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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번역-9

이선조 | 2013-11-09 15:56:23

조회수 : 2,816

키사카의 <태평양전쟁>-(9)
김태문 11-04 06:50 | HIT : 819
II-2 국운(國運)을 건 결단

<위험한 선택>
  일본은 기습공격으로 태평양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45년 8월의 패전으로부터 37년 이상이 되어 전후태생이 인구의 과반수를 나타내기에 이른 오늘, 당시의 지도자는 어떤 판단을 근거로 개전(開戰)을 결의했는지, 일중전쟁을 싸우는 중에 왜 그런 무모한 전쟁에 돌입했는지 하는 의문의 소리가 곧잘 들려온다. 여기서 우선 태평양전쟁 돌입의 경과와 원인을 살펴보기로 하자.

  ‘37년 7월 7일의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일중(日中)전쟁은 3년 이상이 지나도 해결의 표적이 보이지 않고, 약85만의 일본군은 광대한 중국대륙에 못 박힌 채였다. 그간 공식, 비공식 화평교섭이 몇 번이나 열렸지만 그것은 모조리 실패로 끝났다. 그래서 ’40년 11월 30일 제2차 코노에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이 난징(南京)의 왕자오밍(汪兆銘) 정권을 정식으로 승인한 일은 일본이 중국을 제2의 만주국(滿洲國)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은 또한 충칭(重慶)에서 철저한 항전을 계속하는 장세스(蔣介石)의 중화민국(中華民國)정부와의 화평의 실마리를 스스로 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수렁이 되어버린 일중전쟁의 국면을 타개하려고 제2차 코노에 내각은 ‘40년 7월 26일의 각의(閣議)에서 <기본국책요강(基本國策要綱)>을, 다음 27일의 대본영-정부연락회의는 <세계정세의 추이(推移)에 따른 시국처리요강>을 결정하였다. 전자(前者)는 <대동아(大東亞)의 신질서의 건설>과 그것을 추진하기 위한 <국방국가(國防國家)체제>의 완성을 주장하고 <동년 10월 12일의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의 성립으로 실현됨>, 후자는 <대남방무력행사(對南方武力行使)>와 <독.이(獨伊)와의 정치적 결속 강화>를 정하고 있다.

  마쓰오카(松岡洋右) 외상의 구상에 의하면, 먼저 일독이(日獨伊)3국동맹을 맺고 거기에 소련을 보태서 일독이소(日獨伊蘇)4국협상을 구성하여 4국의 압력에 의하여 미국으로 하여금 아시아에서 손을 떼도록 하여 일중전쟁을 해결함과 아울러, 무력남진(武力南進)에 의하여 동남아시아를 제압하고 일본을 맹주(盟主)로 하는 <대동아의 신질서>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마쓰오카 외상은 8월 1일의 담화 가운데 처음으로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확립>이란 말을 사용했고, 이후 이것이 일본의 기본적 대외정책을 표현하는 공식 슬로건이 되었다.

  이런 방침에 의거하여 일본은 9월 23일에 북부불인(佛印=佛領印支의 약칭, 현 북베트남)에의 무력진주를 강행하여 Haiphong과 Hanoi를 통하는 원장(援蔣=장제스 원조)루트를 차단함과 아울러 군사기지와 자원의 확보를 꾀하고, 9월 27일에는 일독이(日獨伊)3국동맹을 체결하여 Tokyo-Berlin-Rome 추축(樞軸, Axis)을 형성하였다. 더욱이 일본은 북수남진(北守南進) 태세를 굳히기 위하여 이듬해 ‘41년 4월 13일에 일소(日蘇)중립조약을 체결했다. 이들 일련의 조치는 일본이 메이지(明治) 이래의 미영(美英)에 대한 의존에서 적대(敵對)로 기본방침을 전환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과연 일본의 방침전환은 미국과 영국의 반발을 야기하였다. 미국은 우선 중국과 영국에 대한 원조를 강화하여 일독이(日獨伊)3국동맹에 대항하는 자세를 보였다. 일본의 무력남진은 불인(佛印=佛領印支: 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태반을 식민지로 두고 있는 미국, 영국, 화란 3국에 대한 도전이고, 일본과 3국의 대립은 식민지의 재분할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띄었다. 미국은 일본의 무력남진을 저지하여 3국의 식민지권을 방위하기 위하여 ‘40년 7월부터 일본에 대한 석유와 고철(古鐵)의 수출제한을 실시하고, 10월에는 고철의 수출을 금지하였다. 일본과 미영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기 시작하였다.
  제2차 코노에내각에 의한 외교방침의 전환은 일본국민으로서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진이냐 북진이냐>  
  일소중립조약이 성립된 3일 뒤 ‘41년 4월 16일 워싱턴에서 일미교섭이 개시되었다.
  이미 ‘39년 9월에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영국이 독일, 이태리와 교전 중인 정세하에서는 대미영(對美英)협조와 대독이(對獨伊)제휴를 동시에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하였다. 일본이 일미(日美)관계를 호전시키려고 생각하면 대독이관계가 어느 정도 소원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일미관계의 호전을 겨냥한 코노에 수상 등은 마쓰오카 외상이 일소중립조약체결을 위하여 유럽을 방문 중에 일독이3국동맹이 가진 반미적(反美的) 성격을 완화하기 위한 내용의 <일미(日美)양해안>을 기초로 일미교섭을 개시하였다.

  귀국한 마쓰오카 외상은 <일미양해안>의 내용을 알고 격노하였다. 왈가왈부한 끝에 일본은 마쓰오카 외상의 주장대로 3국동맹의 견지를 기본으로 대미강경방침으로 교섭에 임했다. 여기 대하여 미국도 엄격한 대일태도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일미교섭은 난항하였다.

  그런데 6월 22일 독일은 독소불가침(獨蘇不可侵)조약을 깨고 돌연 소련을 공격하였다. 기습을 받은 소련군은 패퇴를 거듭하고, 전쟁은 유럽전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날 영국 수상 처칠은 소련을 <동맹국>이라 부르며 소련을 원조한다고 성명하였다. 소련의 조기 붕괴(崩壞)를 예상하여 처음에는 적극적이지 않던 루즈벨트 대통령도 7월 말에는 소련수상 스탈린에게 무기원조를 약속하였다. 여기서 미영소(美英蘇) 3국에 의한 반추축(反樞軸)연합이 형성되어 일독이소(日獨伊蘇)4국협상을 줄거리로 하는 마쓰오카 구상은 완전히 파탄하였다.

  독일에서 사전통고도 받지 못했던 일본으로서도 독소(獨蘇)전쟁은 기습적이었다. 일본의 지배층은 혼란에 빠졌다. 군부(軍部)와 정계(政界) 상층부 사이에서는 대소(對蘇) 즉시참전론(參戰論), 소련이 약체화(弱體化)하면 참전하자는 숙시주의(熟柿主義: 감이 익기를 기다림), 무력남진과 대미(對美) 개전론(開戰論) 등이 소용돌이쳤다.

  7월 2일의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정세의 추이에 따른 제국국책(帝國國策)요강>은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목적으로 하여 <남방진출 태세를 강화>하고, 이 <목적 달성을 위하여 대영미전(對英美戰)을 불사(不辭)함>과 동시에 <은밀히 대소(對蘇) 무력적 준비를 갖추고---독소전쟁(獨蘇戰爭)의 추이가 제국(帝國)에 유리하게 진전되면 무력을 행사하여 북방문제를 해결>한다는 남북병진론(南北竝進論)을 택하였다. 이 결정은 각 의견의 타협의 산물이었는데 태평양전쟁 개전(開戰)의 가능성을 처음 적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육군은 즉시 <관동군(關東軍) 특별연습-關特演-> 실시를 결정하고 7월 하순 이후 병원(兵員) 70만, 마필(馬匹) 14만 마리, 비행기 600기의 대군을 소만국경(蘇滿國境)에 전개하여 소련을 위협하였다. 그것은 일소중립조약을 사실상 침범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소련 극동군의 서송(西送: 유럽으로 보냄)은 일본의 기대대로 이뤄지지 않고, 독일이 연내에 소련을 굴복시킬 가능성도 없어졌으므로 육군은 8월 9일에 이르러 연내의 대소(對蘇) 공격계획을 중지하였다. 그래서 무력북진은 단념하였다.

  7월 18일 새로 제3차 코노에 내각이 성립하였다. 이 정변(政變)은 일미교섭에 방해가 되는 마쓰오카 외상을 사직시키고 일미충돌(日美衝突) 회피론자인 해군대장 토요다(豊田貞次郞) 상공상(商工相)을 외상에 앉히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7월 28일 군부는 남부불인(佛印) 진주를 단행하여 남방제압(南方制壓)에 필요한 군사기지를 확보하였다. 마닐라는 물론 싱가포르도 일본군의 공격권내에 들어왔다.

  일본의 암호해독에 성공했던 미국은 7월 2일의 어전회의의 결정을 7월 8일에는 알고 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대일제재조치(制裁措置)를 정한 7월 18일의 회의석상에서, 석유의 대일금수(對日禁輸)를 실시하면 일본은 난인(蘭印=和蘭領印度-Dutch Indies , 현 인도네시아)을 겨냥할 것으로 예측하면서 “그것은 태평양에서의 전쟁을 의미한다”고 결의까지 말했다. 루즈벨트는 7월 25일 재미일본자산(在美日本資産)의 동결령을 내리고, 26일에는 영국이, 27일에는 화란 총독(總督)이 수장(首長)인 난인정부(蘭印政府)가 그것을 따르고, 8월 1·일에는 미국이 석유의 대일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하였다. 그것은 전략물자를 미영(美英)진영부터의 수입에 매달려야하는 자원소국(資源小國) 일본의 아킬레스건(腱)을 바로 치는 조치였다.

<개전(開戰)의 결정>  
  미국 등이 대일(對日)경제제재를 강화한 일은 군부 내의 강경론을 분출(噴出)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7월 29일 나가노(永野修身) 군령부장(軍令部長)은 <석유 공급원을 잃게 되면  이대로는 2년의 저장량 밖에 없어서 전쟁이 벌어지면 1년반 만에 다 소진될 터이므로 차라리 치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천황에게 상주(上奏)하였다. 참모본부도 8월 9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연내의 대소(對蘇)작전을 중지하고, 남방무력진출에 따르는 대미영작전(對美英作戰) 준비에 전념할 방침을 채택하였다. 군부의 방침은 남북병진(南北竝進)에서 남진(南進)으로 정리가 되었다.

  9월 6일 어전회의(御前會議)가 열려 <대미(對美, 및 英蘭=영국+화란)전쟁을 불사한다는 결의 하에 대개 10월 하순을 목표로 전쟁준비를 완료하고>, 이와 병행하여 <외교 수단에 진력(盡力)>하지만 <10월 상순경까지도 우리 요구가 관철될 가망이 없을 경우에는 바로 대미(영란)개전을 결의한다>라는 시한부 개전(開戰)을 정한 <제국(帝國)국책수행요령>이 결정되었다. 일본은 종래의 <우리 요구>의 내용을 완화하지 않았으므로 일미교섭은 완전히 막혀버렸다.

  10월 상순이 되면 군부는 토조히데키(東條英機) 육상(陸相=육군상)을 선두로 개전의 결단을 정부에 강요하였다. 궁지에 몰린 코노에 수상은 10월 16일 총사직을 택했다. 사표에는 이례적으로 토조(東條) 육상과 “4차례의 간담(懇談)으로도 결국 동의(同意)에 이르지 못함”이라고 썼다.

  10월 18일 <육군을 누르려면 육군으로>라는 키도(木戶幸一) 내대신(內大臣)의 추천으로 토조 내각이 성립하였다. 토조히데키는 1884년생 56세. 일찍부터 국가총력전의 필요성을 외치며 선배인 나가타(永田鐵山) 등과 함께 통제파(統制派)를 형성하다가, 나카타 사후에는  통제파의 중심인물로 군정(軍政)에 수완을 발휘해왔다. 엄격하고 꼼꼼하고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여 <면도칼>로 불리는 전형적 능리(能吏=능력있는 관리)형 군인이었으나 뛰어난 경륜(經綸)을 가지지는 못했다.

  키도와 마찬가지로 개전에 불안을 느낀 천황은 9월 6일의 결정을 재검토하라는 <백지환원(白紙還元)의 분부>를 토조에게 내렸다. 그러나 8회에 걸친 대본영-정부연석회의의 검토를 거친 뒤 11월 5일의 어전회의에서 <대미영란(對美英蘭)전쟁을 결의하고>, <무력발동의 시기를 12월 초순으로 정하고>. 일미(日美)교섭의 기한을 12월 1일 오전0시로 하는 등의 <제국국책수행(國策遂行)요령>이 결정되었다. 일미교섭은 여전히 계속되었지만 그것은 개전준비를 마치기 위한 시간벌기에 불과하였다. 그 뒤 11월 26일의 Hull Note의 제시를 거쳐 12월 1일의 어전회의에서 <8일 개전>의 결단이 내려졌다.

  만주사변(滿洲事變)과 일중전쟁(日中戰爭)이 모두 현지 군부의 독주(獨走)에 의하여 시작된데 대하여 태평양전쟁의 개전(開戰)은 7월 2일부터 12월 1일까지 5개월간에 4회의 어전회의를 포함한 많은 정식회의를 거듭한 끝에 결정되었다. 천황을 정점(頂点)으로 하는 정부와 군부의 수뇌부가 주체적 판단으로 자기 책임으로 개전을 결정한 것이다.

<절대로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면 그들은 전쟁에 이길 예상을 하고 있었을까?
  <제국국책수행요령>을 결정한 9월 6일의 전날, 천황은 스기야마하지메(杉山元) 참모총장과 나가노오사미(永野修身) 군령부총장을 돌연 궁중으로 불러들여 코노에 수상이 입회한 가운데 작전계획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남방작전은 5개월에 완료한다는 스기야마에게 천황은 “그대가 대신일 때 장세스(蔣介石)는 곧 항복할 것이라고 말했는데 여태 안 되지 않는가?” 라고 불신(不信)을 표한 뒤 “절대로 이길 수 있겠는가?(큰 소리로)”라고 물었다. 스기야마는 “절대라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승산(勝算)이 있다는 것만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긴다고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고 애매한 대답밖에 할 수가 없었다.

  또 나가노도 11월 4일 천황 임석하의 군사참의원회의 석상에서 동남아시아 요역(要域)을 공략하는 제1단계작전에는 “승산이 우리에게 많음”, “개전 2년간은 필승(必勝)의 확신이 있으나---장래의 장기(長期)에 걸친 전국(戰局)에 대해서는 예견하기 어려움”이라 말했고, 토조 수상도 “전쟁의 단기종결(短期終結)은 희망하는 바이고 여러 가지 고려할 바가 있지만 명안(名案)은 없음. 적의 숨통을 조일 수단이 없어 유감임”이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통수부(統帥部)의 최고책임자와 수상이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들이 확신을 가질 이는 없다.

  특히 키도(木戶) 등 궁중(宮中)그룹은 패전(敗戰)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컨대 제3차 코노에(近衛)내각의 총사퇴 때 키도가 토조 육상(陸相) 등이 주창하는 황족내각설(皇族內閣說)에 강력히 반대한 것은, 황족내각에 의하여 개전(開戰)이 일어나 <만일 예기(豫期)한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면 황실은 국민의 원부(怨府)가 될 우려>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패전이 천황제(天皇制)의 위기를 야기할 것을 예측하고, 천황주권(天皇主權)의 정치체제인 <국체(國體)>를 지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것이 그들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죽음 가운데 삶을 구하다>
  승리의 확신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고지도자들은 왜 개전을 결의하였을까? 그들이 개전에 뛰어든 주된 이유와 논리는 세 가지였다.
  제1은 일본이 미국에 굴복하여 중국에서 철병(撤兵)한다면 만주사변과 일중전쟁의 성과가 모두 허사(虛事)가 되고, 만주국(滿洲國)도 조선통치(朝鮮統治)도 위험해질 뿐만 아니라, 수십만의 전사자와 수많은 희생을 치룬 국민에 대하여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이다. 토조 육상은 10월 14일의 각의(閣議)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미국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면 지나사변(支那事變=일중전쟁)의 성과는 사라지는 것이다. 만주국도 위태롭게 되고. 또 조선통치도 위태로워진다. 제국(帝國)은 성전(聖戰)의 목적에 비추어 무병합(無倂合), 무배상(無賠償)을 하고 있다. 지나사변은 수십만의 전사자, 그 몇 배의 유가족, 수십만의 부상자, 수백만의 군대와 1억(億) 국민에게 전장(戰場)과 내지(內地=일본 본토)에서 신고(辛苦)를 거듭 겪도록 하고, 여태 수백억의 국비(國費)를 썼다. (중략) 교묘한 미국의 압박에 굴복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제2는 그들은 말없는 국민에게 이루 말할 수없는 두려움을 느끼고, 전쟁회피(戰爭回避)로의 정책전환을 하면 국민의 불만이 폭발하여 내란이나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위구감(危懼感)을 가졌다. 키도는 전후 스가모(巢鴨)형무소에서 집필한 수기 <전쟁회피의 노력> 에서 주전론자(主戰論者)인 토조를 후계수상으로 추천한 진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부불인(南部佛印)까지 군대를 내보낸 터여서 한번 육군의 통제가 흔들리면 현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 소위 자위권(自衛權)의 발동을 행하게 될지 모르고, (중략) 대명(大命)을 받은 자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서는 국내는 대혼란에 빠지거나 혹은 내란상태까지 진전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아시히신문(朝日新聞) 대표이사 겸 주필이었던 오가다(緖方竹虎)도 그 무렵의 국내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당시의 국내정세를 과장하여 말하자면, 밖으로 전쟁에 호소할까 안으로 내란을 치를까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길 밖에 없는 시국이었다. 그만큼 군(軍)과 거기 이끌린 호전적(好戰的) 추세를 억제하기 어려운 사태였다.”

  제3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이 결여된 모험주의적 심정을 바탕으로 심한 고의의 낙관(樂觀)을 행하는 것이었다. 토조는 11월 4일의 군사참의원회의 석상에서,
  “우리는 2년 뒤의 예측이 분명치 않다고 가만히 있다가 자멸(自滅)로 끝나기보다는 난국을 타개하여 장래의 광명을 구하기를 바라고 있다. 2년간은 남방의 요역(要域)을 확보하기에 전력을 다해 노력하면 장래 전승(戰勝)의 바탕은 이로써 얻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단언했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보다 1이든 8이든 치고 나가야 하고, 전쟁에 의하여 죽음 가운데 삶을 구해야한다는 것이었다. 11월 29일 대미(對美)신중론자인 해군대장 요나이(米內光政) 전수상은 천황과 줄지어 앉은 중신(重臣)들 앞에서 “여우를 피하려고 호랑이를 만나지 않도록 충분히 주의하기 바란다”고 발언했는데 3년 8개월 뒤의 사태는 요나이의 예언이 적중하는 결과가 되었다.
  
  최고지도자들 가운데는 개전(開戰)에 의문을 던지고 불안을 표명한 이는 있었으나 자기 지위와 신명(身命)을 걸고 단호하게 전쟁을 저지하려고 행동한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예측이 빠진 전쟁준비>        
  일미개전(日美開戰)에 뒤따르는 최대의 불안은 일미 양국의 경제력 격차가 너무나 큰 데 있었다. 아래 표에서 알겠지만 ‘41년 미국의 중요물자 생산고는 일본의 76.7배나 되었다.

       일미(日美)의 주요물자 생산고비교(일본을 1로 하여 미국의 배율)        
        석탄-석유-철광석-선철-강괴-구리-아연-납-알미늄-수은-인광석-<산술평균>  
’38년   7.2-485.9-37.5- 7.3- 4.5- 5.3-  7.5-31.3- 8.7-24.8-45.2- <60.5배>      
‘41년   9.3-527.9-74.0-11.9-12.1-10.7-11.7-27.4- 5.6-(   )-(   )- <76.7배>
‘44년  13.8-956.3-26.5-15.9-13.8-11.3- 9.5-11.6- 6.3-(   )-(   )-<118.3배>

  특히 심각한 것은 석유였다. 11월 5일의 어전회의에서 쓰즈키(鈴木貞一) 기획원 총재가 설명한 바에 의하면 국내보유량은 840만kl인데, 국내석유의 증산이 기대되지 않는 일본으로서는 민수용 연간 180만kl로 추정하고 부족분을 군수용(軍需用)에서 전용(轉用)하여 충당해도 3년 후인 ‘44년 말에는 군수용, 민수용 모두 수급곤란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방작전이 성공하여 보급로가 확보된다면 1년째인 ‘42년에는 85만kl, 2년째에는 260만kl, 3년째에는 530만kl를 공급할 수 있다고 쓰즈키는 말했다. 토조 수상이 전쟁 가운데 <장래의 광명>을 들먹인 것은 이와 같은 숫자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주) kl=킬로리터(천리터), 5드럼

  이와 같은 예측을 정하면 제1단계작전<남방작전과 Hawaii작전>의성공은 지상명령(至上命令)이 된다. 스기야마 참모총장은 11월 4일의 군사참의원회의에서 남방작전에 대하여 대체로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1. 공략지역은 Malay, 필리핀, 난인(蘭印=和蘭領印度-Dutch Indies, 현재의 인도네시아), Burma, Timor섬 등으로 그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연합국의 정규군 총병력은 병원(兵員) 222천 내지  232천, 비행기 약610기로 추정됨.
  2. 연합국군의 병원(兵員)은 2년 전에 비하여 약4배로 증강되어 있으나 백인 본국병은 약30%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전투능력이 낮은 현지병이고, 병력은 광대한 지역에 분산되어 협동작전이 곤란할 뿐만 아니라 인도와 호주로부터의 증원은 곤란함.
  3. 일본 육군의 총병력은 51개 사단이고, 그 가운데 만주와 조선에 약15개 사단, 중국에 약24개 사단이 배치되어 남방작전에는 약11개 사단을 사용함.

  그 밖에 육군의 비행기 700기와 해군의 비행기 약1,400기가 참가하여 기습공격으로 선제(先制)하여 집중공격으로 연합국군을 각개 격파함. 작전기간은 약5개월로 되어 있었다.
  스기야마는 남방작전에 관하여 “우리에게 절대적 확산(確算, 확실한 승산)이 있다고 믿고 있음”이라고 자신만만하였다.

  또 나가노 군령부총장은 이튿날 어전회의에서 “미국의 함대를 10으로 치면 일본은 7.5이고, 미함대의 4할은 대서양에, 6할은 태평양에 있음. 영국은 대단히 크지만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함. 전함 1, 순양함 10수척, 항공모함 약간으로 생각함”이라고 말하고, Hawaii 기습작전이 성공하면 2년간은 충분히 싸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와이작전의 계획은, 유달리 지기 싫어하고 내기를 좋아하는 항공주병사상(航空主兵思想)의 주인공 야마모토이소로쿠(山本五十六) 연합함대사령관의 발의로 매듭지어졌다.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를 고집하여, 공격해 오는 미국 태평양함대를 전함에 의한 요격결전(邀擊決戰)으로 격파할 것을 기본전략으로 삼았던 해군부 내에서는 이 계획이 무모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으나 연합함대의 강한 요망에 따라서 9월 24일에 정식 결정되었다. 하와이작전의 주목적은 <남방자원지역을 공략하여 미함대의 요격배비(配備)가 완료될 때까지 미국 주력함대의 내공(來攻)을 저지함과 아울러 적함대 세력의 점감(漸減)을 도모함>이라고 하였다.

  태평양전쟁 개전시 일미(日美)의 해공병력(海空兵力)을 비교하면 해군력은 다음과 같다.
   일본=항모 10, 전함 10, 중순 18, 경순 20, 구축함 112, 잠수함  64, 합계 234척
   미국=항모  7, 전함 17, 중순 18, 경순 19, 구축함 214, 잠수함 114, 합계 389척      
  공군력에서는 연합국군의 태평양 방면배비 약1,300기에 대하여 일본은 육군 4,826기, 해군 2,120기, 합계 6,946기를 보유하고, 그 중 약2,600기가 제1선기였다. 기습에 의하여 연합국군에 대타격을 줄 수 있다면 1~2년은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숫자였다.

  이러한 숫자의 뒷받침이 최고지도자들에게 개전(開戰)을 결단하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제1단계작전에 관한한 그들은 절대적인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 전체의 예측과 전략이 빠진 채 개전에 돌입한다는 것은 너무나 경솔하고 무모한 결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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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문
2013-11-04
07:11:21
크게보기 이 글은 <태평양전쟁>-(2)에서 생략했던 부분을 번역한 것으로 일본이 개전을 결의하기까지의 과정을 추가하였다.
참고로 당시 일본의 정부구조는 내각과 군(軍)이 별개로 독립되어 있어서 군은 수상(首相)=총리대신 지휘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황직할이었던 모양이다. 내각을 구성할 때 육상(=陸軍相)과 해상(=海軍相)은 군부의 추천으로 현역중에서 임명되고 도중에 육상이나 해상이 사퇴하면 내각이 와해되는 구조였던 것 같다. 그 점에서 북한의 군부가 내각이 아닌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국방위원장의 지휘를 받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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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석
2013-11-05
09:13:10
크게보기 태문이의 생각이 맞다. 일본의 정치 권력은 2분되어 있다. 특히 북한에 대한 태문이의 추측은 아주 적중한 판단이다.

내가 가르치는 PPT자료를 여기에 올린다.

나도 북한의 통치 이론이 주체사상에 있는것이 아니라 일제시대에 일본을 배워온 노병들 가운데 일본의 군사정치를 잘 아는자가 김일성과 김정이릉 지도한 것 같다. 특히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군에서 배운 것을 지금까지 주장하는 것 같이 보인다. 패쇄사회의 총체적인 결함이다. 전번에 황장엽의 주체사상도 천황의 국체론이 지닌 사상적 배경과 같다고 여기에 기술 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지금의 북한은 일본이 대동아전쟁을 준비할 때와 마찬가지로 국력의 총체적 비교 없이 남북통일의 군사적 성취라는 "理想"에 빠져서 경험 없는 어린 김정은도 허우적 거리는 것 같다. 전쟁은 돈이 있어야 치룰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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