정글을 교묘히 이용하여 견고한 2중의 진지를 구축해 놓았다. 봉쇄에 의하여 붕괴를 기다릴까 힘으로 압도할까 두 가지 작전이 생각되었지만 체면을 중시한 대본영과 제14군은 후자를 택했다.

  1월 9일부터 공격을 개시한 제14군은 각지에서 치열한 저항을 받아 고전하게 되고, 장병은 보급곤란에 의한 굶주림과 말라리아와 뎅기열에 시달렸다. 2월 8일 드디어 제1차공략전은 실패로 끝났다. 약2개월의 준비 후 제14군은 한편으로 4월 3일부터 제2차공격으로 바탄반도를 공략하고, 한편으로 Cebu섬, Panay섬, Mindanao섬 등을 점령했다. 5월 6일 일본의 상륙부대와 격전을 치른 뒤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던 코레히도르 수비대가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필리핀 작전이 끝났다.

  그러나 코레히도르섬에는 맥아더 중장의 모습은 없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을 받은 그는 3월 12일 막료와 가족과 함께 어뢰정으로 섬을 탈출하였다. 호주에 도착한 맥아더는 “미군의 최대 목표는 필리핀의 구원에 있다. 나는 왔지만 반드시 돌아간다”라고 기자단에게 말했다. <회상기(回想記)>에서 "나는 돌아온다, I shall return"이라고 무심히 말했다지만 그것은 수재이자 볼품을 찾는 그의 멋진 세리프였다. 이 말은 연합국 국민들의 갈채를 받았고, 필리핀 탈환은 맥아더만이 아니라 대국 미국의 위신이 걸린 공약이 되었다.

<난인(蘭印=和蘭領印度-Dutch Indies), Burma, 인도양 작전>
  남방작전의 최대 목표는 난인(蘭印=和蘭領印度-Dutch Indies의 약칭, 현재의 인도네시아)의 석유와 기타 자원의 확보였다. 말레이, 필리핀 두 작전이 예상보다 순조로이 진행되자 화란령 인도차이나 작전은 ‘42년 1월 중순부터 제16군<사령관 이마무라(今村均) 중장>과 남방부대에 의하여 수행되게 되었다.

  1월 11일 육군이 화란령 Borneo섬의 Tarakan을, 해군이 Celebes섬의 Manado 부근을 공격하여 작전의 불을 붙였다. 마나도 부근에는 이틀에 걸쳐 해군공정대(空挺隊) 3개 중대(418명)가 강하(降下)했는데 이것은 일본에서 최초의 낙하산부대의 사용이었다. 그 후 제16군은 셀레베스와 보르네오 두 섬 각지를 점령하고 Java섬 상륙을 준비하였다. 싱가포르 점령 전일인 2월 14일에 육군도 질 새라 강하부대(339명)가 Sumatra섬의 Palembang에 기습 강하하고 또 15일에도 90명이 강하하여 수마트라 최대의 유전지대를 제압했다.
                
  남은 것은 Java섬 만이다. 자바해에는 연합국 함대인 화란(경순* 2, 구축함 2), 미국(중순* 1, 구축함 4), 영국(중순 1, 구축함 3), 호주(경순 1)의 14척이 있었지만 1월 27일~28일의 Surabaya 근해 해전과 2월 28일~3월 1일의 Batavia(현 Jakarta) 근해 해전에서 미국 구축함 4척을 뺀 전함정이 모조리 일본 제2함대 중순*인 나치(那智), 하구로(羽黑), 모가미(最上), 미쿠마(三隈)와 수뢰전대(水雷戰隊)의 함포사격과 어뢰에 의하여 격침되었다.
(*주: 중순=重巡洋艦, *경순=輕巡洋艦)

  3월 1일 제16군은 3개소에서 자바섬에 상륙하여 순식간에 수라바야와 바타비아 등을 점령했다. 3월 5일 전의(戰意)를 상실한 화란과 4개국 연합군은 항복하고, 제16군은 육군기념일인 3월 10일 반둥에 입성하였다.

  Burma(현 Myanmar)작전을 담당한 제15군<사령관 이이다(飯田祥一郞) 중장>은 1월 20일 태국과 버-마의 국경을 돌파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여기서도 작전은 예정대로 진행되어 3월 8일 제15군은 랑군을 점령하고, 이어 5월 말까지 인도 국경에 가까운 해안의 요충 Akyab에서 북부 버-마에 이르는 지역을 수중에 넣고, 일부부대는 Salween강 상류에서 중국의 윈난성(雲南省)에 돌입하였다.

  그 사이 New Guinea 방면에서는, 1월 23일 New Britain섬의 Rabaul을 점령하여 견고한 전진기지를 만들고 3월 8일에는 뉴기니아섬 동부 북안의 Lae와 Salamaua를, 인도양 방면에서는 3월 하순 Andaman과 Nicobar 두 제도(諸島)를 각각 점령하였다.

  한편 하와이 작전을 마치고 귀국한 기동부대는, 쉴 틈도 없이 남방으로 출격하여 2월 19일 호주 북서부 요충 Port Darwin을 급습하여 육상시설과 선박에 대타격을 주었다. 이어서 인도양에 진출한 기동부대는 4월 5일 Ceylon(현 스리랑카)섬의 상업항 Colombo를, 9일에는 군항 Trincomalee를 각각 공습하여 영국의 소형 공모* Hermes와 중순* 2척 외에 수송선 3척 등을 격침하였다. 그러나 4월 18일 미군기에 의한 첫 일본본토 공습을 계기로 태평양방면의 전국(戰局)이 중대화하고, 그 뒤 연합함대는 인도양에서 작전을 전개할 수 없게 되었다. 그 때문에 증원함대를 파견한 영국은 인도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본은 개전 후 반년 간은 동쪽의 뉴기니아에서 서쪽의 Burma, 남쪽의 Java섬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제1단계 작전은 Wake섬 공략과 필리핀의 Bataan반도 작전을 제외하고는 대본영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진행되어 일본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수렁이 이어지는 중국전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도 육군의 주전장(主戰場)은 여전히 중국이었다. 그것은 개전시 남방군이 약11개 사단인데 대하여 중국파견군은 21개 사단, 1 기병집단, 20 혼성여단의 대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런 상태는 태평양전쟁 전기간을 통하여 기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41년 1월 16일의 대본영 육군부회의에서 책정된 <대중국 장기작전지도계획>에 의하면, 동년 가을까지는 “대중국 압력을 늦춤이 없이”, 그 이후는 “장기 지구전태세로 바꾸어, 수년 후가 되기까지 재중국 50만 체제를 확립함”이라고 하고, “작전은 치안유지, 점거지역의 숙정(肅正)을 주목적으로 하고, 대규모 작전은 행하지 않음”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파견군은 병력을 점차 줄이는 방침에 저항하여, 9월~10월에 제11군<사령관 아나미(阿南惟幾) 중장>이 제1차 창샤(長沙)작전을 수행하는 등 늘 대작전의 실시를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그러나 창샤작전은, 일단 창샤를 점령하였으나 중국군의 반격을 받아 제11군은 고전하면서 반전하여 원래의 점령지로 되돌아갔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아나미 중장은 홍콩작전에 호응하기 위하여, 허가받은 작전 범위를 독단으로 일탈하여 약3개 사단병력으로 재차 창샤를 점령하려고 결의하였다. 12월 24일 행동을 개시한 제11군은 ‘42년 정초에 챵샤의 한쪽에 돌입했으나 중국군의 측면 협격에 의한 퇴로차단 공격을 받아 악전고투 끝에 1월 15일 옛 점령지로 철퇴하였다.
  제2차 창샤 작전의 사상자 약5,500명은, 필리핀 작전의 약 11,000명에 비하면 적지만, 홍콩 작전의 약2,100, Malay반도 작전의 약3,800, Singapore 작전의 약5,100, Java 작전의 약960명 등 어느 것보다도 많다.

  대본영이 대규모작전을 수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도, 이와 같은 사상자가 생긴 것이다. 이것은 태평양전쟁 가운데 중국전선의 비중의 크기와 전황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크게보기
윤정석
2013-10-21
09:15:58
크게보기 아침에 일어나보니 이미 태문의 긴 글이 6시 좀 넘어서 실었더군, 그것 잘읽고 재미 있게읽었는데 일본이 한참 전세를 올릴 때 우리는 막 1학년생이어서 당시에 좀 들은 이야기를 기억나게 합니다. 먼저 글에 싱가포르 함낙했다는 소식에 서울의 수송국민학교에서는 학생에게 소프트 정구공을 하나 씩 나누어 주었다는 것을 기억 할 수 있었습니다.

말레시아의 마락카 에 가면 그 박물관에 일본군이 육지로부터 싱가포르를 점령한 내용을 잘 설명한 사진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들 군인들은 자전거를 타고 태국의 송클라 지방을 거처북쪽으로부터 넘어 온 것이더군요. 영국 해군은 일본이 바다에서 공격 할것으로 알았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보라가이 해수욕장이 있는 필리핀의 빠나이 섬에 상륙할 때도 인도지나반도에 있는 일본 육군부대가 서쪽에서 침공했다는 현지의 한 할머니를 만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일본군은 그 마을을 모두 불질렀다고 하더군요. 그 할머니는 1938년 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약 80 킬로 떨어진 칼리보 공항의 동리에는 이미 일본 나가노 정보학교 출신 대위가 1940년에 들어와 현지인과 결혼하고 살았다는 겁니다 이런 증언은 모두 내가 그 지역에 수십번 갈 일이 있어서 얻어 들은 것인데 이런 사실이 태문 형의 글로서 확인을 했습니다.

이 작전 계획을 세우는 大本營의 한 정보장교 소령, 세지마 료조 (전두환을 찾아온 나가소내 수상의 특사)는 그 당시 남방작전 게획 팀의 한 요원으로서 있었는데 전쟁 말에 관동군 참모로 자리를 옮겨 소련의 포로가되어 11년간 시배리아에서 고생하다가 귀국하여 伊藤忠의 고문으로 오래 있으면서 전후 일본기업의 동남아 진출의 전략을 세웠다고 합니다. 일본의 철저한 사전 비밀 계획은 놀라운 것이 었습니다.

진주만 공격에 대한 사전 정보를 미국의 정보기관이 알지 못 한 것이 "정보실패" (intelligence failure)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교과서에 나오는 일인데 그 당시 미국은 영국이나 불란서에 비하여 태평양 지역에 대한 정보 관심이 거의 없이 공격을 당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침몰한 함정에서 일본군의 암호책을 훔쳐서 그 해독이 후에 가능하게된 바람에 1942년 이후 전세가 역전하게 된것은 일본의 모든 교신을 미국이 해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당시 미국정부는 남의 암호를 해독하는 것은 "남의 편지를 몰래 읽는 것"이라고해서 이를 금하는 사람도 있었읍니다. 이것이 기술정보 수짐의 시효가 된 것입니다.
크게보기
 
크게보기
김태문
2013-10-21
12:19:24
크게보기 번역은 지난 몇달 사이에 틈틈이 끝내놓았는데 이것을 대략 이틀 간격으로 너무 길지 않게(2회는 좀 길지만) 15-20회쯤 실을까 생각합니다.
번역에서 생략한 부분이지만 에 보면 일본은 수렁에 빠진 일중전쟁을 타개하기 '40년 7월 대외적으로 <대남방무력행사>와 <독일, 이태리와의 정치적 결속강화>를 결정하고, 동 9월에 베트남에 무력진주하고 일,독,이 3국동맹을 체결합니다. 이에 미,영과 적대관계를 만들어 석유, 고철의 금수조처를 초래하지만 일본은 영,미가 유럽에서 독일과 격전을 치루느라 태평양방면을 돌볼 겨를이 없다는 점을 노려 강공책을 펼친 모양입니다. 또 2차대전 초반에 영국은 미국의 참전을 종용했지만 루즈벨트는 반대여론으로 주저하다가 자국 상선에 대한 유보트의 공격을 빌미로 참전하게 되었고,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바로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크게보기
 
크게보기
김윤배
2013-10-23
07:05:36
크게보기 오도광이를 능가하는 長文에 놀라울 뿐이다. 다른 점은 오타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광이의 마지막 Swan Song 에는 오타가 전혀 없었다.

나도 평양사범부속국교에서 마랑말랑한 고무공을 받았는데, 마레이지아 점령 기념이었다고 기억한다.
시기적으로 싱가폴 점령때일 수도 있겠으나, 마레이지아 생고무 나무에서 만든 공은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79 Fun 다음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79 Fun 다음
© ::: 희망분당 700 원불교 분당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