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조 2013-11-09 16: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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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사카의 <태평양전쟁>-(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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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2 흔들리는 <절대국방권> <Cairo, Teheran 회담> 일본이 <절대국방권>을 설정하고 방어전(防禦戰)에 몰리고 있을 때 연합국 수뇌부는 빈번하게 회의를 열어 제2차세계대전의 전략만이 아니라 전후처리(戰後處理)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까지 전국(戰局)의 긴박을 이유로 수뇌회담에 출석을 사양했던 소련의 스탈린 수상도 동부전선의 전국이 호전함에 따라 수뇌회담에 응하게 되었다. ‘43년 10월 19일부터 30일까지 미영소(美英蘇) 3국 외상회의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3국의 외상은 전쟁수행상의 필요조치에 대하여 협의했는데, 회의 최종일에 스탈린 수상은 처음으로 독일 항복 후에 대일참전(對日參戰)을 한다고 언명하였다. 당시 일본을 항복시키기가 용이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미영의 지도자로서 이 발언은 더 바랄 나위 없는 일이었다. 11월 22일부터 이집트의 Cairo에서 미영중(美英中) 3국 수뇌회담이 개최되었다. 장제스(蔣介石)가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수상을 만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고, 이것이 장제스로서는 세계 무대에의 첫 등장이기도 했다. 1887년생인 장제스는 56세, 중국전선 최고지도자로서 항일전쟁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처칠은 그를 “냉정하고 말이 적은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27일에 3수뇌가 카이로선언에 서명했는데, 그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3국의 전쟁목적은 일본의 침략을 제지하고 일본을 벌하는 데 있지 영토확장의 뜻은 없음. 2) 일본이 제1차세계대전 개시 이후 <탈취 또는 점령>한 태평양의 제도(諸島)를 <박탈>함. 3) 일본이 <도취(盜取)한> 만주, 대만, 팽호제도(膨湖諸島)를 중화민국에 반환시킴. 4) 조선을 이윽고 독립시킴. 5) 일본이 무조건항복할 때까지 끝까지 싸움. 이어서 11월 28일부터 12월 2일까지 이란의 Teheran에서 미영소 3국수뇌회담이 열렸다. 석상에서 스탈린 수상의 강한 희망도 있어 미영군에 의한 북프랑스 상륙작전(암호명 Over Lord)를 예정대로 ‘44년 5월 1일에 실시할 것, 여기 맞추어 동부전선에서 소련군이 대공세에 나설 것, ’44년 1월 이후의 대일작전의 일정 등이 최종적으로 결정되고, 소련의 대일참전문제도 토의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회담에 의하여 연합국측은 <Over Lord>의 실시와 독일 타도 후에 일본본토를 태평양으로부터 공격한다는 세계전략을 확정하였다. 이 이후 미영 양국간에서는 세계전략에 관하여 근본적인 협의가 이뤄진 적이 없게 되었다. <Rabaul 고립되다> 연합국군의 Cartwheel 작전은 Rabaul을 포위하여 무력화시키는 것을 목적하여 그 뒤에도 착실히 계속되었다. ‘43년 9월 22일 맥아더군은 동부 뉴기니아의 Finschhafen 북방에 상륙하였다. 일본군의 반격은 실패하고, 이듬해 ’44년 1월 초순 수비대는 Finschhafen지구를 포기하였다. 이어서 ‘43년 11월 1일 Halsey군은 부겐빌섬 중부 서해안의 Torokina에 상륙, 정예를 자랑하는 쿠마모토(熊本)의 제6사단<사단장 칸다(神田正種) 중장>을 격파하고, ’44년 3월 25일 이후 일본군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부겐빌섬 수비대<제17군 사령관 햐쿠타케(百武晴吉) 중장, 뒤에 칸다 중장>는 그 후도 소모전을 되풀이하였으나 패전을 맞게 되는데, 이 방면의 전사자는 육군 약30,000, 해군 약12,000에 이르고, 육군 약16,000과 해군 약11,000이 패전 후 수척해진 상태로 복원(復員)하게 된다. 그간 연합함대는 <토라노코(虎ノ子)>인 제3함대 제1항공전대<공모 쇼카쿠(翔鶴), 즈이카쿠(瑞鶴), 즈이호(瑞鳳)>의 함재기를 급거 Rabaul로 진출시켜 기지항공부대와 협력하면서 부겐빌섬 주변의 미국함대에 파상공격을 가했다. ‘43년 11월 5, 8, 11, 13, 17일 및 12월 3일의 제1~6차 부겐빌 연안 공중전에서, 대본영은 이들 항공전에서 격침= 전함 5, 공모 8, 순양함 11 등, 격파= 전함 2, 공모 3 등, 격추= 16기(그 중 불확실 2) 등의 대전과를 거뒀다고 떠들썩하게 발표하였다. 그런데 실제 전과는 격침= 어뢰정 1, 상륙용 수송함 1, 격파= 경순양함 2, 상륙용 수송함 1, 항공기 불명에 그쳤다. 원인은 미숙한 탑승원이 많고, 과대한 전과를 보고한 탓이었다. 여기 대하여 제1항공전대는 11월 2일부터 11일까지의 전투만으로 173기 가운데 121기 미귀환(손모율 70%), 탑승원 363명 가운데 181명 전사(손모율 50%)의 손해를 입어 보충에 시간이 결려서 이듬해 ‘44년 6월의 Mariana 연안 해전(海戰) 때까지 기회를 잃었다. 또 Truk섬에서 Rabaul로 진출한 쿠리타(栗田健男) 제2함대사령관이 거느리는 함대도 11월 5일과 11일 이틀간 미국 제38기동부대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침몰=구축함 1, 대중파=중순 4, 경순 2, 구축함 5의 대손해를 입어 해상결전 단행의 희망이 껶여버렸다. 더구나 맥아더군은 ‘43년 12월 15일 New Britain섬 남서부 Markas곶에, 26일에는 북서단 Gloucester곶에, 각각 상륙하였다. 동방면의 수비대는 이듬해 ’44년 2월 22일에 Rabaul로의 철수명령을 받아, New Britain섬의 서반부는 연합국군의 수중에 돌아갔다. 그 뒤 2월 29일에는 Admiralty제도가 공격을 받아 수비대는 5월 6일 옥쇄하였다. 풍운이 급한 ‘43년 12월 Rabaul에 있던 민간인과 위안부(慰安婦)는 내지(內地, 즉 일본)로 빼내고, 이듬해 2월 20일 이후 대부분의 해군항공기는 Truk섬으로 이전하고, 그 이후 내지로부터 Rabaul에 대한 보급은 끊어졌다. 이리하여 남태평양 최대의 전진기지 Rabaul은 완전히 고립되어 약10만의 장병은 현지자활(現地自活)의 태세를 취하면서 패전(敗戰)을 맞이하게 된다. ‘42년 8월 가달카날섬 쟁탈전 개시로부터 1년 7개월에 이른 남태평양을 둘러싼 결전은, 약30만의 육해군부대, 약8,000기의 비행기 및 다수의 함선을 투입한 가운데 전사자 약13만 외에 비행기 8,000기, 함정 70척(약21만톤) 및 선박 115척(약38만톤)을 상실하고 끝이 났다. 특히 많은 비행기와 함선을 잃고 그 보충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때문에 일본군의 형세 만회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Tarawa, Makin 옥쇄> 한편 ‘43년 8월의 제4회 미영군사회의;(암호명 Quadrant)의 결정에 따라 니미츠 대장 지휘하의 미국 기동부대는 9월 초부터 미나미토리시마(南鳥島), Wake섬, Marshal제도, Gilbert제도 등을 공습하고, 육군항공대도 Eris제도와 Baker섬에 진출하였다. 이들 일련의 움직임은 다가올 Gilbert제도를 시작으로 중 태평양의 섬들을 단숨에 돌파하려는 새로운 작전의 전조(前兆)였다. 과연 11월 19일부터 미국 기동부대의 함재기는 Gilbert제도의 Tarawa환초(環礁, Atoll)에 쇄도하였다. 22일 미국은 약3,000톤의 포탄을 쏘아댄 뒤 15,600인이 Tarawa에, 또 6,472인이 Makin에 각각 상륙하였다. Tarawa의 일본군 수비대 4,836인과 Makin의 수비대 798인은 무섭게 저항을 했다. 특히 Tarawa에서는 포폭격으로 괴멸했을 것으로 믿은 해안선의 진지로부터 맹렬한 사격을 받아 미군 사상자의 약반수가 해안의 전투에서 생겼다고 한다. 지뢰를 껴안고 전차 밑으로 뛰어들려는 자, 명이 끝났다고 판단될 때면 수류탄으로 자결하는 자, 수류탄이 없으면 총구를 목구멍이나 머리에 대고 발로 노리쇠를 당겨 자결하는 자, 그리고 최후의 만세돌격(萬歲突擊). “살아서 포로의 치욕을 받지 않는다”<전진훈(戰陣訓)>는 죽음의 철학으로 무장된 일본 장병으로서 이러한 행위는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용감해도 민주주의사상으로 무장하여, 출혈회피(出血回避)의 전술을 다져온 미국 해병대의 장병은 일본군의 필사적 싸움 모습에 몸서리쳤다. 그들에게 Tarawa는 문자대로 <공포의 섬>이었다. 그 후 중부 태평양의 외딴섬을 둘러싼 싸움에서 일본군의 저항하는 모습은 많든 적든 간에 이와 같았다. Tarawa와 Makin의 수비대는 11월 25일에 <교쿠사이(玉碎)>하였다. Tarawa에서 양군의 손해는, 일본군 전사 4,690명, 포로 146명(중 129명은 조선인 군속)에 대하여 미군은 전사 990명, 전상 2,296명이고, Makin전의 것은 일본군 전사 693명, 미군 사상 218명이었다. 또 내남양방면 항공부대는 11월 21일부터 29일 사이의 4차에 걸친 Gibert 근해 항공전에서 적공모 8척을 격침했다고 보고했으나, 실제로는 경공모 1척 격파에 그쳤고, 그 밖에 잠수함 이175호가 호위공모 1척을 격침하였다. <뒷북을 치지 말라> 적공모 8척 격침이란 전과를 오인한 연합함대는 중부 태평양방면에 대한 미군의 차기작전까지에는 상당한 여유가 있다고 속단하였다. 그러나 추격은 급했다. ‘44년 1월 30일 미군은 Marshal제도에 포폭격(砲爆擊)을 가한 뒤 2월 1일부터 Kwajalein 환초에 상륙하고, Kwajalein, 르오토 등의 각섬 수비대를 5일까지 전멸시켰다. 2월 1일 스기야마, 나가노 양총장으로부터 Marshal제도 방면의 전황을 청취한 천황은, “언제나 뒷북을 치고 있으나, 금후는 뒷북을 치지 않도록 후방요새를 굳히시오”라는 취지의 <오코도바>를 내렸다. 스기야마 총장은 “Mariana, 오가사하라(小笠原). 이오지마(硫黃)에 대한 병력수송은 맨 뒤로 돌릴 예정이었지만, 금후 이들을 우선하여 서두르겠사옵니다”라고 답하고, 나가노 총장은 <모함(母艦) 항공병력>이 정비되면 “적을 요선(要線)에서 저지하는 것이 가능하옵니다”라고 봉답(奉答)하였다. <절대국방권>이 설정되고부터 4개월 반인 2월 16일 대본영은 점차로 중부 태평양 방면의 병력증강을 결단하고, 그 병력은 관동군(關東軍)과 조선군(朝鮮軍)으로부터 그 일부를 전용(轉用)하게 되었다. <Truk 대공습> 대본영 해군부는 2월 5일 Marshal 실함(失陷) 후의 긴급조치에 대하여 연구한 바, 미군의 Caroline, Mariana 양제도에 대한 내공(來攻)은 빨라도 3월 중순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이 뜻을 받은 연합함대는 3~6월경 태평양정면에서 일어날 양상격멸전(洋上擊滅戰)에 대비하기 위하여 2월 10일 Truk섬에 있던 기함 무사시(武藏) 이하 주력함대를 내지와 Palau섬으로 빼냈다. 그 직후인 2월 17일 밋처(Marc Mitscher) 소장이 거느리는 제58기동함대<대형공모 5, 소형공모 4, 전함 6, 중순 5 등>가 <절대국방권>의 동쪽 맨 끝인 Truk섬을 급습하였다. 일본군의 항공기는 대타격을 받아, 실가동 가능기는 겨우 전투기 1기, 함상공격기 5기만 남았을 뿐이었다. 항공기 격멸에 성공한 밋처군의 함재기는 이튿날 18일에는 종일 내 집처럼 Truk섬 상공을 날아다니며 함선과 육상시설을 겨냥하여 가격하였다. 2일간의 대공습에 의한 일본군의 피해는, 침몰=함정 10(그 중 경순 2, 구축함 4), 수송선 31, 항공기의 손모= 270(전투행동 70, 지상 200)에 이른데 대하여 미군측의 손해는 항공기 25기와 공모 Intrepid가 일본기의 뇌격으로 격파된 것 뿐이었다. 이리하여 미국측이 <일본의 진주만>이라 부르던 Truk섬은 괴멸하여 기지로서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Truk섬을 지키기 위하여 Rabaul을 점령하고, Rabaul을 지키기 위하여 Solomon과 New Guinea를 점령했었는데, 이제는 그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Nimitz군은 숨 돌릴 사이도 없이 2월 19일 이후 Marshal제도 Brown환초의 Enjebi, Eniwetok, 메리신 각섬에 상륙하여 24일까지 약3,500명의 수비대를 전멸시켰다. Kwajalein, 르오토 등의 <옥쇄>는 발표했던 대본영도 그러나 국민의 사기저하를 우려하여 이들의 옥쇄는 발표하지 않았다. 이렇게 Marshal제도는 사실상 잃어버렸다. <쓰쓰누케(筒拔, 밑빠진 통)가 되어버린 Z작전계획> 그러나 나쁜 일은 연이어지는 것이다. 3월 31일 코가(古賀峯一 대장) 연합함대사령관은 사령부를 Palau에서 필리핀 Mindanao섬의 Davao로 옮기기 위하여 막료와 함께 2기의 이식(二式) 대형비행정에 분승하여 Palau를 날아올랐다. 그런데 저기압에 휘말려 코가 사령관기는 행방불명이 되고, 2번기는 Cebu섬 근해에 추락하여 타고 있던 참모장 후쿠토메(福留繁) 중장 등 9명은 게릴라부대에 붙잡혔다. 그들의 신병(身柄)은 12일 뒤 일본의 현지부대에 인계되었지만, 암호서와 기밀서류가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기밀서류에는 치시마(千島)부터 내남양 방면의 적의 유력공략부대가 쳐들어올 경우의 영격(迎擊)작전계획(Z 작전계획)이 적혀있었다. 이 계획은 수정되어 <아호(あ号)>작전이 되었다가 연합함대는 참패를 맛본다. 해군 수뇌부는 포로로 되었다가 귀환한 후쿠토메 중장 등의 처우에 곤혹(困惑)하였다. 진상을 숨기고 의혹을 일소하기 위하여 사건을 <을사건(乙事件)>이라 부르며 숨겼을 뿐 아니라, 후쿠토메 중장을 제2항공함대 사령관으로 영전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대본영은 5월 5일 코가 사령관이 “전선에서 비행기에 탑승하여 전반 작전지도 중 순직”하고, 후임에 토요다(豊田副武) 대장이 임명되었다고 발표하였다. 많은 국민은 야마모토 사령관의 전사(戰死)와 달리 <순직(殉職)>이란 발표에 위화감을 느끼고, 뒷공론이 있었다. 코가 사령관에게는 원수(元帥) 칭호가 주어졌지만 국민의 사기를 고무시킬 수는 없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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