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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6

이선조 | 2013-11-09 15:52:30

조회수 : 2,061

키사카의 <태평양전쟁>-(6)
김태문 10-29 11:09 | HIT : 196
<남태평양의 해상결전>
  그 사이 해군도 육군과 제휴하면서 솔로몬제도 근해에서 사투를 되풀이하였다. 각 해전에서 실제의 손해는 다음 표와 같다. 이 중 10월 26일의 남태평양해전(미국명 Santa Cruz제도 해전)은 제2사단의 총공격에 맞추어 기동부대를 자주 투입하면서 일어났고, 이 방면에서 기동부대끼리의 최후의 결전이었다. 결과는 거의 비기는 것으로 끝났지만, 대본영은 공모 4, 전함 1, 함형미상(艦型未詳) 1을 격침, 전함 1, 순양함 3, 구축함 1을 중파(中破), 적기 200기 이상을 격추파(擊墜破), 우리측 손해는 공모 2와 순양함 1이 소파(小破), 미귀환기 40수기라고 과대한 전과를 발표하고, 29일에는 천황이 야마모토 연합함대사령관에게 “짐은 이를 깊이 칭송한다“는 칙어를 하사하였다. 국내에서는 오랜만의 대전과에 열광했다.

  11월 12~14일의 제3차 솔로몬해 해전(미국명 Guadalcanal 해전)은, 제38사단을 태운 수송선단을 호위하여 함대가 출동하면서 일어났다. 양군의 함정이 뒤섞인 싸움이 되어 함포사격과 어뢰에 의한 응수는 매우 장렬했다. 일본측은 이 해전에서 처음으로 히에이(比叡)와 키리시마(霧島)의 고속전함 2척을 잃었다.
   남패평양 해전에서 양군의 손해            
▲ 1차 Solomon해 해전(‘42년 8.8-9)
  일본군: 손상=중순 1                    
  연합군: 침몰=중순 4
▲ 2차 Solomon해 해전(‘42년 8.24)
  일본군: 침몰=공모 1, 손상=수상기모함 1, 비행기상실=59
  연합군: 손상=공모 1, 비행기 상실 20
▲ Savo섬 근해 해전(‘42년 10.11-12)
  일본군: 침몰=중순 1, 구축함 1, 손상=중순 2
  연합군: 침몰=구축함 1, 손상=중순 1, 경순 1, 구축함 1
▲ 남태평양 해전(‘42년 10.26)
  일본군: 손상=공모 2, 중순 1, 구축함 2, 비행기상실=92
  연합군: 침몰=공모 1, 구축함 1, 손상=전함 1, 공모 1, 중순 1, 구축함 2, 비행기상실=74  
▲ 3차 Solomon해 해전(‘42년 11.12-14)
  일본군: 침몰=전함 2, 중순 1, 구축함 3, 손상=중순 3, 경순 1, 구축함 1
  연합군: 침몰=경순 2, 구축함 7, 손상=전함 1, 중순 2, 경순 1, 구축함 4
▲ Lunga 근해 해전(‘42년 11.30)
  일본군: 침몰=구축함 1
  연합군: 침몰=중순 1, 손상=중순 3
▲ Renell섬 근해 해전(‘43년 1.29-30)
  일본군: 비행기상실=10
  연합군: 침몰=중순 1, 손상=구축함 1  
                          
  연합국군은 이 해전을 경계로 제해권만 아니라 제공권도 거의 수중에 장악하게 되었다.
  연합함대는 Solomon 해전에서 미국함대와 거의 맞먹게 싸웠고, 특히 장기인 야전(夜戰)에서는 강점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제공권을 잃은 결과 수송선의 피해는 일본측이 훨씬 많아서 <가도(カ島)는 가도(餓島): 가달카날섬은 굶주림의 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남태평양의 전투는 문자대로 끝없는 소모전이었다.

<굶주림과 병사(病死)의 섬>            
  전국(戰局)의 만회는 이미 절망적이었지만 대본영은 아직도 가달카날섬 탈환 방침을 견지하고 있었다. 11월 9일 제8방면군<사령관 이마무라<今村均) 중장>과 제18군<사령관 아다치(安達二十三) 중장>이 신설되었다. 제17군은 Guadalcanal섬, 제18군은 New Guinea를 담당하고, 제8방면군이 양군을 통괄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마무라 중장이 해야 할 일은 미군과 싸우기보다는 가달카날섬의 장병을 굶주림에서 구하는 일이었다.

  굶주린 장병은 상상을 초월하는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선박공병 제3연대의 계획주임으로 101일간 가달카날섬에 있었던 야마모토(山本四郞) 중위(뒤에 소좌, 현 쿄토여자대학 문학부교수)는 “나는 후방근무여서 수월한 편이었다.”고 전제하고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42년 10월 24일 밤 타사파롱가에 상륙하였다. 어둠 속에서 장교행리(行李)를 빼앗겼다. 겨우 찾아서 안을 살펴보니 식량만이 없어졌다. 근처에 있던 병사를 야단쳤더니 “그 근처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안은 비어 있었고요.”라는 답이 돌아와 열린 입이 닫히지 않았다.

상륙 후 1주간은 쌀6홉(약900g)이 배급되었으나, 그 이후는 1일 2홉이 되고, <쿠이노바시(食い延ばし: 조금씩 먹기>가 시작되었다. 이윽고 1일 5-6작(약80~90g)이 되고, 그것을 조석 2회에 나누어 죽을 쒀서 마지막에 바닷물로 간을 맞췄다. 미군의 포폭격으로 야자나무가 쓰러지면 부드러운 죽순 같은 새싹을 잘라 죽 속에 썰어 넣었다. 타피오카, 바나나, 야자열매, 작은 게, 냇물고기 등 무엇이든 먹었다.

  쌀은 드럼통으로 보내왔다. 잠수함이 야음을 틈타 다가와 밧줄로 몇 개씩 엮은 드럼통을  바다에 던져놓으면 우리가 그것을 주우러 간다. 드럼통 바닥에 붙은 쌀을 쇠자로 긁어모았다.

  체력이 떨어진 장병은 말라리아나 이질에 시달리고, 영양실조로 자꾸만 죽었다. 제3연대에서 300여명이 죽었는데 그 90%는 사실상 아사(餓死)였다. 지면을 깊이 팔 원기도 없어서 겨우 시체를 묻은 장소가 밭의 이랑처럼 솟아올라 연이어졌다.

  성냥이 없어지면 렌즈로 건초나 야자열매에서 딴 copra에 불을 붙였다. 서있는 나무에 가로대를 걸치고 바나나 잎으로 지붕을 만들었다. 날씨가 좋은 날은 천막을 지면에 쳐놓지만 비가 오면 천막을 바나나 잎 위에 덮어 비를 피했다. 밤에는 모기가 많아서 삼베 모기장으로 만든 복면(覆面)을 머리부터 뒤집어쓰고 양손에는 무명 장갑을 끼고 잤는데 더위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기묘한 생명판단>
  입박지(入泊地)에서 아주 전방에 있던 장병은 훨씬 비참하였다. 오스텐산 진지에 3개월간 틀어박혔다가 군기(軍旗)를 배에 감고 단 혼자 기적 같이 생환(生還)한 카와구치지대 보병제124연대의 연대기수 오비(小尾靖夫) 소위는 <진중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무렵 Austen산에 이상한 생명판단이 유행하였다. (중략). 이 비과학적이고 비인도적인 생명판단은 결코 맞지 않았다. 설 수 있는 이는 수명이 30일간,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는 이는 3주간,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이는 1주간, 누운 채 오줌을 누는 이는 3일간, 말을 할 수 없게 된 이는 2일간, 눈을 깜빡이지 않는 이는 내일.(‘42년 12월 27일).
  살아남은 장병 전원에게 최후의 식량이 분배되었다. 건빵 두 쪽과 별사탕 한 알 뿐. 북쪽을 향하여 조국의 하늘을 쳐다보며 절하고 먹었다.(‘43년 1월 1일).
  Austen산 수병(守兵)은 썩은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시체는 발 디딜 곳도 없다. 살아 있는 자, 썩고 있는 자, 백골이 된 자가 베개를 나란히 누워 움직이지 않는다.(1월 3일).“

  오비 소위에 의하면 군명령으로 오스텐산 사수의 명을 받은 11월 22일에 450명이던 수비대는 이듬해 1월 3일에는 굶주림 때문에 250명으로 줄고, 또 1월 15일에 미군의 공격을 받아 50명이 되고, 해안을 향하여 탈출 중인 16일부터 20일 사이에 정글 속에서 두 번째 미군의 습격을 받아 오비 소위를 뺀 오카아키(岡明之助) 연대장 이하 전원이 전사하였다.

  거기에는 일찍이 정예를 자랑하던 제국육군의 이미지는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가달카날섬은 바로 이 세상의 지옥이었다.

<Owen Stanley를 넘는 고투(苦鬪)>
  Midway 해전 후 대본영은 Guadalcanal 작전과 함께 육로를 통한 Port Moresby 공략작전의 실시를 결정하였다. 작전의 목적은 동부 뉴기이아에서 연합국군의 최전선기지인 포트모스비를 점령하여 연합국군의 대일반공(對日反攻) 기도를 좌절시킴에 있고, Rabaul에 있던 제17군 지휘하의 남해지대<지대장 호리이(堀井富太郞) 소장>가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동부 New Guinea의 중앙에는 Owen Stanley산맥이 솟아있고, 약4,100m의 최고봉 Victoria는 만년설을 이고 있다. 뉴기니아 동부북안(北岸)의 Buna에서 Port Moresby를 공격하려면 Victoria산 남동산록(山麓)의 표고 2,000m의 고개를 넘고, 다시금 몇 개의 고개를 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코스일대는 울창한 정글에 덮이고, 오지에는 현지주민이 지나는 좁은 길이 있을 뿐이었다.

  남해지대(南海支隊)는 선견대가 7월 21일, 주력이 8월 18일에 Buna 부근에 상륙하고(19일 진격개시), 해군부대도 여기에 협력하였다. 9월 2일까지 상륙한 총병원은 육군 약8,000명, 해군 약3,430명이었다.

  또 수송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해군군속이던 대만의 고사(高砂)의용대와 조선인에 의한 조선의용대 각500명씩을 남해지대에 전속시키고, 라바울 부근의 현지주민 약1,200명도 강제적으로 징용하여 부나 부근으로 보냈다. 현지주민의 강제징용은 점령지 행정상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손이 모자라는 일본군에게 그런 한가로운 것을 논할 여유는 없었다.

  부나부터 포트모스비까지 정글을 헤치며 높은 고개를 넘는 행군은 무척 힘들었다. Kokoda(400m)까지는 간단히 진격하였지만 그 뒤의 행군은 엄청나게 어려웠다. 길은 험하고 호주군의 저항까지 배제하며 나아가야 했다. 동행했던 아사히(朝日)신문사 특파원 오카다(岡田誠三)는 ‘43년에 출판한 <뉴기니아 혈전기>에서 행군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썼다.

  주력부대는 오로지 밤낮으로 걷기만 했다. 병사는 1말(약15kg, 하루 6홉으로 약16일분)의 쌀과 소총, 탄약, 수류탄, 작은 삽, 십자 괭이 등 통틀어 13관(약49kg)의 무거운 짐을 나무꾼이 쓰는 지게로 짊어졌다. 기관총대는 1인분의 무게가 15관(약56kg)이나 되었다. 이런 짐을 지면 짐이 어느 병사의 머리 높이보다도 30cm쯤 삐어져 나왔다. 막대기를 짚고 한 발짝 한 발짝 걷는다. 다만 사람의 두 발과 어깨힘이 유일한 교통기관이 되었다.

<저기가 Port Moresby다>
  선두를 끊은 보병제144연대<연대장 쿠스세(楠瀨正雄) 대좌>는 9월 16일 악전고투 끝에 이요리파이와를 점령하였다. 사기는 왕성했으나, 9월이 되면서 하루 식량이 쌀 1홉(약150g)으로 줄어든 탓에 장병의 체력은 나날이 소모되어, 말라리아와 이질에 시달렸다. 더구나 남해지대는 그때까지 전병사상(戰病死傷) 합하여 약1,000명의 손해를 내었다. 오카다 특파원은 말했다.

  드디어 공격해 올라갔던 주봉(主峰) 꼭대기에서 우리는 멀리 Papua만을 바라보았다. “바다가 보인다. 포트모스비의 바다다.” 피투성이가 된 장병들은 바위 위에서 껴안고 울면서 가리켰다. (중략). 게다가 오늘 밤 산꼭대기에서 우리는 포트모스비의 등불을 보았다.
  
  장병은 하루라도 빨리 포트모스비를 점령하여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식량보급이 끊어졌다. 호리이 지대장은 제일선부대에 대하여 우선 점령한 진지를 굳히고 “일부를 마와이 부근으로 보내어 주변 토인부락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징발할 것“을 명했다. 현지주민으로부터 식량약탈이다. 이 명령은 가져갈 수 있는 식량은 가져가되 모자라면 현지에서 <징발>한다는 현지조달주의의 표현으로, 일본군의 상투수단이었다.

  9월 13일 전술한 대로 가달카날섬에서 카와구치지대의 총공격이 무참한 실패로 끝났다. 햐쿠다케 제17군사령관은 가달카날섬 탈환을 우선하기 위하여, 23일 남해지대에 Israba와 Kokoda 부근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26일 남해지대의 제일선부대는 눈물을 머금고 철수를 개시하였다. 말할 수 없는 고투 끝에 포트모스비까지 50km를 남긴 채였다.

  여기 대하여 남서태평양지역사령관 맥아더 대장은 신예(新銳) 호주군을 포트모스비에 상륙시켜 9월 하순부터 남해지대를 추격시켰다. 남해지대는 뒤쫓는 호주군과 교전하면서 부나를 향하여 퇴각하였다. 굶주림과 병 때문에 장병은 풀썩풀썩 쓰러져, 그 상태가 가달카날섬과 마찬가지로 비참했다. 호주군은 11월 상순 코코다를 점령하고, 동월 16일에는 연합국군이 부나 남동쪽에 상륙하였다. 여기저기서 사투를 거듭한 뒤 부나 북서쪽 파사푸아 수비대는 12월 8일에 전멸하고, 이어서 부나 수비대도 ‘43년 1월 2일 드디어 전멸했다.

  이렇게 육로로의 포트모스비 공략작전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부근 동쪽지역은 연합국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전국(戰局)의 전환은 이제야말로 필지의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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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표
2013-10-29
22:32:48
크게보기 홍현다랑을 위해 수고가 많다. 귀한 글 잘 읽고 있다. 격려를 보냅니다.
홍현다랑 기금 모금 행사에 그대와 나 밖에 참여한 동문이 없구나.
그러나 태문이의 글 만으로 생기를 이어 가고있다. 감사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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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배
2013-11-06
17:46:00
크게보기 "홍현다란 기금 모금 행사"가 무었인가?
금시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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