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태평양전쟁번역 7

이선조 | 2013-11-09 15:54:12

조회수 : 2,208

키사카의 <태평양전쟁>-(7)
김태문 10-31 10:44 | HIT : 1,091
V-3 제2차세계대전의 전환점

<Guadalcanal섬 철수>
  가달카날섬에서 제2사단의 총공격이 실패로 끝난 지 2주일 뒤인 11월 7일 대본영․정부연락회의는 <세계정제판단>을 결정하였다. 그 결론에 해당하는 <종합판단>은 “당분간 피아의 전세(戰勢)는 추축측(樞軸側)에 유리하게 진전되겠으나, ‘43년 후반 이후가 되면 시일의 경과와 함께 피아의 물적(物的) 국력의 현격(懸隔)은 커질 것임”이라고, 남태평양방면의 전국의 주도권이 연합국군측에 넘어가고 있는 현실을 무시하였다. 대본영은 지금 한방 때리면 국면의 타개는 가능하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가달카날섬과 동부 뉴기니아의 전황은 악화일로를 거듭할 뿐이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최대난관은 보급문제이자 선박문제였다. 참모본부가 강력한 증원부대를 보내자면 많은 선박의 징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데 대하여, 육군성과 정부는 그렇게 선박을 징용하면 민간의 수송이 영향을 받아 생산력이 떨어지고 전쟁수행에 지장을 초래한다며 크게 대립하였다. 12월 5일 밤 각의(閣議)에서 참모본부의 의견이 거부된 것을 알고 격분한 타나카(田中新一) 참모본부 제1부장은 정부를 지지하는 사토(佐藤賢了) 육군성 군무국장을 때리고, 이튿날 토조히데키(東條英機) 수상겸 육상과 격론하다가 “パカヤロウ(개개끼)“라고 폭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타나카 중장은 파면되고, 통수부(統帥部)가 주도하는 가달카날섬 탈환방침에 커다란 브레이크가 걸렸다.

  하지만 군부 지도자들에게는 최전선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는 장병의 생명보다 체면쪽이 더 중요했다. 육군성도 참모본부도 해군도 부질없는 긴 논의<=오다와라효조(小田原評定)>를 거듭한 결과 12월 31일 드디어 가달카날섬 철수 및 부나방면 부대의 살라모아 방면 철수가 어전회의에서 결정되었다. 그 사이에도 많은 장병의 생명이 헛되이 사라지고 있었다.

  어전회의의 결정은 이듬해 ‘43년 1월 16일에 가달카날섬 정글에 있는 햐쿠다케 제17군사령관에게 전해졌다. 철수의 비밀은 엄중히 지켜져, 병사에게는 새로운 전투명령이 내려왔다고 말했다. 먼저 나왔던 야마모토 중위의 증언을 들어보자.

  내 부대는 “비행장 방면에 적전상륙을 감행하니 해안에 집결하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소총이 없는 병사 가운데는 나무 끝을 뾰족하게 깎아서 창을 만드는 자도 있었다. 나도 드디어 죽을 때가 왔다고 비장한 각오를 굳혔다. 그러나 그 뒤 이웃 부대의 연대장에게 불려가 살짝 진상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비밀을 엄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금까지 쇠약하여 걷지도 못할 정도이던 병사가 “잠수함으로 후송시켜 준다”는 말을 듣자말자 눈빛이 바뀌면서 무거운 소총과 배낭을 들고 걸음을 옮겨 깜짝 놀란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이 알려지면 부대기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은 뻔하고, 게다가 만일 미군에게 눈치채여 추격당하면 만사 끝이다.

  가달카날섬에서도 부나 부근에서도 철수에 즈음하여 걷지 못하는 장병이 자결하는 예가 연달았다. 가달카날섬의 제38사단장 사노 중장은 “사단에서는 철수 시 지금부터 단독행동 불가능한 자는 자결하라, 그 시점에서 전사(戰死)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 이래 총구를 자기 입에 물고 최후를 맞이하는 자가 적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일선부대의 철수는 1월 22일부터 시작되었다. 철수작전에는 20척의 구축함이 참가하여 2월 1일, 4일, 7일 3회로 나누어 10,652명의 장병이 야간탈출에 성공하였다. 이 때 미군은 약5만명으로 증강되어 있었지만, 일본군의 움직임을 새로운 증원부대의 상륙으로 잘못 생각하여 경계를 강화할 따름, 다행히 공격하지 않았다. 또 뉴기니아의 부나 부근에 남아있던 남해지대와 증원부대도 1월 중순부터 후퇴를 시작하여 상륙병력 11,000명의 약31%에 해당하는 약3,400명이 살라모아, 라에방면으로 철수하였다. 처음 각500명씩이었던 고사의용대와 조선의용대는 각각 65명과 15명에 지나지 않고, 강제징용되어 라바울에서 뉴기니아로 끌려온 현지주민 약1,200명에 대해서는 기록조차 없다.

<패배와 그 결과.
  방위청 방위연수소전사실(戰史室) <남태평양 육군작전(2)>와 코지마(兒島襄)의 <태평양전쟁((상)>등에 의하면 Guadalcanal섬 쟁탈전에서 양군의 손해는,
1. 일본군: 상륙병력 31,400명에 대하여 사자(死者) 20,800명(약66%), 이 중 순전사는 5,000~6,000명, 나머지는 아사(餓死)와 말라리아 등에 의한 병사(病死)임, 함정 24척(134,839톤), 항공기 973기, 탑승원 전사 2,362명.
2. 연합국군: 약6만명의 육군과 해병대 중 전사 1,598명, 전상 약4,709명, 함정 24척(126,240톤),
이었다. 또 육로를 따른 Port Moresby 공략작전에서 일본군의 손해는 상륙병력 11,000명 중 사자 7,600명(69%)이었다.

  이와 같이 많은 사자를 낸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은,
1. 안이한 정세판단을 기초로, 동부 뉴기니아와 가달카날섬의 두 정면작전을 강행하고, 특히 가달카날섬에서는 차례차례로 병력을 투입하여 격파당하는 전형적인 병력축차사용(逐次使用)을 행함.
2. 보급을 경시한 무리한 작전계획을 세움.
3. 체면에 구애되어 방침변경에 시간이 걸림.
4. 죽는 일을 명예로 생각하여 자결까지 강요하는 생명경시(生命輕視)의 사고방식이 계속됨.
5. 무엇보다도 막대한 전력(戰力)의 소모에 생산력이 따르지 못하고, 병기(兵器)의 면에서도 점차 열세에 들기 시작함.
등이었다.

  제8방면군 참모로서 Guadalcanal섬으로 가서 철수작전을 지도한 이모토(井本雄男) 중좌는 철수 직후의 <일지>에 “가달카날섬 작전에서 가장 깊이 세 번 성찰하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당시 대본영에 있으면서 이 방면의 작전을 계획한 통찰력 없고 앞도 못 보는, 그리고 제일선의 실정과 고심(苦心)을 살피는 능력이 없는 인간(나도 그 1인)들이 아닐 수 없다”, “가토(カ島)를 가토(餓島: 굶주림의 섬)로 만든 책임은 후방의 사령부, 대본영(육해군 함께)에 있다”고 적고 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이다.

  대본영은 2월 9일 가달카날섬과 부나 부근의 부대가 <신작전수행의 기초를 확립>하고, <타지로 전진(轉進)하였음>이라 하면서, 연합국군에 25,000명 이상과 230기 이상 격추파(擊墜破) 등의 타격을 주었으나, 일본군도 16,734명의 사자와 139기의 자폭 및 미귀환기를 냈다고 발표하였다. 이 때 이래 퇴각은 모두 <전진(轉進)>이라 불러 진상을 숨기는 발표가 뒤를 잇게 된다. 국민은 물론이고 군부의 최고지도자 가운데서도 이번의 <전진>이 태평양전쟁의 분기점이 되었다고 심각하게 받아들인 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 결과 Guadalcanal섬과 동부 New Guinea를 중심으로 하는 남태평양의 제해권(制海權)과 제공권(制空權)은 연합국군이 잡게 되었다. 연합국군의 반격개시와 일본군의 전략적 지구(持久)라는 태평양전쟁의 제2단계(‘42년 8월~’43년 2월)는 끝이 나고, 전국은 연합국군의 전략적 공세(攻勢)와 일본군의 전략적 수세(守勢)를 특징으로 하는 제3단계로 접어들었다. 가달카날섬과 동부 뉴기니아의 쟁탈전이야 말로 태평양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싸움이었다.

<유럽 전국(戰局)의 전환>
  같은 무렵 동유럽과 북아프리카의 전선에서도 커다란 전국의 전환이 찾아왔다.
  동부전선의 독일군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41년 12월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했으나, 이듬해 ’42년 5월부터 크리미아 반도에 대한 공격을 시발로 또다시 공세로 바뀌어 6월부터 Don-Volga 지협(地峽)지대와 코카서스 유전(油田)지대의 점령을 노리는 본격적 하계작전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은 각지에서 완강히 저항하여 특히 볼가강 중류서안에 있는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현재의 Volgograd)의 방위를 굳혔다. 그 때문에 히틀러(Adolf Hitler) 총통은 제6군사령관 파울루스(Friedrich Paulus) 대장에게 스탈린그라드의 탈취를 엄명하였다.
  
   기이하게도 연합국군이 가달카날섬 상륙작전을 시작한 것과 같은 8월부터 사상초유의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9월 독일 제6군이 시가지의 일각에 돌입하자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시민과 함께 필사적으로 저항을 시도하여 연일 처참한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그래서 11월 상순에는 소련군 지배지역은 시가지의 1할만 남았을 뿐이었다.

  한편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는 <사막의 여우>로 두려움의 대상이던 롬멜(Erwin Rommel) 장군이 거느리는 독일․ 이태리군이 이집트의 Alexandria 서쪽 약100km에 있는 엘알라마인에 육박하고 있었다. 여기 대하여 몽고메리(Bernard Montgomery)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은 10월 23일부터 반격으로 바뀌어, 11월 초에는 대손해를 입은 롬멜군이 리비아로 퇴각하였다. 그 직후인 11월 8일, 이미 3개월 전인 7월 25일에 미․영간에 결정되어 있던 북아프리카 작전(암호명 Torch)이 실시되어 약10만의 미영연합국군<총사령관은 미국의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장>이 북아프리카의 카사블랑카, 오랑, 알지에 3개소에 상륙하여 롬멜군을 협격(가위질 공격)하는 태세를 취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주도권은 독이군(獨伊軍)의 손에서 점차 미영군(美英軍)의 손으로 옮겨갔다.

  Torch 작전의 실시로부터 11일째인 11월 19일 소련군은 Stalingrad지구의 독일군을 외측에서 포위섬멸하기 위한 대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독일군은 11월 23일에는 완전히 <독안의 쥐>가 되었다. 겨우 이어지던 공수보급(空輸補給)도 이듬해 ‘43년 1월 14일 이후에는 끊어져 굶주림과 추위 때문에 독일군은 궁지에 빠졌다. 히틀러는 파울루스를 원수로 승진시켜 철저항전을 명했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힘이 다한 파울루스군은 1월 31일에 항복하였다. 이어 다른 독일군도 2월 2일에 항복하여, Stalingrad의 싸움은 소련군의 승리로 끝났다. 때마침 일본군은 한창 Guadalcanal섬 철수작전 중이었다.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의 승패가 두 진영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이 컸다.
  ‘41년 6월의 독소전(獨蘇戰) 개시부터 1년 7개월여 사이에 소련군은 독일 육군의 전병력 256개사단 중 대부분을 한데 맞아 힘든 싸움을 강요당해 왔는데 이 승리를 계기로 처음으로 전략적 수세에서 전략적 공세로 바뀌었다.

  스탈린그라드의 패배는 독일국민에게 중대한 충격을 주었다. 그 때까지 히틀러와 좋은 관계였던 국방군수뇌부 사이에 그의 작전지도(指導)에 대한 불신감이 생겨났을 뿐 아니라, 국민 사이에서도 히틀러에 대한 실망감이 퍼지기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자연발생적 항의데모가 일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태리를 비롯한 독일 동맹국의 동요도 심하여 이태리의 무쏠리니(Benito Mussolini) 수상은 3월 9일자 히틀러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빨리 독소전을 종결시켜 미영의 침략으로부터 이태리를 지켜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면 때를 같이하여 일어난 Gudalcanal섬과 Stalingrad 전투(戰鬪)의 승패야말로 제2차세계대전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최고지도자는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의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키도코이치(木戶幸一)일지>(하권)에 의하면 2월 12일 토조 수상은 천황에게 다음과 같이 상주하였다. “유럽 동방전장에서 독일군의 전황불리(戰況不利)의 영향, 점령지역 방기(放棄)는 대국(大局)으로 보아 큰 문제가 아닙니다”.

<Casablanca 회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의 패배가 결정적으로 되었던 ‘43년 1월 14일~25일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프랑스령 모로코의 Casablanca에서 회담을 열었다. 영국에 망명 중인 드골(Charles de Gaulle) 장군도 참가하였다. 스탈린 수상은 초청을 받았지만 국내의 군사정세가 급박하여 손을 뗄 수 없다고 출석을 사양하였다. 그 대신 그는 전년 8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처칠이, 서유럽 제2전선(미영군이 북프랑스에 상륙하여 독일을 동서에서 협격하기 위한 전선)을 ’43년 봄에 형성하겠다고 약속하고 돌아갔지만 그 구체안을 보여 달라고 강하게 요구하였다. 서유럽 제2전선의 형성은 독소전 개시직후부터 소련의 일관된 요구였다.

  이미 언급한대로 ‘42년 7월 25일 루즈벨트가 처칠의 주변포위전략을 승낙하는 형태로 북아프리카작전이 결정되었으므로 카사블랑카 회담도 처칠의 페이스로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 종래부터 유럽 제일주의의 군사전략이 재확인되고, ’43년에는 소련군이 유럽전선의 주력이 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대개 다음과 같은 것이 결정되었다.
  1. 북아프리카작전 종료 후 되도록 빨리 이태리의 Sicily섬 공략작전(암호명 Husky)을 실시하고 다시 이태리를 탈락시킴.
  2. 제2전선 형성을 겨냥하는 서유럽작전(암호명 Round-up)을 ‘43년 또는 ’44년에 실시하기로 하고, 그를 위한 전력(戰力)을 영국 본토에 집결시키는 작전(암호명 Porelo)을 추진함.
  3. 미국, 영국 양군은 공동으로 대독(對獨) 전략폭격을 실시함.
  4. 태평양의 미군은 전략적으로는 방위태세를 취하나 일본군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는 작전을 행하고, 그 작전에 전력을 사용해도 좋음.

  유럽 제2전선의 형성은 사실상 연기되어, 미군은 태평양에서 한층 적극적인 공세에 나서기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4)의 결정은 어디까지나 유럽작전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행하는 것으로 했고, 이 방침은 전쟁 종결시까지 바뀌지 않았다. 그 때문에 후쿠다(福田茂夫)의 <제2차대전의 미군사전략>이 똑바로 지적한 것처럼 “태평양전선에서는 최후까지 장기전략(戰略)이 정식으로 확인되지 않고, 이른바 전술(戰術)의 연속이라는 형태로 대일전쟁이 진행되게 되었다.”

  카사블랑카 회담 최종일인 1월 25일 루즈벨트는 기자회견 석상에서 갑자기 “일․독․이(日獨伊)에 무조건항복을 요구한다”고 발언하고 처칠도 이를 지지했다. 이 발언의 진의는, 일․독․이와의 단독강화의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제2전선형성의 연기에 대한 소련의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어디까지나 소련과 함께 추축제국(樞軸諸國) 타도를 위하여 싸운다는 것을 개인의 책임으로 언명했다는 데 있다.

  이리하여 ‘43년 2월 이후 연합국군의 본격적인 총반격이 아시아와 유럽 쌍방의 전선에서 시작되게 되었다.

크게보기
강신표
2013-10-31
11:50:12
크게보기 잘 읽고 있소. 수고가 많습니다.
스타린그라드 전투가 독일군에 결정타가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같은 시기 일본군이 가타카날 전투에서 철수하며 패전의 길로 접어
들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오.
크게보기
 
크게보기
윤정석
2013-11-02
21:52:43
크게보기 뒤에 지도를 따로 올렸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읽어 보세요.

김태문 동문의 이글은 독자가 1000명을 넘겼읍니다. 정말 우리가 알고 싶었던 내용인가 봅니다.
"태문아! 역시 잘한다."
크게보기
 
크게보기
김윤배
2013-11-03
15:22:16
크게보기 태문이에게,
기록 갱신을 축하합니다. 노력의 지당한 결과이고, 윤교수의 지도는 대단히 유용한 자료입니다.
강신표대표는 북 받은 대표이고....홍현다랑이 자랑스럽습니다. 오도광이도 저 위에서 좋아할 것이고....
아니 질투할지도 모르지.
그런데 나는 이 엄청난 긴 글에 질린다. 나는 도광이 글도 질려서 다 못 읽었다.
안 읽었다는 것이 정직하다. 태문이는 이 작업으로 잠이나 제대로 자느냐?
크게보기
 
크게보기
크게보기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79 Fun 다음
Fun 이전 현재페이지1 / 79 Fun 다음
© ::: 희망분당 700 원불교 분당교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