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조 2013-11-09 15: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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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사카의 <태평양전쟁>-(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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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X 만주, 조선, 대만의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 정책 IX-1 <왕도낙토(王道樂土)> 만주(滿洲)의 실상 (전부 생략) IX-2 조선, 대만의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 <빼앗긴 언어와 성명(姓名)> 조선(朝鮮)과 대만(台灣)의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는, 현지 주민을 강제적으로 일본인에게 동화(同化)시킨다는 철저한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과 경제개발을 통하여 시행되었다. 일본에서 대정익찬회(大政翼贊會)가 결성된 1940년(쇼와 15) 10월 조선에서는 그 때까지 있던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國民精神總動員朝鮮聯盟)이 국민총력조선연맹으로 개칭되고, 관제국민운동의 일원화(一元化)가 달성되었다. 이 연맹은 <거국일치(擧國一致), 견인지구(堅忍持久), 진충보국(盡忠報國),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정익찬회와 마찬가지로 중앙에서 말단에 이르는 조직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행정조직과 표리일체화(表裏一體化)하여 모든 주민을 조직화하였다. 일본의 토나리구미(隣組)에 해당하는 애국반(愛國班)은 약10호로 이뤄져 궁성요배(宮城遙拜), 근로저축(勤勞貯蓄), 일장기게양(日章旗揭揚), 진자삼파이(神社參拜), 일본어상용(常用), <코고쿠신민노세이시(皇國臣民の誓詞)>제창(齊唱), 근로봉사, 국민복/전투모 착용(着用) 등의 일상활동에 조선인을 동원하였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의 결성은 천황제(天皇制) 파시즘의 조선판(朝鮮版)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일중전쟁이 시작되자 황민화정책이 급속히 추진되었다. 조선총독부 등에 근무하는 조선인관리와 지방의원에 대해서는 국어(=일본어) 상용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38년 2월에 공포된 새로운 조선교육령에 의하여 조선어(朝鮮語)는 선택과목으로 바뀌고, 학교에서 조선어의 사용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이와 동시에 학교의 명칭을 일본과 같이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하고, 교과서와 재학연한도 같아져서 교과(敎科)에 관해서는 조선어를 제외하면 동일하게 되었다. 더욱이 ‘42년이 되면 <국어보급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강습회 개최와 <국어교본> 배포 외에 도청(道廳)에 대한 전화는 일본어가 아니면 받지 않는다는 등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일본어를 이해하는 조선인의 수는 다음과 같이 증가했지만 그래도 ’43년 전인구에서 점하는 비율은 22%에 불과했다. (인원: 만명) ‘28년 129(6.9%), ’38년 272(12.4%), ‘40년 357(15.6%), ’43년 572(22.2%) 일본어의 강제 이상으로 조선인에게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안긴 것은 <창씨개명(創氏改名)>이었다. 그것은 ‘39년 11월에 개정된 조선민사령(民事令)에 의하여 제정된 것으로, 조선 민족고유의 성명제(姓名制)를 폐지하여, 호주(戶主)에게 일본식 씨명(氏名)을 정하여 신고하도록 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강제가 아니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관헌(官憲)이나 학교의 교사 등을 총동원하여 협박이나 압력을 가했다.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자제의 입학이나 진학의 거부, 취직의 거부나 해고, <비국민(非國民)> 또는 <후테이센진(不逞鮮人, 불온한 조선인)>이란 낙인을 찍어 경찰수첩에 기입하고, 식량이나 물자 배급의 정지, 철도국이나 운송점에서 하물(荷物)의 취급거부, 교사가 아동을 질책, 구타하여 아동으로 하여금 부모의 창씨를 애원하게 만드는 등 악랄하고 음험한 압박을 가했다. 조선인 가운데에는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 죽음으로 항의한 사람도 있고, <창씨개명>은 하되 조롱하는 이름을 씀으로써 저항을 시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컨대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빗대어 <덴노헤이카(田農丙下)>, 당시의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육군대장의 위에 간다고 <미나미타로(南太郞)>, <이누쿠소쿠라에(犬糞倉衛, 개똥)>, <이누우마우시부타(犬馬牛豚, 개말소돼지)>라고 하는 성명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40년 8월까지의 기간 안에 전호수의 약8할에 해당하는 약322만호가 신고하였다. 또 조선총독부는 ‘36년 8월 이후 일면일진자(一面一神社, 면마다 진자 하나)주의의 원칙을 내세워 산간벽지의 면(面, 일본의 무라村에 해당)까지도 진자(神社)나 신시(神祠)를 세우고, 조선인의 참배를 강제하였다. ‘43년 4월 현재 조선에는 진자가 65, 신시가 835나 세워졌다. 게다가 조선인의 각 가정에는 카미다나(神棚)을 만들게 하여 천황가의 선조인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타이마(大麻, 伊勢神宮의 오후다-御札)를 빌도록 했다. 이들 황민화정책을 뒷받침한 것은 내지(內地=일본)와 조선은 일체(一体)라야 한다, 조선인을 보다 완전한 일본인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나이센잇타이(內鮮一体)>론이었다. 이 이론은 일본의 지배층 쪽에서 보면, 현실에 존재하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온존(溫存)한 채 조선인의 민족성을 빼앗아 일본인에게 동화시키는 것을 의미하고, 결코 조선인과 일본인을 대등평등하게 대우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환언하면, <내선일체>론은 한편에서는 동화(同化)와 차별을 혼재(混在)시켜, 그 모순을 지적하면 “조선은 민도가 낮아서”라는 이유로 이것을 합리화하고, 다른 편에서는 조선인에게 “차별에서의 탈출”이라는 환상을 심어주어 일본의 지배체제 안으로 끌어들이고 마는 매우 교묘한 제국주의 지배의 논리였다. <일본어를 말하는 신병(神兵)> 황민화정책의 정점(頂點)에 놓인 것이 청년특별연성소(鍊成所) 설치와 징병제 실시였다. 청년특별연성소는 ‘42년 10월 1일에 공포된 조선청년특별연성령(鍊成令)에 의거하여 조선에 사는 17세 이상 21세 미만의 조선인 남자로 <국민교육불침투분야(不浸透分野)>의 청년을 강제로 모아 <렌세이(鍊成)>를 행하는 시설이었다. 연성령의 목적은 장래 <황군병사(皇軍兵士)>와 <황국노무자(皇國勞務者)>가 될 때까지 자질을 기르는 것이었다. 연성소에는 공립과 사립이 있어, 공립의 경우는 초등학교장이 소장을 겸임하였다. 연성기간은 원칙으로 매년 4월부터 거의 1년간으로 하여 600시간 이상(하루 3시간, 주당 4회)의 연성을 행하되, 훈육, 학과, 교련 및 근로작업을 통하여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코고쿠민(皇國民)>으로서 자각을 높이도록 가르쳤다. 연성소가 개설된 것은, 당시 의무교육제가 시행되지 않던 조선에서 반수(半數) 가까운 징병적령자가 미취학자(未就學者)였던 탓에 국어 보급에 힘을 쏟은 것은, 일본어를 모르는 병사나 노무자는 소용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주간의 중노동으로 지친 청년을 모아, 일본어를 가르치고, 천황폐하의 고마움과 병역(兵役)의 의의를 아무리 설교해도, 그것은 결국 일본인측의 일방적 밀어붙이기에 지나지 않았다. 이미 조선에서는 ‘38년에 육군특별지원병(志願兵)제도가 도입되어, ’43년까지 사이의 지원자 총수80만5513명 중에 2만3681명이 채용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개시 직후부터 육군성군무국(陸軍省軍務局)이 중심이 되어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는 일이 검토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인적국력(人的國力)의 소모를 극력회피>하기 위하여 <외지민족의 활용>을 도모하여, 일본인의 총받이로 조선인을 이용하자는 발상에 바탕하고 있다. “일본어를 십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병대(兵隊)로 삼아도 괜찮은가?”, “반일감정(反日感情)이 강한 조선에 징병제를 행하는 것은 무리다” 등의 목소리가 컸지만, 육군당국으로서는 “등을 배로 바꿀 수는 없다=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 본심이었다. 그러면 황민화정책과의 관계로, 징병제는 어떤 의의를 부여했는가? 미야다(宮田節子)의 <황민화정책과 민족저항>에 의하면 징병제는 다음과 같은 의의를 부여받았다. 1. 징병제는 진정 <내선일체(內鮮一体)의 구현>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징병제야 말로 내선(內鮮)의 차별을 철폐”하는 것이고, 다른 편에서는 자기 자제를 전장에 보낸 조선인가족의 골육의 정을 통하여 <제국과의 운명공동체>로서 <내선일체>감을 끌어내어 조선인을 감성면(感性面)에서 황민화하려는 것이었다. 2. 징병제는 황민에게만 나눠주는 특권이고 최대의 명예라고 하였다. 3. 징병제의 시행으로 조선인이 <대동아공영권> 안에서 <지도적 지위>에 놓였음이 보증되었다는 의의를 부여하여 달콤한 환상에 빠지게 하였다. 이렇게 징병제는 ‘44년 4월부터 시행되어 ’45년 8월 패전까지의 단기간에 육군 186,980명, 해군 22,299명, 합계 209,279명의 조선인 청년이 강제적으로 병사가 되어 전장에 투입되었다. 징병된 병사들은 일본어를 말하는 <신병(神兵)>으로 치켜세워졌지만 그 본질은 일본인의 총알받이였다. 조선인 병사가 기껏 할 수 있는 저항은 도망이었다. 야간에 화장실에 간다고 잠옷차림으로 병영에서 내빼든가 온갖 틈을 보아 도망쳤다. 그렇게 일단 도망치면 내지(內地)*의 일본병과 달리 그들을 숨겨주는 민중은 얼마든지 있었다. 거기에 황민화정책과 그에 저항하는 조선민중의 날카로운 모순이 드러났었다. 주) 내지(內地): 조선, 대만과 구분하여 일본 본토를 일컬음. <조선경제의 군사화(軍事化)와 쌀의 공출(供出)> 국가총동원법을 비롯한 각종 통제법은 조선에도 적용되었다. 조선은 일본 전쟁경제의 일환으로 꾸며져, 경제군사화에 의한 생산증강과 공업자원/식량공급지의 역할이 맡겨졌다. 다음은 박경식(朴慶植)의 실증적 연구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하)>에 의하여 그 일단을 밝힌다. 조선의 공업은 숫자상으로는 일중전쟁부터 태평양전쟁 중에 걸쳐 발전하였다. 예컨대 1937년과 ‘43년의 공장수를 비교하면 6,298이 14,856(1.4배)으로, 노동자수도 약21만명이 약55만명(2.6배)으로 증가했다. 공업의 부문별생산액의 비율을 보면 ’37년에는 방적과 식료품공업의 합계가 39%, 금속․기계기구․화학공업의 합계가 39%였는데, ‘43년에는 36% 대 49%로 역전하고, 특히 금속공업의 비율은 5%부터 14%로 급증한 것이 눈에 띈다. 이 같은 중화학공업부문은 어느 것이나 군수생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광업을 살펴보면, 일본은 철광, 석탄, 연광석, 마그네사이트 등 많은 광산자원을 조선에 의존해 왔고, 특히 흑연, 운모, 코발트광은 거의 조선에 의존하였다. 그 때문에 각 기업은 채굴에 전력을 기울여 ‘42년의 전광산액은 ’37년의 약3배나 되었다. 그리고 ‘42년 조선의 산업에서 일본 독점자본의 산업설비 자본투하비율은 74%로 압도적 점유율을 보였고, 그 중 반수 가까이는 노구치(野口遵)의 닛지쓰(日窒)콘체른과 아이카와(鮎川義介)의 닛산(日産)콘체른 두 신흥재벌이 점하여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등 구재벌은 약1할여에 그쳤다. 그 반면 중소기업은 ’42년의 기업정비령에 의한 정비통합이 추진되어 많은 조선인 기업이 대기업에 통합되었다. 이와 같이 전시하(戰時下)의 조선경제는 일본의 독점자본을 선두로 하는 경제군사화의 방향을 따라 발전했지만, 그렇다고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이 좋아진 것은 아니다. 1942~44년도의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내지의 일본인 노동자 임금의 평균 50~55% 정도였다. 기타 노동조건도 열악하여 ‘40년 전후에 50인 이상의 노동자를 사용하는 공장과 사업장의 복리시설 상황은, 의료시설이 있는 곳이 공장 12%에 광산 22%, 기숙사가 있는 곳이 공장 33%에 광산 43%, 목욕탕이 있는 곳이 공장 34%에 광산 4%였다고 한다. 노동시간도 ‘43년 6월에 공장취업시간제한령이 폐지된 탓에 12시간 노동이 일반적이 되고, 거기다 식량 결핍이 겹쳐져 병자와 노동재해도 증가하였다. 한편 농촌에서는 여전히 견고한 지주의 지배가 행해졌다. ‘42년의 농가호수를 보면, 자작농 약53만호(17%), 자소작농(自小作農) 약73만호(24%), 소작농 약164만호(54%)으로 약8할의 농가가 지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고율(高率)의 소작료를 지주에게 내야하는 소작농과 자소작농의 생활은 가난했다. 게다가 농민은 쌀농사를 강제로 지을 뿐 아니라, 그 쌀을 강제적으로 공출당했다. ’40년 이후 쌀 공출과 대일본 수출 실태는 다음과 같다. 조선쌀의 생산, 공출, 수출(생산-공출-수출, 단위 천석) ‘40년: 21,527- 9,208- 4,232 ’41년: 24,885-11,255- 6,278 ‘42년: 15,687- 8,750- 1,303 ‘43년: 18,718-11,957- 4,121 ’44년: 16,051- 9,634- 1,756 쌀의 공출은 관헌을 총동원하여 시행되었다. 태평양전쟁 중에 수확고의 6할 전후를 공출당한 농민 가운데는 해조류, 풀, 나무열매 등으로 허기를 견디는 사람이 많았다. 조선인 농민은 일본인에 의한 쌀의 약탈을 원망하였다. 황민화정책을 추진하는 일본 지배층의 생각과는 반대로 공출기피, 관헌과의 대립, 반일사상의 확대 등의 움직임이 퍼졌다. <일본에 대한 굴복과 저항> 섬뜩한 황민화정책과 경제수탈이 진행되는 중에도 여러 가지 움직임이 나타났다. 황민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하여 친일적(親日的) 지식인을 동원하게 되었다. 이미 ‘39년 10월에 결성된 조선문인협회가, 실천요강으로 <국어화>의 촉진 등을 내걸고 황민화정책에 협력하였지만, ’43년 4월에는 동협회 등 5개 단체가 합류하여 조선문인보국단(文人報國団)이 조직되었다. 또 ‘45년 6월에는 언론인에 의한 조선언론보국단이 결성되어, <내선일체>, <대동아공영권건설>을 위한 사상전이 전개되었다. 민족운동의 지도자이자 조선근대문학의 선도자인 이광수(李光洙)처럼 카야마코로(香山光郞)로 <창씨개명>하고 황민화정책에 적극 협력한 사람, ‘63년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박정희(朴正熙)처럼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중위 타카키마사오(高木正雄)로 관동군에 배속되었던 사람 등 선택의 길은 여러 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도 조선인이면서 일본제국주의의 정책에 협력하는 일의 께름칙함과 좌절감은 심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탄압도 여전히 심각하여 ‘42년부터 ’44년 상반까지 2,481명의 <사상범>이 체포되고, ‘43년 12월에는 정치범의 예방구금소가 설치되었다. 특히 상징적인 것은 ’42년 10월에 일어난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탄압사건이었다. 일본의 관헌은 조선어사전의 편찬을 추진 중이던 이 학회를 “학술단체를 가장한 독립단체이다”라 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33명을 체포하였다. 체포자는 혹독한 고문을 받아, 2명이 옥사(獄死)하고, 9명이 6년 이하의 징역(그 중 5명은 집행유예)에 처해졌는데, 이 사건은 조선인으로부터 모국어를 빼앗으려는 황민화정책의 일환이었다. 또 노동자의 스트라이크와 소작쟁의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같은 무렵 김일성(金日成)이 거느리는 조선인민혁명군은 조선국경에 가까운 만주의 동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소부대로 나뉘어 항일유격전을 거듭할 뿐만 아니라 때때로 조선 내부까지 진입하였다. 예컨대 오백룡을 우두머리로 하는 소조는 ‘41년부터 3년간 수십회에 걸쳐 조선에 들어와 때로는 청진, 나진, 원산부터 멀리 평양방면까지 진출하여 일본군의 배치상황과 요새, 항만 등을 정찰하는 한편 민중공작을 대담하게 행했다. ’44년경이 되면 일시 탄압에 의하여 궤멸상태에 빠졌던 조국광복회의 지하조직이 재정비되어 몰래 활동을 재개했다. 인민혁명군의 민중공작은 이 같은 활동과 연락을 행하며 진행되어 효과를 거두었다. 김일성이란 이름은 이런 활동을 통하여 구전(口傳)으로 퍼져서 민중 사이에 점점 유명해졌다. 그 밖에 ‘44년 8월에는 민족주의자인 여운형(呂運亨) 등을 지도자로 하는 조선건국동맹이 경성(京城, 현 서울)에서 몰래 결성되어 국외에 있던 민족주의자들과 연락을 개시하였다. 한편 중국에서는,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延安)에 있던 조선의 사회주의자가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여, 팔로군과 함께 화북(華北)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또 중국정부의 임시수도 충칭(重慶)에 있던 김구(金九)는 ‘44년 3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되어 광복군을 지도하였다. <대만의 민중동원과 황민화정책> (생략) <전시하의 대만경제> (생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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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실린 --- IX-2 조선,대만의 황민화정책--- 은 우리 한국인들이 일제에 의하여 특히 태평양전쟁 중에 어떤 고난을 얼마나 당했는지를 대략 밝혀준다. 그 중 <일제에 대한 굴복과 저항> 부분을 읽을 때 우리가 조심할 대목이 있는데 그것은 만주일대의 조선인 독립군활동을 마치 김일성 혼자서 수행한 것 같이 과장한 점으로 이는 사실과 어긋난다.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에 대하여 상세한 것은 모르겠으나 대한광복군, 김원봉계, 기타 여러 갈래가 있고 김일성도 그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키사카는 박경식(朴慶植)의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를 참고문헌으로 인용했는데, 혹시 그 책에 김일성이 만주에서 영웅적인 독립군활동을 했다는 조총련계의 주장이 실렸는지도 모르겠다. 또 내가 전에 듣기로는, 해방 전부터 만주일대에서는 신출귀몰하게 독립군 활동을 한 김일성 장군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는데, 해방 후 평양의 민중대회에서 소련군측이 새파랗게 젊은이(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하자 군중들이 가짜라고 항의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 크게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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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9: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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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문이 덕분에 근대 조선역사를 잘 읽고 또 공부도 많이 되는구나...수고가 많다. 역시 수송국민학교 우등생은 다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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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0: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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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에 대해 한 마디. 지난번 대통령선거 후보자 방송토론 때 통진당 이후보가 새누리당 박후보를 향하여 그의 부친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을 들먹이며 마치 대단한 친일(親日)의 증거인 양 말했는데, 일제시 대부분의 조선인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실상을 왜곡한 것이다. 아마 이후보의 조부모와 부모도 창씨개명을 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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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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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익히 들었던 용어들이 다시 머리에서 살아나와 옛날 생각이 난다. 한참 일본이 우리를 쥐어 짤때 나는 창성동에 살았고 우리 앞 집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하던 최씨 영감이 살았었다. 늘 댓문은 다쳐 있었으나 문이 열리면 마당이 넓었던 생각이 난다. 하루는 밤에 그 집 댓문과 우리집 댓문을 활짝 열고 아버지와 큰형님이 쌀 한 가마니를 들고 길을 건너 우리 집으로 들어 오시는 것을 보았는데 그뒤 쌀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6.25가 나서 들으니 그집 큰 아들이 빨갱이가 되어 잡혀 갔다고 들었다. | 크게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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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은 원래 경남 창원군 熊川面 (현재 창원시 진해구)인데 나의 바로 윗대의 伯父께서 경북 大邱에서 정착하여 三光醫院을 개업하여 1945년 8월 초 49세에 돌아가셔서 光復을 보지 못하셨다. 군중들이 병원 앞에 운집하여 金顯敬 선생 만세를 불렀다고 들었다. 백부께서는 상해 임정에 정기적으로 독립자금을 보내셨다고 한다. 백부께서 우리 집안의 창시개명을 하셧는데, 성을 가네꼬 (金子)라고 하고 이름은 외자로 하였다. 당신은 '게이' (敬)라 하고 나의 아버지는 쥰 (準)이라고 지었다. 나의 이름은 '세이' (聖)였다. '세이짱'이라는 소리가 귀에 박혔고, 나는 皇國臣民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지난 여름에 택시를 탔는데, 운전기사가 나이가 지긋한 이였다. 나는 택시 기사와 대화를 나누는데, 일제 때 그의 아버지가 창시개명을 아니하여 학교에 들어가지 못햿다고 하였다. 그의 고향이 강원도라고 했다. 당시 창시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집안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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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댓 글을 쓰다가 밖에 할 일이 생겨 중단 했다. 일본이 우리를 수탈하고 탄압했던 경험은 아직도 눈에 선하고 힘들었던 것이었다. 서울의 복판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것이 전쟁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나날이 줄어드는 배급량고 수시로 실시되는 반공연습은 정말 어린 나로서도 왜 이렇게 자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른 들은 아무도 왜 이런일이 벌어지는지를 설명해 주지 않았다. 나는 8월 15일 12시의 천황의 래디오 방송 (그 목소리의 디스크를 지금 가지고 있음. 일본의 한 고물상에서 1987년에 구입하였음)을 듣고 나신 아버님의 설명을 듣고 비로서 아 우리는 다른 민족이구나 하고 느꼈었다. 그리고 즉각 나의 둘째누이 (1928년 생, 경기여중 당시 4학년))가 자신이 덕수국민학교 다닐 때 배웠다는 교과서를 꺼내와서 언문 (한글)을 가르쳐주었다. 나는 학교가 개학하기 전에 한글을 깨우치고 다시 수송국민학교 3학년으로 등교하였다. 태문이가 지적하는 박경식의 책 (日本帝國主義의 朝鮮支配, 1986년 청아출판사 출판, 657쪽)을 내가 가지고 있어 다시 들여다 보았는데 그 책에는 가자 김일성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1941년부터 만주에있는 독림군의 일부가 국경선을 넘어서 함남 지역에 침투하여 일본군과 대치 했다는 이야기는 있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들은 두가지 증언이 있다. 혹시 朴慶植 교수가 일본에 있어서 조총련의 지지자인지는 몰라도 역사 연구에 김일성을 미화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분이 동양대학 사학과에 다녔다고 책뒤 저자소개에 적혀 있는데 장도영씨도 이 東洋大學의 사학과에 다녔다가 학병으로 중국에 갔었다. 아마 같은 연배일 것 같다. 그 하나는 趙香綠 목사와 가까히 할 기회가 있어서 들었는 데 그는 함경남도 북청 사람인데 어려서 개마고원에 침투하는 독림군을 보았고 그 지역에 나라를 세우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그 곳에 온 만주에서 일본군과 대치하는 우리 독립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해방후 1945-46년에 "서울에 김일성 장군이 오신다"고 효자동-광화문사이에 있던 전차 간에서 한 보살님이 설파한 것을 수송국민학교 4학년때 학교갔다 오다가 전차간에서 나는 들었다. 이 때 는 진짜 김일성의 이야기였다. 또 하나는 1964년 미국에 유학가서 미시간의 앤아버에 갔는데 그곳에서 피아노 상점을 하시는 尹道善 씨라는 분이 장도영 장군과 함께 증언을 하는 데 1946년 김일성이라는 이가 온다고 하여 단동에서 신의주를 연결하는 다리 끝에서 입국하는 "김일성 장군"을 환영하는 민중 가운데서 보았는데 젊은 애가 군복을 입은체 건너오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그 는 30대 초반의 젊은 이어서 두 분은 각 각 실망하였고 가짜 김일성이라는 것을 즉각 알아 채렸고 장도영은 신의주중학교 사감으로서 신의주학생사건을 이르켜서 북한의 내무서가 뒷 쫏는 것을 따돌리고 남하 하였다고 하며 윤도선씨는 서울로 와서 미국에 살고 있던 친척의 도움으로 1947년에 디트로이트로 갔다는 것이다. 김일성은 원래 金成柱로서 원 金日成 將軍 (1945년 당시 50대였을 군인)의 이름을 도용하였고 김성주는 원래 소련군 하사관이 었는데 해방이 되면서 육군 대위로 가칭하고서 소련군의 주구로 조선반도로 남파한 것이라고 내가 어디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래서 그의 아들 김정일은 원래 시베리아에서 낳았으며 그의 이름은 "율리" 인지 "미하엘" 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러시아 태생이었다. 그를 미화하고 신격화 하게 한 북한의 사학자는 1940년대 일본의 천황주의 이론으로 무장한 군국주의 이론을 만들어 낸 그데로를 잘 배웠던 자들인 것 같았다. 천황의 국가이론과 김일성의 신격화를 이론화한 주체사상 이론의 구조나 논리가 아주 비슷하다. 나는 일본의 뿌리를 연구하면서 평양사범을 나온 1943년 졸업생인 황장엽이가 일본의 군국주의 천황제이론을 잘 배워 아는 사람 같아 기회주의자라고 생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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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45년 8월 15일 낮 12시에 일본천황이 라디오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육성을 들었다. 장소는 경북 예천읍내의 일본인이 다니는 소학교 운동장에 있는 텃밭이었다. 나는 외조부가 예천 읍장이어서 마당이 큰 읍사무소 바로 옆에 붙은 邑長 관사에서 살았고, 학교는 日人들 소학교에 다녔다. 깡마르게 생긴 일본 교장이 우리 학생들과 함께 텃밭 김을 매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영문을 모르고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스피커로 들려오는 소리가 일본 天皇의 肉聲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곧 邑內의 日人가게를 약탈하는 군중과 太極旗를 처음 보았다. 천지개벽이었다. 얼마 후 일인 소학교에는 부산으로 상륙한 미군부대가 접수하였고, 나는 예천 西部국민학교로 논두렁길을 한참 가서 가갸거겨를 배웠다. 그곳에 金泰文이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예천에서 미군이 하는 야구를 처음 보았고, 대구 삼덕동에 있는 제일 큰 양조장의 지배인이 나의 작은 고모부여서 양조장 주인 장남이 경기중학생인데, 여름방학에 본가에 내려왔다. 그 경기중학생이 경기에서 야구부였던 모양이다. 유니폼을 입고 양조장 큰 마당에서 야구를 하였다. 내가 글로브를 생전 처음 끼고 그 경기중학생이 던진 공을 받았는데, 공은 내 얼글 높이로 날라왔다. 그런데 나는 그로브를 얼글 높이에서 내밀고 받았다. 공은 내 코에 맞았고, 코피를 흘렸다. 나의 첫 캐치볼이 코를 치고 코피까지 흘렸으니 생생하고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다. 어쨋거나 이렇게 해서 나는 대구 삼덕국민학교에서 야구 선수기 되었고, 뒤에 서을 효제국교에 5학년 초 전학하여 황광렬, 김형기, 최재선 등과 야구선수기 되어 '이지메'를 당하지 않았고, 서울운동장에서 경기중학 (박현식, 이종오, 노대건(노라노의 동생), 이영식, 방철, 이완용 등)선수들이 하는 야구를 보고 (45회가 전국 우승을 했다) 경기중학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에 나는 경북중학이 좋은 학교인줄 알았다. 옛날 애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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