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상징의 동물이라고 한다. 인간은 서로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의 약속을 통하여 서로 밀접한 의견들을 교환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언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상징물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태극기 앞에 서면 오른 손을 들어 왼쪽 가슴에 얹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자연스럽게 외운다. 국가 대항의 운동경기에서 힘겹게 승리했을 때 게양대를 서서히 올라가는 태극기와 애국가 연주 소리는 선수들을 울먹이게 하고 보는 국민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3.1운동 당시의 빛바랜 사진을 보노라면 태극과 괘로써 그려진 태극기가 단순한 도형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값진 그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사랑" "의리" "국가" "인류" "충" "효" 등을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다. 아니 목숨을 던지며 그것들의 의미를 만들어 왔다. 인간은 상징을 만들고 상징은 인간을 만들어 온 것이다.
원불교의 대표적 상징은 "○"이다. 불교에서는 흔히 부처님 모습을 조각해서 모시고 신앙의 상징물로 삼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으레 "†"(십자가)를 놓고 신앙의 상징으로 삼는다. 종교적 신심이 없이 그 상징물을 본다면 그것은 한갓 나무나 쇳조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심있는 신도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상징물들은 자신들의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의미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불교에선 왜 "○"을 모시는가? 다른 종교에서와 같이 하나의 상징으로서 모신다. 나무조각이나 플래스틱의 모형이 아니라 엄청난 의미의 무게를 지닌 상징물로 "○"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정산 종사는 교당 봉불식(교당에서 처음으로 법신불 일원상을 모시는 의식)에서 일원상을 모시는 까닭을 이렇게 말했다.
" 법신불의 근본을 말하자면 언어와 명상이 끊어진 자리며 그 실체를 말하자면 우주만유가 모두 법신불 아님이 없다. 때문에 일원상을 봉안하지 아니하여도 법신불의 진리는 항상 여여히 있으나, 우리 일반 대중에게 있어서는 신앙의 대상을 보이지 아니하면 마음의 귀의처와 수행의 표준을 알기가 어렵고 설령 안다 할지라도 마음 대조에 때때로 그 표준을 잃기가 쉬우므로, 대종사께서 교당이나 가정을 막론하고 법신불의 상징인 이 일원상을 봉안하여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받들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저 표준의 일원상을 봉안하고 신앙함으로 인하여 참 일원상을 발견하여야 할 것이며, 일원의 참된 성품을 지키고 일원의 원만한 마음을 실행하여, 일원상의 진리와 우리의 생활이 완전히 합치함으로써 다같이 한량없는 복락과 한량없는 지혜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은 일원상의 진리를 도형화 해 놓은 것이니 "법신불 일원상"이라고 하면 겉모습은 꼭 같은 "○"이지만 여느 "○"(동그라미)가 아니라 원불교 교도들의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이 되는 의미심장한 "○"(법신불 일원상)이 되는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 우리회상에서 일원상을 모시는 것은 과거 불가에서 불상을 모시는 것과 같으나, 불상은 부처님의 형체(形體)를 나타낸 것이요, 일원상은 부처님의 심체(心體)를 나타낸 것이므로, 형체라 하는 것은 한 인형에 불과한 것이요, 심체라 하는 것은 광대무량하여 능히 유와 무를 총섭하고 삼세를 관통하였나니, 곧 천지 만물의 본원이며 언어도단의 입정처(入定處)라, 유가에서는 이를 일러 태극(太極) 혹은 무극(無極)이라 하고, 선가에서는 이를 일러 자연 혹은 도라 하고, 불가에서는 이를 일러 청정법신불이라 하였으나, 원리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바로서 비록 어떠한 방편 어떠한 길을 통한다 할지라도 최후 구경에 가서는 다 이 일원의 진리에 들어가므로 만일 종교라 이름하여 이러한 진리에 근원을 세운 바가 없다면 그것은 곧 사도(邪道)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회상에서는 이 일원상의 진리로써 우리의 현실 생활과 연락시키는 표준을 삼았으며, 모든 신앙과 수행의 두 문을 밝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