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조 2013-11-09 15: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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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사카의 <태평양전쟁>-(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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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2 결전장(決戰場)- 남태평양 <Guadalcanal섬 공방전의 개시> 미드웨이의 패전 후, 대본영은 Port Moresby를 육로로 공략하는 작전과, 뉴기니아 동부와 솔로몬제도에 항공기지를 건설하는 작전을 명하였다. 이 가운데 후자는 Rabaul, Lae, Tulagi섬 등의 항공기지를 정비확충함과 아울러, Tulagi섬 남쪽 30km에 있는 Guadalcanal섬에 비행장을 신설하다는 것으로, 연합함대는 이것을 SN작전이라고 불렀다. 가달카날은 동서 약137km, 남북 약45km의 섬(제주도에 비해 대략 길이 2배, 폭 1.5배, 면적 3배)으로, 섬의 중앙을 동서로 산맥이 달리고 북안(北岸) 중앙부에 평지가 있는 외에는 정글로 덮여있다. 7월 1일부터 2571명의 설영대(設營隊)와 247명의 육전대(陸戰隊)가 룽가(Lunga)곶 부근에 상륙하여 비행장 건설에 착수했다. 당시 일본군 설영대의 장비는 삽(schop), 곡괭이, 괭이, 톱, 손도끼 등으로 기계화된 것이라고는 road roller, mixer, 트럭 등에 불과하여, bull dozer, power shovel, tractor 등을 많이 가진 연합국군에 비하면 공사능력상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도 8월 5일에는 길이 800m, 폭 60m의 활주로가 완성되어 전투기의 진출이 가능해졌다. 이 SN작전을 도중부터 담당한 것은 7월 14일에 새로 편제된 제8함대<사령관 미가와(三川軍一) 중장, 중순 초카이(鳥海), 경순 2 등>였다. 또 산호해해전 직전에 점령한 툴라기섬에는 약400명의 수비대가 있었다. 한편 미드웨이 해전의 대승리는 미국국민의 사기를 드높였다. 7월 2일 미국 육해군통합참모본부는 이 기세를 타고 남태평양에서 전술적 공격을 시작하는 작전(암호명 Watch tower)을 결정하였다. 여기에는 먼저 Santa Cruz제도와 Solomon제도의 Tulagi섬 주변을 공략하고, 다음에 남은 솔로몬제도와 뉴기니아 동부 북안의 Lae와 Salamaua 및 그 주변을 탈환하고, 최후에 Rabaul을 공략한다는 것이었다. 섬들을 따라서 항공기지를 북상시키는 작전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지상기지로부터의 폭격기에 의한 공격의 유효성이 확인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데 루즈벨트 대통령은 유럽 제일주의의 전략을 견지하고, 7월 25일에는 처칠 수상의 주변 포위전략을 지지하는 형태로, 북아프리카 작전(암호명 Torch)의 실시가 결정되었다. 그 때문에 미국 본국으로부터 태평양전선으로의 증원은 별로 기대할 수 없어 니미츠, 맥아더 두 대장은 우선 현유병력을 가지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8월 7일 이른 아침 남태평양지역사령관 곰레이 중장이 거느리는 제1해병사단의 약11,000명이 Guadalcanal섬에, 약6,000명이 Tulagi섬에, 일본군의 뜻밖에 상륙하였다. 이것을 지원한 것은 Saratoga, Enterprise, Wasp 등 공모 3, 전함 1, 중순 11, 경순 3, 구축함 31, 기타로 이뤄진 함대와 New Guinea 등에 전개한 기지항공부대였다. 이것은 일본측의 예상을 훨씬 웃도는 병력이었다. 툴라기섬 수비대는 이튿날까지 대부분이 전사하고, 가달카날섬 수비대는 비행장 서쪽 8km 지점으로 물러났다. 위급을 들은 연합함대는 우선 기지항공부대로 이뤄진 제11항공함대<사령관 쓰카하라(塚原二四三) 중장>와 미가와(三川) 중장의 제8함대에 반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라바울과 가달카날 사이는 약1,000km나 되어 레이센의 항속거리(航續距離)와 맞먹었고, 또한 솔로몬제도 각지에 배치되어 있던 연합국군의 연안감시원에 의하여 일본기의 행동이 사전에 통보되었으므로, 미군기의 요격을 받아 손해가 커서 생각만큼의 전과를 내지 못했다. 여기 대하여 미가와 중장은 기함인 중순 초카이(鳥海)를 선두로 제6전대의 중순 4척 외에 경순 1척, 구축함 1척, 합계 8척을 거느리고, 8월 8일 야반부터 9일에 걸쳐 단종진(單縱陣)을 짜서 가달카날 근해에 돌입하여 특기인 야전(夜戰)으로 미국-호주 해군의 중순 4척을 격침하는 일방적 승리를 거뒀다. 제1차 솔로몬 해전이다. 그러나 호위기를 안 가진 미가와함대는 미국 공모의 반격이 두려워 룽가곶 근해에 있던 수송선단을 공격하지 않은 채 전장을 떠나서, 작전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했다. 이렇게 가달카날섬을 둘러싼 격렬한 공방전이 시작되었다. 연합국군의 가달카날섬 상륙을 경계로, 개전 이래 8개월간 이어진 일본군의 전략적 공세와 연합국군의 전략적 후퇴의 시기가 끝나고, 태평양전쟁은 연합국군의 반격개시와 일본군의 전략적 지구(持久)를 특징으로 하는 제2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피투성이의 사투(死鬪)> 대본영은 Midway 패전 후에도 ‘42년 3월 결정된 <세계정세판단>에 표시된 “연합국군의 대일반공은 ’43년 이후”라는 안이한 정세판단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연합국군의 가달카날섬 상륙은 <정찰(偵察)상륙>이고, 가령 상륙이 본격적이라 하더라도 탈환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더구나 Guadalcanal섬 수비대는 <적병력>은 고사포, 전차 약간과 기총 다수를 가진 약2,000명이라고 보고해 왔다. 남태평양방면의 작전을 담당하는 제17군<사령관 햐쿠다케(百武晴吉) 중장>은 보병제28연대장 이치키(一木淸直) 대좌가 지휘하는 이치키지대(支隊)의 선견대(先遣隊) 916명을 6척의 구축함에 분승시켜 8월 18일 야반 Henderson 비행장(미군이 점령 후 명명)에서 약30km 동쪽의 타이포곶 부근에 상륙시켰다. 이치키 대좌는 ‘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 때의 대대장으로, 전투경험이 풍부한 지휘관이었다. 이치키지대는 해안을 따라 서진하여 비행장을 겨냥했으나, 21일 미명 비행장에서 약3km 못 미친 지점에서 전차를 동반한 미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고 포위되어 분전했으나 그날 오후 3시경 이치키 대좌는 군기를 불태우고 자결하였다. 전사자를 777명이나 내고 이치키지대는 궤멸하였다. 대본영과 제17군은 예정대로 곧바로 제35여단장 카와구치(川口淸健) 소장이 거느리는 카와구치지대에 출동을 명했다. 병원(兵員)을 조금씩 투입하는 전형적 <병력축차사용(兵力逐次使用)>이었다. 그에 앞서 8월 24일 미·일 기동부대는 가달카날섬 북북동 약400km 해상에서 대결하여 제2차 솔로몬해 해전(미국명 East Solomon 해전)을 벌였다. 새로 편제된 제3함대<사령관 나구모 중장>의 쇼카쿠(翔鶴), 즈이카쿠(瑞鶴), 류조(龍驤)의 3 공모, 전함 2, 중순 4 등이 Saratoga와 Enterprise의 2 공모 등으로 이뤄진 미국 기동함대를 맞아 싸웠다. 이 해전에서 쇼카쿠의 radar가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되었지만 성능면에서는 미군의 것에 못 미쳤다. 이 전투에서 일본 공격대는 Enterprise를 중파(中破)하고, 20기를 격추하였다. 그러나 일본측도 류조가 침몰, 수상기모함(水上機母艦) 치토세(千歲)가 불타고, 공모 탑재기 177기 중 59기를 잃는 손해를 입었다. <내일은 루즈벨트의 급여(給與)다> 제해권과 제공권의 탈환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미군이 헨더슨비행장을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달카날섬에 대한 병원과 물자의 수송이 매우 곤란하게 되었다. 연합함대는 구축함, 초계함 등의 고속함정에 의한 피스톤 수송방식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방식은 고양이 눈을 속여 몰래한다는 의미로 <생쥐수송> 등으로 불렸다. 식량은 극도로 부족하기 시작하였다. 기아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은 미군의 식량을 빼앗는 것으로, 일본군은 이것을 <루즈벨트의 급여>라고 부르며 목표로 삼았다. 카와구치지대를 태운 구축함대는 도중 미군기의 습격을 받아 상당한 손해를 입으면서도 8월말 이후 약5,550명의 주력부대를 타이부(Taivu)곶 부근에, 남은 약650명을 가달카날섬 서북단의 Esperance곶의 동쪽 부근에 각각 상륙시켰다. 카와구치지대 주력은 인적미답(人跡未踏)의 정글 속을 우회하여 비행장 남쪽 Edison고지(뒤에 <피의 언덕, Bloody Ridge>로 명명)에 진출했지만 수중의 식량은 바닥이 났다. “내일은 루즈벨트의 급여다.” 9월 13일 밤 최후의 식사로 배를 채운 카와구치지대 주력은 Edison고지의 미국진지에 야습을 하였다. 필사적인 백병돌격(白兵突擊)도 미군의 압도적인 포화 앞에는 제압되어 사상률 약20%의 손해를 입고 공격은 참패로 끝났다. 살아남은 장병은 비행장 훨씬 동쪽의 정글 속으로 도망쳤지만 그 퇴각 상황은 매우 비참했다. 카와구치 소장은 회고록 속에서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량은 각자 거의 9월 13, 14일에 다 먹고, 한 톨의 쌀도 없이 전원 절식상태에서 5, 6일 행군했다. (중략). 이번 퇴각 동안, 무거운 병기는 전부, 소총도 반수는 정글 내에 버렸다. 체력이 줄어 휴대 불가능해진 탓이다. 단지 각자 총검과 반합(飯盒, 밥그릇)만은 결코 버리지 않았다.” 한편 미군도 궁지에 빠져들었다. 상륙 이래 보급이 끊어져 식량은 겨우 1일 2식이 되고, 말라리아 등의 환자가 늘고, 탄약도 줄어들었다. 게다가 일본 잠수함의 공격으로 8월 31일에는 공모 Saratoga가 대파, 9월 15일에는 공모 Wasp와 구축함 1척이 격침, 신예전함 North Carolina가 대파되어 손상되지 않은 공모는 Hornet만이 남았다. 하지만 9월 18일 3일 전까지 Wasp의 호위를 받았던 수송선단이 약4,200명의 증원부대와 물자를 싣고 룽가곶에 도착하여 해병대는 겨우 살아났다. <끝없는 소모전> 카와구치지대의 패배는 제17군과 대본영에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제17군은 이미 파견키로 결정되었던 정예로 명성이 높은 센다이(仙台)의 제2사단<사단장 마루야마(丸山政男) 중장>에 출동을 명함과 아울러, 8월 중순 이후 New Guinea 동부 북안의 Buna로부터 육로로 Port Moresby 공략에 향하고 있던 낭카이(南海)지대의 철수를 명하여, 가달카날섬의 탈환을 최우선으로 삼기로 방침을 정했다. 점차 사안의 중대성을 알아차린 대본영 육군부는 제17군의 방침을 지지하여, 자바섬에 주둔 중이던 나고야(名古屋)의 제38사단<사단장 사노(佐野忠義) 중장>을 제2사단에 뒤이어 가달카날섬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은, 피아의 전력과 보급능력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내려졌다기보다, 개전 이래 최초의 퇴각이라는 불명예를 단번에 만회하려는 집념에 의하여 이뤄졌다. 그 증거로 가달카날섬의 전략적 가치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중요한 점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행해지지 않았다. 10월 상순부터 중순에 걸쳐 제38사단의 일부와 제2사단이 제17군사령부와 함께 헨더슨 비행장에서 약20km인 Tassafaronga곶에 상륙하였다. 정글 속의 행군은 엄청나게 어려웠다. 장병은 무거운 병기탄약과 식량을 짊어진 채 가파른 산비탈을 기어오르고 내리고, 쓰러진 큰 나무를 타넘고, 몇 개의 개울을 건넜다. 스콜이 쏟아지면 조금 낮은 골짜기는 금방 급류로 바뀌었다. 물론 전원이 비에 푹 젖었다. 제2사단을 중심으로 하는 각부대는 고생 끝에 헨더슨 비행장 남측지점에 집결하여 10월 24일과 25일 밤 비행장 점령을 겨냥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필사의 공격도 미군의 압도적 포화 앞에서 사상자가 속출하고 실패로 끝났다. 각부대는 비행장 남서의 Austen산(표고 461m)과 그 서쪽 정글로 후퇴하여 재기를 노리게 되었다. 한편 가달카날섬의 전투를 중시한 미국해군은 10월 18일 남태평양지역사령관을 소극적인 Ghomlay 중장에서 적극과감한 <황소> Halsey 제독으로 바꾸고, 24일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보급가능한 전항공병력을 가달카날섬 방면에 일시 전용하라고 지시하였다. 충분한 보급을 받은 미군은 11월 1일 이후 비행장 동쪽의 해안정면으로부터 잦은 반격으로 바뀌었다. 제2사단의 총공격 직후에는 29기까지 줄었던 헨더슨 비행장의 비행기도 11월 20일에는 100기로 증강되고 활주로도 셋으로 늘었다. 가달카날섬 부근의 제공권은 완전히 연합국군의 수중에 돌아갔다. 그 때문에 11월 1일 이후에는 미국 함선의 가달카날섬 입항은 거의 자유가 되어, 보급이 달리는 일본군과의 전력의 차이는 점점 화대되었다. 10월 하순에 약23,000명이던 미국 지상병력은 11월 말에는 약34,000명으로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본영은 연합함대의 지원을 받아 11월 13일부터 제38사단 주력을 가달카날섬에 투입하였다. 일본군 지상병력은 약3만이 되었지만 그 중 전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제38사단의 약5,000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보급을 구축함과 잠수함의 <생쥐수송>에 의존하는 일본군의 전투능력은 날이 가면서 눈에 띄게 떨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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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56: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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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달카날 전투는 미국과 연합군이 일본군과의 戰勢를 逆轉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태문이의 긴 글의 마지막 부분만 읽고 바로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이 댓글을 올린다. 혹시 잘못된 점이 있으면 지적해 주기 바란다. 나는 평양 교외 寺洞에 있는 일제 해군병원 의사들이 사는 관사에서 평양사밤부속국민학교 1학년 학생으로 부모님과 살고 있었다. 그곳에는 일본해군 회관이 있었다. 회관의 대동강 건너편이 선교리이다. 일요일마다 아바지 (해군병원 산부인과 과장)는 나를 데리고 해군회관 아래 대동강변으로 내려가셨다. 그 아래에 큰 바위 동굴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번 그 동굴에 살던 龍이 나와서 일본군에게 쫓기는 조선 군사를 대동강에 다리를 놓아주어 살리고 추격하던 일본군을 대동강에 모두 수장시킨 후 昇天했다는 얘기를 들려 주셨다. 내가 해군병원에 아버지를 따라 갈때마다 간호원 누나들이 뛰어나와 서로 나를 차지하려고 다투었다. 내가 어릴 때는 대단히 귀여운 아이였다. 병원에서 나는 그곳 일본 해군아져씨들과도 친해졌다. 내 기억에 약국에서 일하던 콧수염 기른 水兵아져씨와 친했다. 그는 얼마 후 일본 항공모함으로 전근하였다. 나는 위문편지를 보냈고 그 어져씨의 답장도 받았다. 그는 카달카날 해전에서 미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였다. J. F. KENNEDY 가 전쟁 영웅이 된 것도 같은 지역에서 작은 배의 선장으로 일본군이 우굴그리는 섬과 섬 사이로 수영하면서 (그는 하바드에서 수영선수였다) 부하들을 구한 얘기는 모두 잘 알것이다. 하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도 보았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