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품2장은 불교와의 기연과 불법을 주체삼아 회상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대종사 말씀이다.
서두의 ‘대종사 대각을 이루신 후 모든 종교의 경전을 두루 열람하시다가’는 원기원년의 상황이다. 대각 원년에 어떤 경전을 먼저 보았을까? 가장 가까운 연인 의형 김성섭(팔산)을 통하여 선서仙書 계통《음부경》《옥추경》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태을도 신자이다. 옥추경은 뒷날 산상기도시 독송하고, 음부경은 <일원상서원문> 작성시 인용된다.
또 천도교를 믿는 외삼촌 유성국과 이모부 최씨(최복경의 부친) 등을 통하여 《동경대전》《용담유사》를 읽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7세 연상인 훈장 김화천을 통하여 《소학》과 《논어》《중용》《대학》《맹자》등 사서四書를 열람하였다.
처화의 한학지식은 결혼 전후하여 김화천 훈장에게 《통감》을 배우면서 문리가 터졌다. 《원불교 교사》제1편 2장 5절 ‘대각’ 항에 보면 대종사 ‘글공부한 시일이 2년에 불과하였’다는데 이는 맞지 않다. 길룡리 주민들 사이에 “진섭이는 천자문도 못 떼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동지팥죽을 안준 것이 발단되어 훈장을 놀래주기로 약속하여 훈장댁 땔감에 불지른 이후로 글방에 발길을 끊었다는 것이다. 이는 뜬소문에 불과하다. 많은 소작인을 거느리는 부친 박성삼의 재력으로 보거나 4남2녀 중 가장 기대가 큰 세째아들에게 시작도 하자마자 글공부를 그만 두게 할 리가 없는 것이다. 5년간 산신 기도하러 다니면서 언제 글공부 하랴 그러는데 종일 산중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삼밭재 마당바위는 오후에 세 시간 정도면 충분히 기도하고 올 수 있는 거리다.
길룡리 6걸의 존장인 역학의 대가 문자삼이 천거한 새 훈장은 그의 문하생 18세 소년 김화천이었다. 권위적이고 허세 부리던 이화숙 훈장에 비할 수 없는 진섭보다 7세 연상의 다정다감한 형 벌 친구였다. 김화천에게 배우게 되면서 진섭은 글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박진섭은 15세에 결혼하고 처화라는 字를 쓰게 된다.
갓 결혼한 십타원 대사모의 이야기에 의하면 밭매다 들어보면 글방에 신랑 목소리가 가장 낭낭했고 “금방 창창 《통감》한권을 엿새만에 떼었다”고 한다. 영광지역은 대개《천자문》,《추구》또는《무제시》,《사략》,《통감》을 보는데 수학기간은 5, 6년간이다. 통감은 송나라 사람 사광의의 중국 사서史書로 56권까지 있는데 보통 통감 2권 3권째 문리가 튼다고 한다. 글방친구 고현태의 말에 의하면 처화는 통감 2권째에 문리를 텄다고 한다. 11세부터 15세까지 글공부를 하였다면 5년간 글방에 다닌 셈이다.
처화가 대각한 뒤로 김 훈장은 그의 제자가 되었다. 태을도 치성 뒤로 모여든 40인의 신도중 한 사람이었으나 8인 제자로 선택되지 못하였다. 처화는 금강경을 보고 법열이 넘쳐 김 훈장 집을 찾았다.
“선생님, 귀한 책 하나를 구했는디 함 보시요.”
“어! 불경 아녀? 내가 유서는 많이 봐서 알지만 불경은 본 일이 없당께.”
책 제목부터 읽는디 뭔 말인지 모르겠단 말이여. 땀을 삘삘 싸.
“금강반약파라밀경이라, 대저 이게 무슨 말이여?”
범어라 이상스런 글자가 있잖아. 미리 전주箋註를 읽었던 종사님은 쭉쭉 해석한단 말이여. 아. 세상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책을 가지고 와서 읽고 해석해주려니 말문이 막혀 정신을 잃어버렸어. 조금 있다가 (종사님이) 책 덮어놓고 “갈랍니다” 하고 나오는데 (훈장이) 전송을 못했어. 삭신이 딱 오그라들어 가지고 일어서들 못했어. 아, 오죽 혼났으면 자기 가족한테 유언했을 것이여. 내 생전에 이렇게 혼이 나봤다고 가족을 모아놓고 이 애기했어. (김형오 구술자료)
처화는 20세 전에 영광교회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그런 연으로 신구약 성경도 구해 통독하였다.
처화의 여러 경전의 열람이, 비교적 주변에서 구하기가 용이한 선서, 동학, 유서, 성서보다 늦게 불서를 접하게 되었다.
비로소 《금강경》을 보고 “서가모니불은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고 찬탄하고 연원불로 정하였다.
《금강경》은 원기2년 사월초파일 전야에 몽중 계시로 책명을 알게 되었다. 의형 김성섭을 시켜 구하게 하였으나 구할 방도를 모르는데 사월초파일날 군서 사람 이재풍(一山)이 왔다. 8인 제자 중 가장 늦게 입문한 제자이다.
대종사님 대각하시고 《금강경》을 보시고자 하였으나 八山선생이 모르므로 一山을 통하여 불갑사에서 이 경을 가져다 보시고 “나 먼저 대도를 안 사람이 있었구나” 하셨다. (이병은, 대산종법사 법문과 일화, 1967. 12.8 법설).
처화는 각후 이듬해 1917년 봄, 사월초파일[釋尊誕日] 하루 전날인 5월27일 새벽에 한 꿈을 꾸었다.
대종사 이미 도를 얻으시었으나 그 무엇으로써 이 도를 이름하며 어떠한 방식으로써 중생을 교화할까 하여 심사묵고 연마에 연마를 거듭하시더니 丙辰 四月七日(음력) 새벽에 대종사께서 한 夢事를 얻으시니, 기골 장대하고 풍채 헌앙한 도승 한 분이 찾아와서 인사를 마친 후에 소매 속으로부터 조그마한 책자 하나를 내어 대종사 전에 올리며 ‘선생님, 이 책의 뜻을 아시겠나이까’ 하거늘, 대종사 그 표지를 보시니 ‘금강경’ 석 자가 분명한지라. 대종사 답해 가라사대 ‘내가 아직 이 책을 읽어 본 적이 없으나 읽으면 혹 알 듯도 하다’고 하셨다. 그 도승 또 말하기를 ‘이것이 선생님의 종지인 즉 두고 잘 읽어 보십시오’ 하고 표연히 떠나가는지라 대종사 翌朝에 諸人을 대하사 그 몽중 소감을 말씀하시고 근처 사찰로 곧 사람을 보내어 《금강경》을 구해 오라 하시니 영광군 불갑면 불갑사에는 금강경판까지 있으므로 한권의 책을 베껴 오는지라 대종사 크게 기뻐하사 전후 경의를 살펴보시고 무한 찬탄하시며 좌우 제인으로 하여금 독송 연구하라 하시니 이것이 곧 불교와의 첫 기연이었으며.…(송도성, 대종사약전, ‘불법 기연’)
처화가《금강경》현몽을 한 날은 사월초파일 전날 새벽, 그리고 그 다음날 석존탄생일에 사람을 시켜 불갑사에 《금강경》을 구하여 오게 하였다고 <약전>에는 서술하고 있다.
이공주 편《원불교 제1대 창립유공인 역사》에는 당시 금강경을 구하여 온 사람은 일산(李載馮의 법명)이며 그가 처화를 만난 것은 시창원년 5월30일(음四・二十九)이라 밝히고 있다. 동 저서 ‘전무출신 약력 제8호 일산이재철’항의 출가 전기出家前記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원기원년 四月二十九(음력) 사산 오창건선생의 지도로 대종사님을 배견하고 장차 본교창업의 취지를 들은 후 적세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듯 환희용약하여 즉석에서 사제지의를 맺었다. 대종사 대각을 이루시고 비몽사몽간에 생각나신 경명이 《금강경》이었다. 때는 원기원년 五月(음력) 대종사의 명을 받들고 《금강경》을 구하러 불갑사로 향하는 26세의 한 선비 청년이 있었으니 이가 곧 일산 이재철 선생이었던 것이다.
위 두 문헌에서 ‘병진년 사월초파일의 금강경 현몽 사실’을 밝히고 있으나 사실과 다르다.
<약전>에는 음력 사월초칠일 ‘翌朝에 諸人을 대하사 그 몽중소감을 말씀하시고 근처 사찰로 곧 사람을 보내어 금강경을 구해 오라 하시니’ 하였는데
《유공인 역사》에는 사월초파일로부터 스무하루가 지나서 이재풍이 처화의 제자가 되고, 5월경에 금강경을 구하러 불갑사에 갔다고 서술하였다.
위 두 문헌의 기록은 처화의 금강경 현몽 사실을 중시한 나머지 연대를 무시하고 서술한데서 오류가 발생하였다.
이 점은 ‘사산 오창건의 지도로 대종사님을 배견한’ 이재풍의 입문 일자가 ‘시창2년 정월십삼일’이란 사실에서 그 실마리가 풀린다.
이재풍이 집안의 사돈벌되는 오재겸(四山吳昌建)의 안내로 길룡리 처화를 만난 것은 ‘시창2년 一月十三日’이라고 《불법연구회 입회 원명부》에 기록하고 있다.(《불법연구회 입회 원명부》 남자부 No13, 교화부소장.)
이 자료는 상당한 객관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이재풍의 입문 지도인인 오재겸이 시창원년 구월구일에 김성섭의 지도로 입문하게 되므로
이재풍이 병진년 사월에 처화를 만났으리라는 설은 도무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길룡리에서 멀리 떨어진 군서면 학정리에 사는 이재풍은 8인 제자 가운데 맨끝으로 처화의 제자가 된다.
이재풍은 오창건의 지도로 이듬해(시창2년) 정월에야 비로소 처화를 처음 만나게 된다.
이상의 논고를 다시 정리하면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된다.
이재풍은 오창건의 지도로 정사년(1917) 정월에 처화의 제자가 되고 그 뒤 수차례에 길룡리에 내왕하였다. 그러던중 부처님 오신 날인 사월초파일에 길룡리를 찾았다.
처화가 동년배인 이재풍에게 물었다.
“자네씨 사는 데서 불갑사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겨?”
‘자네씨’는 영광지역에 동갑이거나 연하 친구를 존대해서 부르는 호칭이다.
“한 십리 되지라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불갑사에 가서 금강경이라는 책이 있는가 한번 알아보고 있거든 하나 얻어 오소” (이완철 구술자료)
불갑사에는 금강경 경판經版(木版)이 있었다. 처화의 부탁을 받아 이재풍은 귀가 도중 불갑사에 들러 금강경 1책을 부탁하고,
그 뒤 시창2년 사월그믐(6.18)에 길룡리에 찾아가 처화에게 갖다 주었다.
남부 신촌에서 불갑사까지는 한 5Km 남짓한 거리다. 큰 내를 거슬러 올라가다 삼학천을 건너 전촌재를 넘으면 불갑면 방마리가 나오고 방마리에서 모악리를 향하여 올라가면 불갑사 큰절이 나온다. 이재풍은 여기서 경을 얻어 박 처사께 올렸다. 처사는 크게 기뻐하여 금강경을 살펴보고 무한히 찬탄하며 좌우 사람들에게 독송 연구하라 하였다. 이것이 불교와의 첫 기연이다.
이후 처화는 《선요禪要》《팔상록八相錄》 한용운의《불교대전佛敎大全》등 불서를 차례로 열람하고 말하였다.
“불법은 천하의 큰 도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며 뛰어난 바 있다” (대종경 서품3장.)
처화는 서가모니불을 진실로 성인들 중의 성인이라 하고, “내가 스승의 지도 없이 도를 얻었으나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돌아본다면 과거 부처님의 행적과 말씀에 부합되는 바 많으므로 나의 연원은 부처님에게 정하노라” 하고 “장차 회상을 열 때에도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대종경 서품3장)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