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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3

이선조 | 2013-11-09 15:45:53

조회수 : 2,651

키사카의 <태평양전쟁>-(3)
김태문 10-23 06:41 | HIT : 376
II-4 미국과 영국의 세계전략
    
<적의 적은 우리편>    
  일본의 기습공격을 받은 미영은 당시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어떤 세계전략을 가졌는가?
  이미 말한 것처럼 ‘40년 9월 27일 체결된 일,독,이(日獨伊) 3국동맹은 일본, 독일, 이태리를 중심으로 하는 Fascism 추축국(樞軸國, Axis)들과 미,영,불,화(美英佛和, 미국, 영국, 프랑스, 화란) 등 반추축국들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미국은 대일(對日)경제제제를 강화하고, 영국도 버-마 루트를 재개하여, 미국과 협력하여 충칭(重慶)의 중화민국정부에 대한 물자원조를 개시하였다. 12월 29일 루즈벨트 대통령은 신랄한 어조로 일,독,이 3국동맹을 비난하고, 미국은 민주주의국가의 병기창(兵器廠)>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노변담화(爐邊談話)를 발표했다. 이 담화는 이윽고 ’41년 3월 11일에 무기대여법(武器貸與法)으로 실현되었다. 미국은 독일과 교전 중인 영국에 대하여 전면적인 무기원조를 개시하였다. 미국, 영국, 중국의 결속은 강화되었다.

  6월 22일 독소(獨蘇, 독일-소련)전쟁이 발발하였다. 나치(Nazis) 독일의 히틀러(Adolf Hitler) 총통에게 소련을 붕괴시키는 일은,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유라시아대륙에 게르만인의 <생존권>을 건설한다는 엉뚱한 세계제패의 야망을 실현하고, 또 광신적 인종주의와 반공주의(反共主義)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 영국의 처칠 수상은 즉시 소련에 대한 원조를 성명하고, 루즈벨트 대통령도 7월 말에는 소련에 대한 무기원조를 약속했다. 양국의 소련원조의 논리는 “적의 적은 우리편”이라는 권력정치적 발상에 바탕한 것이다.
  
<루즈벨트와 처칠>  
  ‘39년 9월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과 영국-프랑스와의 제국주의 전쟁이었는데, 독소전쟁의 발발에 의하여 새로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전쟁, 그리고 파시즘과 반(反)파시즘의 전쟁이라는 2중의 성격이 이에 덧붙여져 제2차 세계대전의 성격은 복잡한 것이 되었다.

  일본이 남부 불령 인도차이나(佛領印支=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에 진주를 강행한 2주 뒤인 ‘41년 8월 중순 루즈벨트와 처칠 두 거두는 대서양상에서 회담하였다. 당시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는 1882년생인 59세. 뉴딜정책으로 미국을 세계 대공황의 타격으로부터 멋지게 구해내고 ’40년에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3선을 압승으로 장식하여, 이제 미국의 최고지도자로서 부동의 지위에 올라 있었다. 여기 대하여 처칠(Winston Churchill)은 1874년생인 66세. 33세 때 영국사상 두 번째의 젊은 상상(商相)에 취임한 것을 필두로 내상(內相), 해상(海相), 장상(藏相, 재무상)을 역임하고, ‘40년 5월 수상이 되어 고전 중인 대영제국의 운명을 그의 양어깨에 지고 있었다.

  8월 12일 그들은 다음과 같은 공동선언(=대서양헌장, Atlantic Charter)에 서명하였다.
   1. 영토의 불확대
   2. 관계국민의 자유의지에 반(反)하는 영토의 변경 반대
   3. 모든 국민이 정치형태를 자유로 선택할 권리의 존중 및 빼앗긴 주권과 자치권의 반환
   4. <현존의 의무를 존중하여> 세계의 시장 및 원료에 대한 제국민의 평등권의 보장
   5. 모든 국민의 거주 안전의 확보, 인류를 공포와 결핍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평화의 확립 및 공해항행(公海航行)의 자유의 확보
   6. 침략국의 무장해제

  이 가운데 2)에 대해서는 처칠이 귀국 후 9월, 인도와 Burma에는 이 조항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상원에서 연설하고, 4)에 대해서도 루즈벨트가 양보하여 <현존의 의무를 존중하여> 란 귀절을 삽입함으로써 영국연방의 타국에 대한 특혜적인 관세장벽을 인정한다는 등 이 헌장에는 영국의 제국주의적 기득권에 대한 타협이 눈에 띈다. 또 4)와 5)에서 말하는 공해항행의 자유의 원칙에는, 강력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전후 세계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대국 미국의 은밀한 야심이 비치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대서양헌장은 단지 미국과 영국의 전쟁목적을 밝히는 것만 아니라, 식민지배와 파시즘(Fascism) 추축국들의 침략에 반대하여 싸우는 모든 국민과 민족의 절실한 요구를 반영하고 있었다. 9월 24일 소련을 비롯하여 샤를 드골의 주도로 런던에 망명하여 대독(對獨) 철저항전을 주장하던 자유프랑스 등 15개국이 <헌장>에 참가한다고 성명하였다.
  이에 반파시즘(Anti-fascism) 연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반파시즘(Anti-fascism) 연합의 결성>
  대서양헌장이 발표될 무렵에 독일, 이태리 등 파시즘 추축국과 교전 중인 나라에서는 미국의 참전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소련의 스탈린 수상은 미국의 참전을 요구했고, 처칠 수상도 미국이 영국에 대한 원조를 한층 강화하여 대일전(對日戰)이 일어날 경우에는 양국이 공동으로 일본에 대항하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고립주의자와 각종의 평화주의자가 참전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불의에 공격하자 참전반대의 세론은 침묵하게 되었다. “진주만을 잊지 말자, Remember Pearl Harbor!"는 미국 국민의 구호가 되었다. 일본에 대한 증오감이 단번에 치솟았다. 국내정치의 관점에서 보자면, 첫 한방을 일본으로 하여금 쏘게 하여 참전의 대의명분을 손에 넣는다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의도는 감쪽같이 성공하였다. 처칠 수상으로서, 일본의 기습공격은 <미친 결정>이고, 미국의 참전은 <최대의 기쁨>이었다. 그는 “이제 미국은 완전히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쟁에 들어왔음을 알았다.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 그 때 전쟁에 이기고 만 셈이다”라고 <제2차대전 회고록>에 썼다. 태평양전쟁 개전 이튿날 처칠은 루즈벨트와 전쟁계획을 재검토하기 위하여 도미한다고 타전하여, 12월 22일 군부막료를 대동하고 워싱턴으로 갔다.

  ‘42년 1월 1일 미,영,소,중(美英蘇中) 4개국 대표가 백악관에서 연합국 공동선언에 서명하였다. 4개국은 이 선언에서, 먼저의 대서양헌장의 원칙을 확인함과 아울러 “인명, 자유, 독립, 종교적 자유를 방위하고, 자국(自國) 뿐만 아니라 타국(他國)에서도 인권과 정의를 지켜서” 파시즘 국가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은 상호 협력할 것과 적국과 단독휴전 또는 단독강화를 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였다. 이튿날은 새로 22개국이 참가하여(뒷날 51개국이 참가) 반파시즘 연합이 정식 결성되었다. 반파시즘 연합 내부에서는 미영(美英)연합이 주도권을 잡고, 소련과 중국 등과 협력한다는 관계가 성립되면서, 연합국의 전쟁목적과 기본전략은 민주주의의 옹호와 파시즘 추축국의 타도에 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기본전략이 없는 추축국>                  
  여기 대하여 추축국측은, ‘41년 12월 11일에 독일과 이태리가 미국에 선전을 포고하고, 동일 베를린에서 대미영(對美英) 전쟁의 공동수행과 단독불강화(不講和)를 내용으로 하는 일,독,이 3국협정이 조인되었다. 거기 병행하여 구체적 군사협정을 맺는 교섭이 진행되었으나 원래 미영타도의 묘수를 못 가진 일본 통수부의 바라는 바는 하기와 같았다.
  1) 일본의 작전 분담지역: 남북미대륙의 서해안 이서, 인도 서부(현재의 인도+파키스탄 국경 부근)을 지나는 동경 70도 이동 지역으로 함.
  2) 독일, 이태리가 일본의 남북작전에 호응하여 중근동에 진출하고, 인도-서아시아의 관통을 도모하고, 일,독,이(日獨伊)가 협동하여 우선 영국을 굴복시킴.    
          
  그러나 이듬해 ‘42년 1월 18일 체결된 3국군사협정에서는 1)의 작전분담지역에 관해서는 일본의 희망이 그대로 반영되었으나, 2)의 항목은 삭제되고, 추상적인 3국의 작전계획이 병기되는 데 그쳤다. 이런 결과로 끝난 주된 이유는 독,이 양국이 소련의 타도를 제일로 생각하는 데 반하여 일본은 독,이의 힘을 빌려 영국을 굴복시키려는 등 3국간에 공통되는 전략목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독,이 3국동맹은 사실상 공동화하고, 남북작전에 뒤이은 일본의 제2단계작전은 허공에 뜨고 말았다. 교섭에 임했던 주독대사 오시마(大島浩) 육군중장은 “서로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는 없었다. 따라서 연합전략은 볼 수가 없었다”고 회상하였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에 의하여 유럽의 전쟁과 일중전쟁이 서로 연결되고, 전쟁은 문자대로 제2차세계대전으로 발전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은 개개 전투의 국면에서는 복잡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으나, 전체로서는 파시즘 대 반파시즘/민주주의옹호의 싸움이라는 성격이 크게 클로즈업 하게 되었다. 전쟁목적과 기본전략의 일치로 반파시즘 연합의 결성에 성공한 연합국 진영. 이런 상이점 속에 두 진영의 운명이 암시되고 있었다.
  
<유럽 제일주의와 주변 포위전략>
  그러면 미국과 영국의 군사전략은 어떠했는가? ‘39년 6월 미국군부는 <Rainbow plans>라는 종합적 군사전략을 작성했는데, 그 안에서 대일(對日)/태평양 전략(War plan orange)은 유럽/대서양 전략(War plan red)에 종속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이른바 유럽 제일주의 전략이었다.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하는 오렌지 계획의 기본구상에 의하면 미일(美日)개전의 경우 미국의 대일진공작전은, 당시 일본의 위임통치령이던 Marshal제도와 Caroline제도 등을 거쳐 서태평양으로 점진(漸進)하고, 필리핀은 단기간 일본에 점령당하겠지만 일본해군의 마닐라항 사용을 일정기간 저지하기에 노력한다는 소극적인 것이었다. 이런 생각은 ‘41년 1월~3월 워싱턴에서 열린 미영군사회의의 협정과, 거기에 근거하여 4월 4일 책정된 Rainbow5 작전계획에도 수용되었다. 따라서 미국은, 태평양 전장에서는 방위적 전략에 치중하고, 영국도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독일군과 대결하느라 아시아에 증원병력을 보낼 여유가 없었다. 동아시아의 연합국군은 일본보다 훨씬 뒤떨어진 전력으로 개전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진주만에서 예상외의 대타격을 받은 미국해군은 즉시 Rainbow5를 발동하였다. 해군은 우선 대서양함대로부터 전함 3척, 공모 1척(뒤에 1척 추가), 구축함 9척을 태평양함대로 전속시키고, 그 임무수역을 기본적으로 일부변경선 동쪽으로 물리고, 일부변경선 서쪽에서는 가능한 범위에서만 작전을 한다는 조치를 취했다. 여기 대하여 육군은,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육군전쟁계획과 차장이 입안한, 미국 서해안부터 호주에 이르는 태평양 수송루트를 확보하고, 호주를 보급기지로 정비한다는 방침을 12월 17일 결정하였다.
  
  이어 12월 22일부터 ‘42년 1월 14일까지 워싱턴에서 태평양전쟁 개전후 첫 미영군사회의(암호명 Arcadia)가 열렸다. 석상에서 처칠은 대독(對獨)주전론에 서서 이른바 주변포위전략을 제안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1) ‘42년에 미국의 대영원조와 영국본토의 안전확보를 대전제로, 소련을 원조하여 독일군을 붙잡아둔 채, 미영 양군에 의한 북아프리카 작전을 실시하여 지중해와 스에즈 운하의 해상루트를 확보한다.
  2) ‘42~’43년의 태평양전선에서는, 일본의 약점인 해상 수송루트를 공격하는 데 그친다.
  3) ‘43년에 미영군이 유럽 상륙작전을 실시하고, 거기 호응하여 독일군 점령지역의 제국민으로 하여금 대독저항에 나서게 함으로써 독일을 붕괴시킨다.

  결국 처칠의 전략은 지중해, 중근동, 스에즈 운하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대영제국의 전통적 권익 라인을 확보하고, 독일을 주변지역에서 포위하여 타도하려는 군사전략이었다.
  미영군사회의에서는 처칠의 주변포위전략을 바탕으로 한 <공동전략의 기본원칙>이 결정되었다. 그것은 유럽 제일주의를 재확인하고, 대일전에 투입할 전력(戰力)은 <최중요지점의 확보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전력으로 한다>라는 점을 주된 내용으로 하였다. 따라서 미국과 영국의 대일전략은 유럽 전국(戰局)의 동향에 따라 제약되었다.

<맥아더와 니미츠>  
  앞에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군의 남방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연합국군은 동남아시아의 방위에 실패하였다. 연합국으로서는 동아시아와 태평양 전장의 방위체제를 빨리 재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42년 3월, 미국과 영국은 다음과 같이 방위지역분담을 결정하였다. 남서태평양지역사령관에는 맥아더가, 진주만의 패전 직후 태평양함대사령관에 취임한 니미츠(Chester Nimitz) 제독은 사령관 겸임인 채 태평양지역사령관에 각각 취임하고, 니미츠는 Robert Ghomlay제독을 남태평양지역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이러한 지휘계통 확립과 동시에, 미국 윤군은 3월말까지 호주와 뉴질랜드에 약8만(2개 사단), New Caledonia섬에 약2만, 미국 본토와 호주 사이의 수송루트에 점재하는 Christmas섬, Samoa제도 등에 약8천, 합계 약11만약(弱)의 병력을 대일 전장에 파견하였다. 이들 병력은 맥아더의 지휘하에 들어가 장차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맥아더와 나란히 해군측 주역이 된 니미츠는 1885년생 56세, 겸허하면서 생각이 깊고, 인물평가력과 정세판단이 뛰어나, 부하로 하여금 최선의 능력을 발휘케 하는 지도력을 겸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대일작전의 주도권을 어느 쪽이 가지느냐를 놓고 미국 육해군간에 심각한 대립이 있고, 맥아더는 5년 연하의 니미츠와 동격인 사령관의 지휘에 놓인 것에 불만을 가졌다. 거기서 니미츠는 전쟁 지도에 있어서는 자기의 신념을 관철하면서도 늘 자존심 강한 맥아더를 선배로 대하면서 육해군의 협조를 유지하기를 잊지 않았다.

  니미츠는 산하에 있는 5척의 항공모함 가운데 일본잠수함의 뇌격을 받아 수리중인 Saratoga를 제외한 4척을 Lexington과 York Town, Enterprise와 Hornet의 2조로 나누어 기동부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이 기동부대는, 일본의 연합함대와 4조로 나뉘어 대결하기에는 너무 열세였다. 이에 니미츠는, 기동부대에 의하여 태평양 정면의 일본방위지역 깊숙이 게릴라식 공습을 감행하여, 남방작전을 지원 중인 일본의 연합함대를 배후에서 교란하는 전술을 택했다.

  이처럼 아슬아슬한 위험이 따르는 사명을 수행하는 데는, 굉장히 패기가 넘치고, 매우 과단성 있는 <bull, 황소>란 별명의 홀지(William Halsey) 중장 같은 제독은 안성맞춤이었다.
  홀지가 탄 공모(空母) Enterprise는 York Town과 함께 2월 1일 마샬제도를 공습하고, 2월 24일에 웨이크섬, 3월 4일에는 멀리 미나미토리시마(南鳥島)를 연이어 기습공격했다. 더욱이 3월 10일에는 Lexington이 뉴기니아섬 동부북안의 라에와 살라모아를 공습하여 상륙작전 중인 일본의 수송선단에 큰 피해를 주었다. 어느 경우에도 일본군은 유효한 반격을 가하지 못하여, 연합함대는 수세(守勢)로 미국의 공모를 포착, 섬멸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통감하게 되었다.

  한편 중국에 대하여는 미영군사회의(Arcadia)에서 장제스(蔣介石)를 연합국의 중국전장 최고사령관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3월 3일 장제스군의 참모장겸 재중국(在中國)미국사령관으로 스틸웰(Joseph Stilwell) 중장이 충칭(重慶)에 착임하였다. 또한 미국은 인도의 카라치에 육군 제10항공부대를 창설하였다.
  여기 대하여 영국은 버-마를 인도방위군<사령관 웨이벨(Archibald Wavell) 대장>의 방위지역에 넣어, 장차 있을 대일반공(對日反攻)의 준비를 추진하였다.

  이와 같이 맥아더, 니미츠, Halsey, 장제스, Stilwell, Wavell 이라는 연합국군 최고지휘관들의 면면이 갖춰졌다. 이윽고 연합국군의 반공개시와 함께 일본군과의 사이에 사투가 전개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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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표
2013-10-23
08:34:46
크게보기 잘 읽었다. 흥미진진한 장편 소설에 빠져들고 있다.
태문이 수고한다. 감사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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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석
2013-10-23
10:52:13
크게보기 역사책에서 읽어 알고 있던 제독과 장군의 이름이 나오니 흥미 진진 한 것은 신표 생각과 같을 것 같다.

1930년대 초 독일의 Mahan 이란 地政學者가 내 세운 이론 가운데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부를 잡으면 세계를 지배한다"는 명제 때문의 독일의 전략과 일본의 전략이 마주 떨어진 것 같다. 특히 일본은 北支那를 처음에 공략한 것이 지금의 우그루 같은 곳으로 향하는 "이룰 수 없는 꿈"을 일본 육군의 "소위" 전략가들이 생각 했었다. 그래서 몽고말 그리고 더 내륙으로 들어가서 러시아말 유라시아 지방 말을 가르치는 나가노 정보학교를 세운 것이다. 일본 육군은 외국어를 주로 정보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지금도 일본에는 방위성 산하에 調査學校 라는 것이 있다. 과거 일본의 헌병대에 있던 조사과는 정보과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지난번 댓글에 세지마 료조의 이야기를 간단하게 했지만 일본사람들의 작전 계획이나 지금의 아베의 국가전략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전략적 사고"가 서양 사람들보다 적극적이고 개방적이지 못하며 확실한 정보의 예측력이 부족하다. 말하자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image)는 섬나라의 특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단히 편협하다.

작은 일의 details에 집착하여 커다란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 마치 산골짜기에서 자란 사람이 산넘어를 상상할 수 없는 것 과 같다. 바다는 일본 사람들의 한계이고 그 안에서 힘을 키워 "한판에 퍽하고 뒤어나가는" 작전에 능숙하다. 같은 섬나라인 영국의 전략가와 이점이 크게 다르다. 영국 사람은 바다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일찌기 섬안에서 고통 받고 살기 힘든 족속은 바다로 나가 다른 곳으로 가는 경험을 얻었던 것이었다. 시간적으로 영국사람들은 일본보다 400년 전부터 바다 위에서 혜매었으나 일본은 16세기부터 사람들을 가두어 놓고 겨우 명치유신 후인 19세기 말 경부터 풀어 주었다.

반도에 살던 우리는 대륙을 침공하거나 바다로 나가 규슈로 도망 칠 수 있었다. 특히 가야와 백제 사람들이 이미 3-4세기부터 그런 생활을 했던 것이다. 북쪽에 살던 한국 사람 (근본적으로 몽고인이지만)들은 수시로 중국의 한족과 싸울 수 있는 용맹과 의지를 가져 왔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도 갈불 수 없을 만큼 밖으로 날 뛰기도하고 통제하기 어려운 종족이 된 듯 싶다. 이런 이야기는 한국을 잘아는 죠지워신톤 대학의 David Steinberg 교수가 한국사람에 관해서 쓴 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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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표
2013-10-23
11:56:29
크게보기 정석이의 혜박(지혜로운 박식) 한 설명이 가미되면 태문이의 글이
한층 더 높은 차원으로 이해를 도운다. 감사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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