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란 곧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종교에는 많은 역할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입니다.
원불교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법신불 일원상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둥근 일원상처럼 삶과 죽음은 시작과 끝이 아니라 변화라는 것입니다.
대종경 서품 1장에 보면, 대종사님께서 대각을 이루시고 “만유가 한 체성이며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 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대종경 천도품 5장에서는 “이 우주와 만물도 또한 그 근본은 본연 청정한 성품 자리로 한 이름도 없고, 한 형상도 없고, 가고 오는 것도 없고, 죽고 나는 것도 없고, …<중략>… 만물은 생로병사를 따라 육도와 사생으로 변화하고, 일월은 왕래하여 주야를 변화시키는 것과 같이 너의 육신 나고 죽는 것도 또한 변화는 될지언정 생사는 아니니라.”라고 하여 죽음이 본직적으로 생멸(生滅)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생과 사는 시작과 끝이 아니라 곧 변화임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대종경 천도품 1장에서는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고 하여 변화 속에 생과 사의 관계를 밝혀놓기도 하셨습니다. 즉 잘 죽는 사람이라야 잘 살 수 있으며, 잘 나서 잘 사는 사람이라야 잘 죽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현재 우리 나라 굴지의 회사 회장으로 있는 모씨의 가정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모씨의 할아버지는 그 고을에서 3천석을 하며 사는 이름난 부자였습니다.
하루는 마을에 나갔다가 해산을 한 산모가 먹을 것도 없고 추운 방에서 땔 것도 없이 고생하는 것을 보고는 ‘가난한 사람이 아이를 낳으면 쌀 3말과 미역 한 통을 주리라.’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었습니다.
또 얼마가 지나서, 가난한 사람이 죽었는데 장례 치를 비용이 없어 송장을 수수대로 감싸 지게에 지고 가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씨의 할아버지는 송장을 수수 대에 싸서 지고 가니 냄새도 나려니와 이 생에서 죽어 마지막 떠나는 길에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가난한 집에 초상이 나면 송장을 넣을 수 있는 관 하나와 짚신 한 죽 - 한죽은 10켤레, 당시는 고무신이 없어 모두 짚신을 신었다.- 을 주리라.’ 결심하고 실행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소문은 인근에 퍼져 가난한 집안에서 아이를 낳거나 초상이 나면 의례이 찾아와 쌀과 미역, 짚신 등을 얻어 가는 사람들이 매일 줄을 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 주다보니 3천석 재산도 지탱하하지 못하고 점점 기울어지게 되어, 모씨의 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가산을 정리하여 이웃 고을로 이사를 하여 살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리고 난 얼마 뒤 모씨 어머니가 꿈을 꾸니 시아버지가 등에 업히는 것이었습니다. 며느리는 꿈이지만 하도 민망스러워 “아버님, 왜 이러세요.”하고 뒤를 돌아다보니, 시아버지가 아이가 되어 등에 업히어 있었습니다.
“시아버지가 죽어 손자로 왔다.”는 소문은 금새 고을에 퍼지게 되었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저 집은 지금 가난하지만 할아버지가 죽어 손자로 왔으니, 반드시 크게 성공하여 부자로 살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 장성한 손자는 조그마한 사업을 시작하더니 날로 번창하여 국내 굴지의 회사 회장이 되고 부자로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회사 임직원들의 고향을 보면 많은 수가 할아버지가 사셨던 고을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할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다시 태어나 그 손자의 회사에 들어와 옛날에 입은 은혜를 보은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하여 주기 때문에 회사가 날로 발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은 이를 두고 할아버지가 선업을 행해서 손자가 복을 받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은 자기가 지어서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인과의 세계, 48쪽>
이처럼 지은 업을 따라 그 과(果)를 받으며 윤회하는 모습을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은 많이 있습니다.