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조 2013-11-09 15:5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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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사카의 <태평양전쟁>-(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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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1 우색(憂色) 짙은 전국(戰局) <야마모토이소로쿠(山本五十六) 사령관 죽다> 가달카날섬 작전이 일본군의 완패로 끝난 뒤에도 태평양의 주전장은 여전히 중부 Solomon제도와 동부 뉴기니아 방면이었다. 참모본부도, 군령부(軍令部)도 뉴기니아 북안의 방위강화를 중시하였다. 참모본부는 연합국군이 뉴기니아 북안을 따라 필리핀을 겨냥하리라 예상하고, 해군은 이 방면을 빼앗기면 Rabaul이 위태로워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육해군은 협동하여 ‘43년 2월 중순까지 Madang과 Wewak에 각 1개 사단씩 상륙시킨 뒤 3월 초순에 남은 1개 사단을 Lae로 보내려 했다(81호 작전). 그런데 Rabaul에서 Lae로 항해 중인 선단은 3월 2일과 3일 이틀간 Port Moresby를 떠난 미국항공기의 맹폭격을 만나 8척의 수송선 전부와 호위하던 구축함 8척 중 4척을 격침당했다(통칭 Dampier해협의 비극, 미국명 Bismarck해 해전). 뉴기니아 북안에 전개한 일본군은 해상부터의 보급이 끊어져 가달카날섬의 장병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연합함대는 4월 7일부터 16일에 걸쳐 Guadalcanal섬과 Port Moresby 방면 등의 적함선과 지상시설을 공격하려고 연(延) 680기를 출격시켰다(<이호(イ号>작전). 그러나 전과는 구축함·유조선 등 5척을 격침하고 비행기 25기를 격추시킴에 그치고, 우리측은 43기 미귀환, 18기 사용불능의 손해를 냈다. 일본측에 예상 이상의 희생이 난 것은, 미군이 쌍발 Lock- heed P38, Bell P39, Grumann F4F, 최신예 Vought F4U 등의 전투기를 내보내어 레이센(零戰)의 우위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한 탓이다. 4월 17일 열린 연합함대의 <이호>작전연구회에서는 미일전투기의 실력 비교문제가 대두되어 “개전시 6:1의 실력이 <이호>직전에서는 1대1 정도가 되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튿날 야마모토 연합함대사령관은 우가키(宇垣纏) 연합함대참모장과 함께 2기의 1식육상공격기에 나눠 타고 6기의 레이센의 호위를 받으며 Rabaul 동비행장을 떠나 Bougainville(부겐빌)섬 근해 남쪽의 Balalae로 향했다. 최전선에서 싸우는 장병의 사기를 고무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야마모토 사령관이 날아온다는 정보는 암호해독에 의하여 미국측으로 새나갔다. 같은 무렵 야마모토 사령관기를 격추하라는 밀명을 받은 Mitchell 소령은 Lockheed P38 16기를 거느리고 가달카날섬의 Henderson 비행장을 이륙하여, 레이다로 발견되는 것을 막으려고 해면에 닿을 듯한 초저공으로 부겐빌섬 상공을 향했다. 예정시각보다 1분 빠른 오전 9시34분 Mitchell대는 날아오는 일본기를 발견, Lanphier 대위기가 야마모토 사령관의 1번기를 공격하였다. 1번기는 검은 연기와 불을 뿜으며 정글에 추락하였다. 우가키 참모장의 2번기도 화재를 일으키며 모이라곶 근해 100m의 바다에 떨어졌다. 그러나 다행으로 우가키는 중상을 입은 채 구조되었다. <야마모토 사령관은 살아있었다?> (생략) <Attu섬 옥쇄> 야마모토 사령관의 전사로부터 1개월도 안 된 5월 12일 전함 3, 호위공모 1을 기간으로 하는 제51기동부대의 함포사격을 받으며 약 11,000명의 미군이 Aleutian열도의 Attu섬에 상륙하였다. Attu섬은 북해도의 제7사단에서 분파된 야마자키(山琦保代) 대좌 이하 2,665명의 수비대가 있고, 일본군 진지는 섬의 동쪽에 구축되어 있었다. 야마자키부대는 용맹과감하게 싸웠지만 중과부족으로 차츰 섬 동북부로 밀려갔다. 대본영은 증원계획을 검토하였다. 그러나 Attu섬 주변은 미국함대에 포위되어 아무래도 증원부대를 보낼 가능성이 없어서, 대본영은 5월 20일 Attu와 Kiska 두 섬의 포기를 결정하였다. Attu섬의 수비대는 죽게 내버려졌다. 29일 밤부터 30일에 걸쳐 야마자키 대좌는 남은 150명의의 수병(手兵)을 거느리고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였다. 부상하여 포로가 된 27명을 뺀 전원이 전사 또는 자결하였다. 미군의 손해는 전사 약600명, 부상자 약1,200명이었다. 5월 30일, 대본영은 Attu섬 수비대가 <옥쇄(玉碎)>하였다고 발표하였다. 태평양전쟁 하에서 고도(孤島) 수비대의 최초의 옥쇄였다. 옥쇄의 비극은 이윽고 중남부 태평양의 섬마다에서 되풀이되게 된다. Kiska섬 철수는 순조로이 진행되었다. 육해군 수비대와 군속 가운데 820명은 5월 27일부터 6월 21일까지 사이에 잠수함으로 실어냈고, 남은 5,183명은 7월 29일 미함대가 급유를 위해 주변해역을 떠난 짧은 틈을 타서 순양함 2척, 구축함 6척에 분승하여 철수에 성공하였다.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한편 연합군측은 가달카날섬 탈환에 성공한 뒤 대일반공(對日反攻)작전의 실시계획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미국 통합참모본부는 ‘43년 3월 21일, 전년 7월 2일 결정된 남태평양에서의 반격작적(암호명 Watch Tower)의 제2단계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뒤에 Cart-wheel 작전으로 불린 이 작전은 맥아더의 남서태평양군이 뉴기니아 북안의 Madang까지와 New Britain섬의 서반부를 점령하고, Halsey의 남태평양군이 Solomon제도를 징검다리로 차례로 Bougainville섬 남부까지 전진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뒤 연합국측은 5월 12일부터 워싱턴에서 열린 제3회 미영군사회의(암호명 Trident)에서 이태리의 Sicily섬 공략작전(암호명 Husky)을 7월 10일부터 실시하기 등을 결정하였다. 이 회의의 논의에 근거하여 미국 통합참모본부는 7월 20일 다음과 같은 중요한 결정이 내려졌다. 1) Watch Tower 작전의 최종목표였던 Rabaul 공략은 희생이 너무 커서 실시하지 않고 맥아더군은 Rabaul을 <무력화>한 뒤 뉴기니아 북안에 더하여 필리핀 탈환을 겨냥함. 2) 니미츠의 태평양함대와 태평양군은 Gilbert제도와 Eris제도를 11월 15일경, Marshal제도를 12월 1일경 12월 공격하도록 준비함. 특히 2)는 Ernest King 해군작전부장 등 해군수뇌부의 강한 요망에 의하여 더해졌는데, 그 이면에는 공화당이 차기 대통령후보의 1인으로 추천 중인 맥아더를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의향이 강하게 작용했다고들 한다. 이 같은 육해군에 의한 두정면작전의 결정은 그 뒤 태평양전국의 전개를 방향 짓는 획기적 의미를 가진다. 이 작전결정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미군 장비의 충실화였다. 5월 13일에 북아프리카작전(암호명 Torch)이 끝나는 전후부터 사용이 끝난 대형 상륙용 주정(舟艇)을 비롯하여 로켓포, 대전차 Bazooka포 등의 신병기가 태평양전선에 도착하기 시작하였다. 함정도 ‘43년 봄부터 신건조된 공모 등이 차례로 전열에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니미츠는 가을에는 대형공모 6, 경공모 5, 호위공모 8, 신식전함 5, 구식전함 7 등을 지휘하기가 가능할 전망이 섰다. 게다가 이미 레이센의 우위도 무너지기 시작한 터였다. <Cart-wheel 작전 개시> 연합국군에 의한 Cartwheel 작전은 6월 30일에 시작되었다. 맥아더군은 Solomon해 남부의 Kiriwina섬과 Woodlark섬, 및 동부 뉴기니아의 Salamaua 남동 25km에 있는 Natsou만의 3개소에, Halsey군은 Rendova섬에 각각 상륙하였다. 이어서 연합군은 7월 5일부터 10월 7일까지 사이에 New Georgia, Kolombangara, Vella Lavella 각섬을 점령하였다. 한편 동부 뉴기니아 북안에서는, 제18군<사령관 아다치(安達二十三) 중장>이 Lae와 Salamaua, Madang, Wewak의 3지구에 각각 1개 사단씩 배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3지구는 어느 것이나 수백km나 떨어져 있는데다 그 사이는 높은 산맥과 정글로 가로막히고 해상수송력의 약세까지 겹쳐 육지의 외딴섬과 마찬가지였다. 6월 30일 Natsou(?)만에 상륙한 미국은 호주군과 제휴하면서 Salamaua로 전진하였다. 맥아더군은 우선 일본군 진지에 맹렬한 포폭격을 가한 뒤 화포의 지원을 받으며 전차를 전면에 세우고 자동소총을 난사하며 전진하는 철저한 출혈회피의 공격방법을 취했다. Salamaua를 사수하던 일본군은 9월 4일 맥아더군이 Lae 동쪽에 상륙한 탓에 14일 Salamaua에서 Lae를 향하여 철수하였다. 그 사이 8월 17일 Buna를 날아오른 B34, B25 등이 Wewak와 부트에 있는 4개 비행장을 불의에 습격하여 지상에서 불태워 대파 약50기, 중소파 약50기라는 괴멸적 타격을 가했다. 그 때문에 일본군의 실가동 전력은 40기로 떨어져 드디어 이 방면의 제공권을 잃게 되었다. 9월 15일에는 Lae도 포기하였다. 제15사단<사단장 나가노(中野英光) 중장> 등 약8,500명은 Lae 븍쪽에 솟아있는 Sarawaket산(표고 4,101m) 동쪽의 안부(鞍部)를 넘어서 북안의 Kiari를 향하여 120km의 도정을 퇴각하였다. 적도 바로 밑이지만 후지산(富士山, 3,776m)보다도 높은 산을 넘어 습지와 정글을 지나가는 행군은 엄청나게 어려웠다. 굶주림과 병과 추위로 장병들은 풀썩풀썩 쓰러져 약1,100명이 죽었다. 유명한 <Sarawaket 넘기>는 문자 그대로 죽음의 행진이었다. 이렇게 일본군은 ‘43년 9월 중순까지 Lae로부터 동부 뉴기니아 북안을, 10월 초순까지는 중부 Solomon을 각각 잃게 된다. <미군을 두들길 수는 없나?> 일본은 Guadalcanal 패전을 전기(轉機)로 어려운 싸움에 들어가게 되었다. 최고통수권자로서 천황도 전국(戰局)의 악화를 깊이 우려하였다. 오늘까지도 전시 중의 천황은 군부(軍部)에 둘러싸여 전쟁의 진상을 알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 반대다. 천황은 정치, 외교 등의 일은 물론 고관의 인사와 전국 동향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숙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적당한 지시를 내려서 전쟁지도를 원활히 하는 등 실은 <대원수폐하(大元帥陛下)>의 모습을 발휘하고 있었다. 전국의 동향에 한하여 얘기하자면, 참모총장이나 군령부(軍令部)총장이 전국을 보고하고(=전국상주, 戰局上奏), 대명윤재(大命允裁, 작전 등의 최고통수사항에 관한 결재)를 받는 기회에는 반드시라 해도 좋을 만큼 천황한테서 <고카몬(御下問, 임금님의 질문)>이 있는 것이 예사였고, 때로는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을 통하여 <오코도바(御言葉, 임금님의 말씀)>가 전해지곤 했다. 참모본부편 <스기야마(杉木)메모>에 붙어있는 이나바(稻葉正夫) 방위청 방위연수소 전사편집관(전 육군중좌)의 <자료해설>을 근거로 그 일단을 소개하자. 이하 상주(上奏)라는 것은 스기야마 전 참모총장의 상주임. ‘42월 12월 31일. 가달카날섬 철수를 결정한 어전회의 종료 직후 하스누마(蓮沼蕃) 시종무관을 통한 <오코도바>. 가도(カ島) 철수는 유감이요. ---실은 가도(カ島)가 얻어지면 <초쿠고(勅語)>를 내릴까 생각하는데 어떤가? <‘43년 1월 5일 초쿠고는 이마무라히토시(今村均) 제8방면군사령관과 야마모토이소로쿠(山本五十六) 연함함대사령관에게 하사되었으나, 천황의 동의를 받아 발표되지 않았음>. ‘43년 3월 3일. Lae로 향한 수송선단의 전멸에 대하여 상주할 때의 <오코도바>. 왜 바로 Madang으로 결심을 바꾸어 상륙하지 않았소? ---항공병력을 증가하여, 병력의 사용도 안전한 곳에 도로를 구축하여 한걸음 한걸음 점령하도록 생각하며 해주오. 금후 Lae, Salamaua가 가달카날과 같은 모양이 되지 않도록 생각하며 해주오. 7월 8일. 중부 Solomon의 New Georgia섬에 미군이 상륙직후 전황 상주시의 <고카몬>. 국지적으로는 전투를 잘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공세를 취할 수는 없소? 어떻게든 두들길 수 없소? 8월 5일. Lae, Salamaua 및 중부 Solomon 두 방면의 전황악화를 상주시의 <고카몬>. 천황: 어느 방면도 좋지 않소. 미군을 흠씬 두들겨줄 수는 없소? 스기야마 총장: 두 방면 모두 시간문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하옵니다. 정말 죄송하옵니다. 천황: 그건 그렇다 하고, 그처럼 조금씩 밀리기만 하면 적만이 아니라 제3국에 주는 영향도 크오. 도대체 어디서 확실하게 하는 거요? 어디서 결전을 하는 거요? 지금까지처럼 조금씩 밀리기만 되풀이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 아니오? 스기야마 총장: 뜻을 받들지 못하여 무어라 아뢸 말씀이 없사옵니다. 전국(戰局)을 직시하면 할수록 천황의 우려는 깊어질 따름이었다. <이태리 항복> 그 무렵 유럽에서는 이태리와 동부전선이 전국의 초첨이 되고, 그 중에도 이태리는 본토결전(本土決戰)의 고빗길이 다가오고 있었다. 연합국군은 예정대로 ‘43년 7월 10일 Sicily섬 공략작전을 감행하였다. 이것을 본 이태리 국왕 Victorio Emmanuel 3세는 Pietro Badoglio 원수 등 군부(軍府) 상층부와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7월 25일 무쏠리니 수상이 파면, 체포되고 Fascism 체제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후임 수상에는 Badoglio가 임명되었다. 8월 17일 독일군이 Sicily섬에서 퇴각하고, 9월 3일에 연합국군이 이태리 본토에 상륙한 뒤 9월 8일 이태리는 연합국에 무조건항복하였다. 여기서 일․독․이추축(日獨伊樞軸)의 한 모서리가 붕괴하였다. 9월 9일 이른 아침 이태리 항복 소식을 들은 키도(木戶幸一) 내대신(內大臣)은 그날 일기에 <조만간 이 일이 생길 것으로 예상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새삼스레 망연자실했다“고 적었지만, 이것이 아마도 일본 최고지도자들의 공통된 느낌이었으리라. 일독(日獨) 양국 정부는 15일 전쟁 계속의 성명을 발했지만, 일본의 통수부 자신이 인정하 듯이 <오자나리(御座成, 임시변통)>에 지나지 않았다. 유럽의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이 총반격으로 바뀌었다. 7월 5일부터 7월 하순에 걸쳐 독소(獨蘇) 양군은 모스크바 남방 약450km인 Kursk 부근에서 대결하였다. Kursk전은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이상의 대격전이 되었는데, 독일군 장갑군단을 소련군이 분쇄하여 그 이후 독일군은 일방적인 수세에 몰렸다. 전전선(全戰線)에 걸쳐 추격에 나선 소련군은 9월 25일 Smolensk를, 11월 6일에는 Kiyev를 각각 탈환하고, 독일군을 서방으로 물리치고 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은 8월 14일부터 캐나다의 Quebec에서 제4회 미영군사회의(암호명 Quadrant)를 열어, 대략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1) 북프랑스 상륙작전(암호명 Over Lord, 이른바 제2전선의 결성)의 실시를 ‘44년 5월 1일로 함. 2) 태평양작전에 대해서는 영국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 미국이 자유로 실시함. 3) 북 Burma에서 충칭(重慶)에 이르는 지상 루트의 개통작전을 ‘44년 2월부터 개시함. 종래부터 주변 포위작전을 주장해 온 처칠 수상도 이태리의 탈락이 목전에 다가온 지금 드디어 북프랑스 상륙작전의 실시를 승인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은 태평양작전 실시의 자유를 손에 넣었다. 그래서 ‘43년 11월부터 미국 해군에 의한 중부태평양 돌파작전이 개시되게 된다. <절대국방권(絶對國防圈)의 설정> Guadalcanal섬에서의 철수를 계기로 전략적 수세(守勢)로 몰린 일본은 이제 또 이태리의 항복에 직면하여 전략방침의 근본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42년 3월 7일의 대본영·정부연락회의에서 결정된 <세계정세판단>과 <금후 채택할 전쟁지도의 대강(大綱)>은 파탄하고 말았다. 육군 내부에서는 ‘43년 3월 이후 전선 후퇴의 의견이 차츰 강해져서 6월부터 구체적 검토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Mariana제도 및 Truk섬을 지나 New Guinea 서부(거북 모양을 한 섬의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걸친 선으로 전선(戰線)을 축소하여, 남 Java섬부터 서쪽은 Malay반도와 Burma에 이르는 범위에 <절대국방권>을 설정하여 지구태세(持久態勢)를 확립한다는 것이었다. 여기 대하여 해군은 8월 15일에 <제3단계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이것은 ‘41년 12월의 개전부터 ’42년 4월 중순까지의 제1단계작전, ‘42년 4월 중순부터 ’43년 3월말까지의 제2단계작전에 뒤이은 것으로, 원래 같으면 3월 25일에 하달되었어야 하는 것인데 <이호(イ号)작전>의 수행과 야마모토 사령관의 전사 등 사정으로 하달이 늦어진 것이다. 그 주된 내용은, 연합함대는 현전선의 각지에서 적의 내공(來攻)을 저지하되, 적주력함대의 내공 시에는 Truk섬에서 대기하는 연합함대의 전력(全力)을 다하여 이것을 Marshal제도 부근에서 요격하여 격멸한다는 것이고, 전방결전주의(前方決戰主義)를 강조하였다. 그 때문에 육군이 말하는 <절대국방권>을 인정하면 Truk섬만이 돌출하고, Marshal제도는 훨씬 더 그 동쪽 2,000km 지점에 있어서, 양자의 구상은 손쉽게 타협하기 어려운 성질의 것이었다. 9월 15일 양총장이 줄서서 상주(上奏)를 행했다. 스기야마 참모총장이 <남동방면의 현점령 요역(要域)에서--- 극력 지구(持久)를 꾀하여 그 사이에 속히 Banda Sea 방면부터 Caroline군도 방면에 걸쳐 방비(防備)를 완성하고 또 반격전력을 정비>한다고 말한 데 대하여, 나가노(永野修身) 군령부장은 Caroline제도 등 <후방요선(後方要線)>의 방비강화를 언급하면서도 Marshal제도와 Gilbert제도 두 방면은 “해군으로서는 매우 유리한 결전장으로 생각되므로 될 수 있는 한 이의 확보에 노력하여 이 전장에서 적을 포착, 섬멸함”이라고 말하여 양자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은 채로였다. 결국 육군의 <절대국방권>사상과 해군의 전방결전주의라는 전략구상(構想)의 불일치를 안은 채 9월 30일의 어전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금후 채택할 전쟁지도의 대강>이 결정되었다. 1) <금명년 안에 전국의 대세를 결정할 것을 목표로--- 필승의 전략태세를 확립함과 아울러 결정전력(戰力) 특히 항공전력을 급속증강>하기로 하고, 구체적으로는 ‘44년 중기를 목표로 전략태세를 확립함. 2) 독일과의 <제휴를 긴밀히 하고>, 대소(對蘇)관계의 <호전(好轉)을 도모함>. 3) <속히 국내결전태세를 확립함과 아울러 대동아(大東亞)의 결속을 더욱 강화함>이란 방침을 바탕으로 <제국(帝國) 전쟁수행상 태평양 및 인도양 방면에서 확보해야 할 요역을 치시마(千島), 오가사하라(小笠原), 우치난요(內南洋, 중서부) 및 서부 뉴기니아, Sunda해협, Burma를 포함하는 권역으로 함>. 그 때문에 <절대국방권>의 동쪽 지역에 전개해 있던 약30만의 육해군부대는 내팽개친 셈이 되어 결국 각지에서 수비대 옥쇄의 비극이 이어지는 소지가 마련되었다. 게다가 이 어전회의에서 “절대국방권을 확보할 자신이 있는가?”라는 하라(原嘉道) 추밀원(樞密院)의장의 엄한 질문에 대하여 나가노 군령부장이 “절대 확보의 결의가 있으나 승패는 시운(時運)입니다. --- 금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전국의 앞날을 확언하기는 불가능합니다”라고 답하여 의장(議場)이 갑자기 긴장하고, 토조 수상과 스기야마 참모총장이 당황하여 부정(否定)하는 일막(一幕)이 벌어졌다. 군부 최고지도자의 일부는 전국의 전망에 자신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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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2: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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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고있다. 태문이 힘내라! | 크게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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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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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을 번역하면서 지명 때문에 좀 헷갈렸다. 支那, 滿州, 樺太(카라후토: 현재의 남부 사할린), 印支(=印度支那: Indo-China) 또는 佛印(=佛領印支: 현재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緬甸(=Burma: 현재의 미얀마)은 물론 蘭印(和蘭領印: 현재의 인도네시아)까지 알고 있었으나 蘭印이 和蘭領印度(Dutch Indies)의 약칭인 줄은 윤정석이 올린 지도를 보고 알았다. 그래서 전에 실린 글에서 蘭印 부분을 수정하였다. | 크게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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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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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문이가 좋은 글을 올려서 많은 독자들이 환호하고 있다. 나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윤정석이가 보충자료를 올려서 태문이 글이 더욱 빛난다. 그리고 정석이에게도 감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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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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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광이의 글도 너무 길어서 다 읽지 않았다. 태문이 글은 도광이 글보다 더 질려서 나는 다 읽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읽는다. 조두영, 강신표를 존경한다. 나는 환호하지는 않는다. 질린다. 태문이는 전에 했드시 책으로 발간하여 부내주면 감사하겠다. 거기에 윤정석의 보충 자료를 적절하게 넣으면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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