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89년 출판된 키사카(木坂順一郞)의 "태평양전쟁"(일어판)을 읽고 내용을 친구와 친지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에는 '70년대에 출판된 코지마(兒島襄)의 "태평양전쟁"을 읽은 적이 있다. 두 책 모두 전쟁의 경과를 상세히 설명하는 가운데 키사카는 천황을 포함한 일본 지도층의 전쟁책임, 군부의 무모한 전략과 인명경시에 매우 비판적이고 타국민의 희생을 안타깝게 여기는데 반하여 코지마는 당시 종군기자로 활약한 탓인지 일본은 부득이 전쟁으로 내몰렸고,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는 일본군의 "大和魂"는 일본만의 독특한 정신이라고 전쟁을 조금 미화하는 듯했다. 나는 '36년 경북의 농촌에서 태어나 '43년 4월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고 3학년(10살) 때인 '45년 8.15 해방을 맞이하여 일제치하에서 2년 남짓 학교를 다녔는데 태평양전쟁(당시는 대동아전쟁)은 이미 '41년말에 시작되었으니 내리 삼엄하고 긴장되고 궁핍한 전시하였다. 당시 내가 본 아시아지도에 일본은 내지(內地: 현재의 일본), 대만, 화태(樺太=카라후토: 현재의 남부 사할린), 조선(朝鮮= 한국)으로 구성되었다. (대만, 화태, 조선은 각각 1895, 1905, 1910년에 합병됨) 학교 안에서는 김태문 아닌 카네무라토키오(金村時雄)란 이름의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신민(臣民)으로 일본말(코쿠고-國語라 함)만 쓰도록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어려서부터 일본의 국가(國歌)를 비롯한 가종 경축절 노래와 군가를 배워 10곡쯤 기억하나 가사의 뜻은 잘 몰랐다. 매년 12월 8일(개전기념일)이면 운동장에 도열하여 어려운 교장선생은 칙어봉독(勅語奉讀)을 듣기가 무척 추웠다. 학교에서 천황을 신처럼 받들고, 식사 때 카미다나(神棚)를 향해 두 손을 모아 "잘 먹겠습니다"고 아뢰었고, 장차 무엇이 되겟느냐는 질문에는 "군인"이 정답이었다. 관청과 학교건물에는 내선일체(內鮮一體: 내지와 조선은 일체), 미영격멸(미국, 영국을 때려부숨), 총력동원 같은 구호가 내걸리고, 길에는 미영지도자를 저주하여 키다리 루즈벨트 대통령과 장다리 처칠 수상을 눕혀놓고 떡메로 치는 만화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군가 중에는 태평양방면 미국해육군 사령관더러 "니미츠, 맥아더야 나타나기만 해봐라 지옥에 꺼꾸로 쳐박으마"는 것도 있었다. 주변에는 징병, 징용으로 외지(중국, 남양)로 끌려가는 이가 속출하고, 어려운 식량사정이 쌀의 공출로 더 나빠지고, 무기제조에 쓰려고 가정의 놋그릇을 강제로 거둬갔다. 학교운동장을 반쯤 갈아엎어 고구마, 땅콩등을 심었다. 예천읍에 살던 일본인이 몇 백병었는지 모르지만 일본 학생만 다니는 소학교와 그들이 경영하는 백화점, 양품정, 제과점 등이 있었다. 군수와 읍장은 조선인이었지만 경찰서장과 학교장은 일본잉이었고, 교사와 순사(경관) 중에도 일본인이 여럿 있었다. 당시 국민들은 전쟁의 실상을 거의 몰랐다. 우리가 입학했을 무렵 이미 일본군은 Midway해전 참패, 가달카날섬 철수 , 야마모토 연합함대사령관 전사 등 전세가 기울기 시작했지만 당국은 전황을 철저히 은폐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신문, 라디오로 일본의 패색을 짐작하셨는지 모르겠으나 설사 그랬더라도 어린 자식들에게 내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학교선생님은 계속 "우리"가 이긴다고 가르쳤다.
나는 키사카의 "태평양전쟁" 내용 중 우리가 관계가 적은 부분을 빼고 번역하였고, 그것을 15-6회로 나누어 경기51회 홈페이지(WWW.kg51.org)에 연재하여 큰 호응을 받는 중임. 이것을 분당교당 홈페이지로 전재하려 하나 무슨 이유인지 일부(예컨대 -(4)-)는 전재가 안 되니 흥미를 느끼는 분은 상기 경기51홈페이지에서 열람하시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