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기 끔찍한 일이지만 어떤 사람이 한사람을 칼로 찔러서 살해한다고 하자. 충동범이 아닌 다음에야 정말 지독한 마음을 먹었거나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결단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한층 더 끔찍한 상상을 해보자. 어떤 사람이 칼이나 다른 원시적 무기로 백명을 살해한다고 가정을 하면 또 어떨까? 도대체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일까?
그러나, 일년전 아프리카 르완다에선 내전으로 50만명이 죽었고 300여만명의 난민이 아직도 떠돌고 있다. 그 곳 난민촌에서는 1분에 1명씩 사람이 죽어 간다. 보스니아에서는 3년간의 내전으로 20만명이 희생되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지금 우리 곁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그 발전과 함께 살상의 규모를 더해 가고 있으니 그 까닭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잔인함과 추악함도 더욱 발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차대전의 대량살상(사망 854만명)은 2차대전(사망 5200만명)에 의해 그 기록이 경신(?)되고 이제는 3차대전의 문턱에서 인류공멸의 공포가 폭넓은(?) 공감대를 획득하고 있다. 한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는 것보다 원자폭탄의 단추 몇 개를 눌러서 인류를 전멸시키는 것이 더 손쉬워진 세상, 대량살상이 마치 전자게임처럼 이루어질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떠받치고 있는 문명의 정체를 현기증 나는 눈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가장 권위있는 상이랄 수 있는 노벨 평화상의 뒤안길에 대량살상의 무기가 된 다이너마이트의 포연이 자욱하고 그 속엔 광산 일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벨의 노력이 있었다는 이율배반을 보아야 하고, 또다시 아인슈타인과 원자폭탄 사이에 감춰진 이율배반을 보아야만 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한다. 불편하지만 안전한 원시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편리하지만 위험천만한 문명의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계속 밟을 것인가? 물론 그 선택은 우리에게 모두 쓴 잔일 수 밖에 없다. 두 가지 모두 바람직한 선택은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선택은 물질문명의 선용이고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의 조화이다. 따라서 정신문명이 물질문명을 선도하여 마음의 낙원과 몸의 낙원이 어우러지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당위적 의무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80년 전 일찍이 삶의 원리를 깨달으신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는 현대문명을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부조화라는 관점에서 진단하고 그 처방을 내리니 바로 정신세력의 확장에 의한 조화로운 문명세계 건설이었다.
사문유관을 하면서 인간의 생.로.병.사로부터 해탈을 외친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여호와의 소식을 전하며 천국의 도래를 외친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하면 실로 "이유 같지 않은 이유" 같아 보인다.
그러나 20세기의 문턱에서 문을 연 원불교의 개교동기는 그 창시자에 의해 다음과 같이 경전에 명시되었다.
"모든 사람이 도리어 저 물질의 노예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 생활에 어찌 파란고해(波瀾苦海)가 없으리요. 그러므로,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으로써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 받아,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樂園)으로 인도하려 함이 그 동기니라."
소태산 대종사는 "현대 문명인들을 노예생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새시대의 새 종교 원불교를 창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