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박중빈 대종사가 제자들과 금강산 유람을 떠났다가 밤이 되어 여관에 들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여관의 주인은 마침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소태산 대종사는 여관주인의 독실한 신앙생활을 칭찬해 마지않으며 질문를 했다.
" 당신이 믿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십니다."
소태산 대종사가 마침 옆에 놓여 있는 주판을 가리키며,
" 그럼 이 주판에도 하나님이 계십니까?"
여관주인은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이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원광대학교 초대 총장이었던 숭산 박길진 교무가 일본에 갔다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한 노 신학자를 만났다. 두 사람이 즐거운 담소를 나누며 산책을 즐기다가 문득 박 교무가 신학자에게 질문을 했다.
" 하나님이 어디 계십니까?"
한 동안의 침묵이 흐르고 난 후 노 신학자는 말없이 길 옆에 있는 이슬 맺힌 풀잎 하나를 집어들었다.
" 하나님은 여기 계십니다."
" "
너무 큰 물음에 똑 떨어지는 대답을 하기란 쉽지 않다. 그 대답 자체가 오히려 또 하나의 의문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많다.
그동안 여러 성현들이 수 많은 비유와 다양한 표현으로 진실한 삶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해 왔다. 그 말씀을 알아들은 사람은 법의 혜명을 이어 갔고 그들은 또다시 갖은 방편을 동원하여 그 소식을 전하려 애써 왔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역사이며 의미 전달의 역사이다.
여관주인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던 것은 비록 주판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주판이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가지 않아서였을 터이고, 노 신학자가 이슬 맺힌 풀잎을 들었던 것도 이보다 좀더 다양한 신학적 설명이 가능하였을 터였다.
" ○"은 어디에 있는가?
어차피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불완전한 것일 수 밖에 없다는 전제 속에서 이야기를 해보자.
" ○"은 우주만유에 있다.(宇宙萬有의 本源)
나를 포함하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존재들을 존재케 하는 그 무엇을 가리킨다. 길에 구르는 돌을 보면서, 나뭇잎을 만지작거리며 밤하늘의 별을 헤면서,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해 애정어린 깊은 관심을 기울여보자.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과 그 밖의 것들까지도 그것이 존재하고 변화하게 하는 그 무엇이 느껴지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 "○"에 관심을 갖고 모든 사물들을 바라보는 순간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서는 "○"이 새롭게 발견되고, 모든 존재가 새롭게 빛을 발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을 일러 "○"이라 표현한 것이다.
출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물과 파도를 함께 보듯이 존재의 본원과 존재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모든 존재들도 그대로 부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우주 전체는 하나의 거대한 꽃이며 둥근 일원상이다. 모든 존재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의 근거를 주고받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의 네트워크이다. 우주만유를 대하며 "○"을 발견하는 사람, 그가 바로 깨달은 사람이다.
또 "○"은 모든 부처와 성현들의 마음에도 있다(諸佛諸聖의 心印).
앞서간 제불제성들은 이 진리를 마음거울에 그대로 투영하며 살았다. 범부들에게 마음을 닦으라고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먼지가 낀 거울, 뒤틀린 거울로는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고 맑은 하늘도 흐려 보이기 마련이다. 우주만유에 있는 진리의 소식은 바로 제불제성의 잘 닦인 마음 거울 속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우리 종교만이 최고의 진리를 설하셨다는 주장은 바르지 못하다. 우리의 종교만이 가장 우월하고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는 말도 종교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각 종교의(미신적인 종교는 제외하고) 가르침은 상이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설해진 것일 뿐, 결국은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산의 정상을 오르는 길이 여럿 있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의 진리를 향한 다양한 접근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인도말로 자비를 설하신 부처의 가르침과 중국말로 인(仁)을 설하신 공자의 가르침과, 히브리말로 사랑을 설하신 예수의 가르침과, 조선말로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신 최수운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다면 그야말로 이같은 불행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해 진리는 참으로 다양한 형태로 설해졌다. 원불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가르침의 도장들은 계속해서 성자들의 또다른 모습을 빌어 "○"모양을 우리들 가슴 속에 찍어 온 것이다. 갈수록 다종교화 되어가는 사회에서 서로를 하나로 이어주는 이 동그라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진정한 평화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세계의 모든 분쟁의 뒤에는 항상 종교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종교 배타주의가 극성을 부리기보다는 종교 포용주의가 더 강조되어야 할 때이다.
아울러 "○"은 우리들 본래마음에도 있다.(一切衆生의 本性)
비온 뒤에 흙탕물 속을 보라. 물결은 자지 않고 흙가루는 분주해서 탁해 보이기 짝이 없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물결이 자고나면 물은 본래의 맑음으로 투명하게 빛난다. 그 맑은 물에 얼굴을 가까이하면 내 모습이 비친다. 그리고 내 모습 뒤에 있는 저 높은 하늘도 물에 비친다.
우리들의 마음이란 잡으면 있고 놓으면 없어지는 것이라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데 그 작용하는 것을 보면 신출귀몰하기 짝이 없다. 바쁜 사회생활 속에서 이 일 저 일에 몰두하다보면 우리들의 마음이란 것이 마치 흙탕물과 같아지곤 한다. 내 모습도 제대로 비춰지질 않는다. 다른 사람의 모습도 제대로 비춰지질 않고, 맑은 진리의 하늘도 뒤틀려 비춰질 것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내 마음바탕, 본성은 흙탕물의 모습이 아니라 맑고 투명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맑은 물이지만 경계에 따라 흙탕물도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내 마음의 바탕은 원래는 "○"이지만 물결에 따라 "△", "□"로도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다.
그래서 나 밖에 있는 "○"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반쪽에 불과하다. 내 마음에 있는 "○"과 밖에 있는 "○"을 찾을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놀라운 것은 내 안에 있는 "○"에 눈뜨는 순간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인연들에게서도 "○"을 발견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내 안에 "○"을 발견하면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에서도 "○"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내 안의 "○"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 더이상의 외로움은 없다. 모든 인연과 존재들과 성현들과 내밀한 대화의 문이 살며시 열리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충만함과 나누는 기쁨은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